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하나 Feb 28. 2022

늑대와 여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2015년 한국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지낸 시간이 거의 없다. 엄마, 아빠 보러 몇 달, 팬데믹으로 꼼짝 못 한 몇 달을 제외하면. 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태국 남동부 작고 외딴 시골 섬에서 다이빙을 하며 글 쓰며 먹고 살아왔다. 세계여행 한 번 못 갔는데, 이 작은 섬에서 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만나는지 모른다. 지금 일하는 다이빙 센터만 해도 영국, 호주, 뉴질랜드, 독일, 스페인, 프랑스, 미국, 태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한국, 홍콩, 싱가포르에서 온 친구들이 팀으로 함께 한다. 


전에 일했던 다이브 센터에서 친하게 지냈던 프리다이빙 강사 세르게이의 페북 포스팅이 하나 올라왔다. SNS 잘 안 하는 양반이라 얼른 봤더니 “부끄럽고 수치스럽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세르게이는 러시안이다. 이곳, 꼬따오에서 여러 해 동안 함께 해오고 있는 그의 파트너 라나는 우크라이나인이다. 그리고 세르게이가 포스팅 한 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했다. 


마음 같아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열렬히 내고 싶지만, 전 세계 사람들에게 다이빙을 가르치는 나로선 조심할 수밖에 없다. 2년 전, 멕시코에서 트럼프 발 ‘아시안 헤이트’와 인종차별을 겪었던 코로나19를 ‘차이니즈 바이러스, 쿵후 플루’라 공공연히 말하던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애티튜드를 비난했다. 트럼프가 뉴스에서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다음 날 나는 인종차별에 위협을 느껴 멕시코에서 동네 슈퍼마켓도 가기 두려웠기 때문이다. 전에 내가 강사 과정을 가르쳤던 미국인 학생이 나를 맹비난했다. 그는 트럼프 지지자였고, 위대한 트럼프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해야할 일을 하는 거라 우겼다. 논리도 증명도 없이 물고 늘어지며 괴롭히는 그의 계정을 차단하고 나서야 한 숨 돌렸지만, 그 과정 자체가 너무 피곤했다. 


한 인간의 삶,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복잡하다. 그런 복잡한 각자의 삶, 수십억이 뒤엉켜 사는 별, 지구. 당신과 내가 지금 이 순간, 지구 어디에 좌표를 찍었는가에 따라 기구한 운명은 나뉜다. 내 눈엔 보이지 않지만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태국 남동부 외딴섬 꼬따오에서의 다이버로서의 내 일상은 여전히 평화롭고 아름다워 더 두렵다. 하지만 지구 멀리 있는 나라의 국경에서 시작된 작은 불꽃 하나가 어떻게든 수일, 수개월, 수년 후 내 삶에 기여코 영향을 미칠 것이다. 러시아 시민은 푸틴이 잘한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반대일까, 아니면 그저 그를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그를 너무 사랑하는 걸까. 자신이 추앙한 지도자가 독재자가 되어 비열한 침략을 일삼는 걸 지켜보는 시민, 그들의 마음은 어떨까. 이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를 지켜봐온 우리 마음으로 짐작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은 CNN을 주로 보는 편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수도 키예프 곳곳을 ‘PRESS’ 방탄조끼를 입고 거닐며 취재하는 종군 기자가 현장의 참상을 전한다. 그가 직접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낀 것 말이다. 그 와중 다리 위에 공격에 희생당한 민간인 시체가 카메라에 잡힌다. 방송사는 이를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는다. CNN의 분명한 의도다. 푸틴이 한 짓을 똑똑히 보고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라는 세상에 대한 CNN 나름의 메시지다. 


FRANCE24 채널도 좋아한다. 이 방송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목소리를 낸 국제사회의 리더를 나열하며 과연 이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거나 멈출 수 있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좇는다. 리포터는 미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발포하는 순간, 세계 제3차 대전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바이든이 최대한 침착하려 자제하는 중이라 했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고 가장 힘센 나라의 대통령이다. 바이든이라고 천조국의 자존심이 없겠나, 힘자랑하고 싶지 않겠나, 땅따먹기 하고 싶지 않겠나. 바이든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에 그러지 않기로 한다.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알기 때문이다. 푸틴도 대통령이긴 하지만, 이름만 ‘대통령’인 ‘독재자’의 자리에 앉은 자라 이 프레임에 들일 수조차 없다. 


대통령으로서의 결정, 그 책임감의 무게는 상상이 안 된다. 한국인에겐 모든 면에서 열세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침공당하는 것이 트리거다. 우리는 불과 한 세기 안에 그 일을 겪었고, 책임져야 할 이들이 가장 먼저 도망가거나 그 와중에도 자신의 이익을 챙긴 걸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재가 된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게 어떤 건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 나라 없이 떠돌며 겪은 서러움과 분노, 수치의 감정이 여전히 우리의 DNA에 남아있다. 


우리 다이빙 센터에서 얼마 전 내가 강사 과정을 교육했던 마리아는 프렌치지만 외할머니가 크림반도에 산다. 마리아의 할머니는 현재 문서상으로 러시아인도, 우크라이나인도 아니라고 한다. 수년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빼앗은 크림반도에 사는 우크라이나인으로 여전히 관공서 서류 정리가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될 기미가 없다고 한다. 팬데믹에 노환으로 이동도 어려워진 마리아의 할머니에겐 피란도 사치다. 마리아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외할머니의 기구한 운명에 눈물을 지었다. 


트럼프가 다시 집권했다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는 미국인들의 의견이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코미디언 출신에 국정 경험이 많지 않아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기사도 쏟아진다. 미국이 첩보전으로 얻은 러시아 침공 계획을 우크라이나에 알렸지만,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현실적으로 얻을 게 많지 않은 전쟁을 일으킬 거라 예상하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우크라이나인에게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니 호들갑 떨리 말라며 수개월의 골든타임을 무기력하게 놓쳤다. 사실이다. 국가 지도자로서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하지만 전쟁 당사국, 당사자가 아닌 주변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기는 쉽다. 적어도 젤렌스키는 나라와 국민을 버리고 가장 먼저 도망치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휴전’ 상태의 분단국가 시민으로서 내 생각은 다르다. 트럼프가 현 미국 대통령이었다 해도 푸틴은 기여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것이다. 트럼프와 푸틴의 밀정으로 트럼프는 오히려 푸틴을 부추기고 응원하고 챙길 것 다 챙겼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젤렌스키가 아니었다 해도 푸틴은 ‘구소련의 영광의 재현’의 열망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지금, 앞으로가 중요하다. 바이든과 젤렌스키는 자신이 선택한 자리의 무게와 책임감을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걸 할 것이다. 정의도 약속도 협정도 하루아침 탄도 미사일 한 발에 깡그리 없었던 것이 될 수 있는 냉혹한 국제정치 무대에서 우리는 전쟁을 우습게 아는 사람보다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영민하고 순발력 있게 외교력,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경거망동하지 않는 바이든의 무게감, 자리의 책임감을 져버리지 않고 전장의 최전방에 서서 시민과 함께 싸우는 젤렌스키의 용맹함를 가진 리더가 필요하다. 여우의 신중함과 기민함, 늑대의 용맹함을 함께 갖춘 리더가 필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가져 마땅한 지도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