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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Aug 13. 2022

빗속의 ‘기생충’

전날 비가 많이 와 공기도 맑고 하늘도 좋다는 연교, 서울 하늘 아래 똑같이 내린 같은 비로 지옥을 겪은 기택. 영화 <기생충> 중에서.




요즘은 매달 다이빙 강사 코스를 가르치고 있다. 2주간 강사 후보생들과 긴 호흡으로 함께하는 코스이기에 심리적으로도 예민하게 접근해야 한다. 두 달 전인가 강사 교육을 하는데 한 친구가 강사 교육 코스 스태핑으로 참여했다. 일 년에 한두 번 휴가 때면 미국에서 태국까지 건너와 강사 코스 스태핑으로 크레딧을 쌓고 돌아가곤 하는데, 호칭이 나이의 기준으로 달라지지 않는 웨스턴 문화이기에 ‘친구’라 칭할 뿐, 오십 대 중반의 큰 어른이다. 


강사 코스 첫날은 항상 오리엔테이션 겸 각자 소개를 하는데, 일하는 곳이 인터내셔널 다이빙 센터이다 보니 매달 전 세계 다양한 나라와 문화를 가진 친구들이 한곳에 모이는 자리라 흥미롭다. 강사 코스 스태핑을 위해 미국에서 잠시 들른 그 친구는 자신이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며 얼마나 많은 보수를 받는지, 자신이 얼마나 돈이 많고, 어떤 지위의 사람인지를 피력했다. 그걸 듣고 있으면서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강사 후보생 중 하나는 군부 쿠데타로 산산조각 난 미얀마에서 온 친구였다. 그것도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군부 쿠데타를 경험한 나라의 젊은이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누군가의 후원과 도움으로 참여하게 된 강사 코스였다.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눈치 없이 한참 떠들어대는, 건방지고 부끄러운 미국 꼰대 아저씨를 보며 조심 좀 시켜야지, 싶었다. 조금의 배려도 헤아림도 따뜻함도 없었다. 그렇게 불편한 분위기에 공기가 무거워지고, 자기소개 차례가 다가오자 더듬거리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미얀마 친구의 모습에 나는 따로 그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강사 코스를 맡아 이끄는 리더로서 우리 팀원의 경솔하고 짧은 생각의 발언을 대신해 미안하다고, 마음 풀라고.


한국에 하늘이 열린 듯 비가 쏟아진다고 했다. 강남역 한복판 제네시스 위에 올라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는 한 사내의 사진이 밈으로 인터넷을 떠돌았다. 내가 한국에서 얌전히 다니던 잡지사를 계속 다니고 있었다면, 나 역시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서울이 노른자라면, 경기도는 노른자를 에워싼 흰자”라고 <나의 해방일지> 염미정이 말했다. 평생 노른자가 아닌 흰자에서 살아온 나는 저 정도의 폭우에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애초에 포기하고 근처 모텔방을 잡았겠지. 부천서 강남까지 집을 나와 시내버스 타고 역으로 가 지하철 타고 또 걷고, 하루 왕복 4시간이 걸리는 직장을 몇 년 동안 매일을 다녔다. 폭설에 폭우에 별의별 일이 생겨도 출근을 했다. 왜 그리 열심히 다녔냐고? 다들 그렇게 하니까, 했다. 그거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리 열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슬프다. 


한 외신은 그날의 한국, 콕 집어 서울의 폭우 소식을 전하며 영화 <기생충>을 가져왔다. 그리고 한국의 현실은 영화의 그것보다 더 잔인하다며 다수의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반지하’ 문화가 생소한 미국 사람들에게 물이 턱 밑까지 찬 반지하 방에서 그래도 뭐 하나 건지려 아등바등하는 기택, 수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기우, 물 가득 찬 화장실을 가로질러 물이 닿지 않는 꼭대기 변기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기정, 그리고 그들이 침수된 반지하 방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줄기가 손바닥만큼만 보이는 창을 통해 바깥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치자. 그런 뒤, 대통령실에서 “국민 안전이 최우선입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그 반지하 방을 밖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국정 홍보용으로 쓴 사진을 보여주자. 그들은 국제적인, 그리고 범 인간적인 상식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지도자를 과연 어떤 사람이라 생각할까? 여기서 과연, 누가 진짜 기생충일까. 반지하에서 밖을 내다보는 약자? 밖에서 안을 내려다보는 강자?


누군가가 죽었다. 그게 내 자식이고 형제, 자매, 친척이다. 현실이다. 지옥일 것이다. 거길 뒤뚱뒤뚱 거리며 얼굴을 들이밀고는 자기 사는 고급 아파트 이야기나 떠들어 댄 건 인격 모독이다. 희생자에게도 윤석열에게도 비는 똑같이 내렸다. 윤석열은 아크로비스타에 살아서 살았고, 희생자는 반지하에 살아서 사망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국민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예의부터 잘못됐다. ‘어쩔 수 없는 거죠, 뭐’ 하며 손바닥을 하늘에 대고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또 얼른 소맥에 안주 먹으러 퇴근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얼마나 배려 없고 예의 없는 순간으로 상처받고 자존심을 다치는가.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베테랑>의 대사를 좋아하는데, 내 처지랑 딱 맞아서다. 돈은 없지만 가오는 있다, 내가. 그래서 내 나라의 지도자는 나를 먹여 살려주진 못할망정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해외 노동자로 사는 내 자존심이라도 세워주는 역할이라도 해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나는 문재인이 좋다. 딱히 능력 있게 딱 부러지게 뭐 하나 잘했다 싶은 건 없어도 적어도 해외 사는 내가, 내 나라가 부끄럽진 않았다. 국정 농단으로 너덜너덜해진 정부를 인수위도 없이 이어받아 이만큼 품격 있고 국격 높은 나라로 이끌어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소임 이상을 해냈다. 가진 부동산이 없다 보니 부자들에겐 얼마나 욕먹을 짓을 했는진 모르겠으나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을 머리 커진 이십 대부터 경험한 나로선 문재인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잘 한 대통령이다. 재임했을 땐 고구마 삼킨 것처럼 답답했는데, 퇴임 후 가만히 돌아보면 그는 일부러 그랬던 것 같다. 못 들은 척, 못 본 척, 모르는 척, 그렇게 그가 ‘척’을 해야 한 국가의 ‘대통령’이라는 일의 균형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인내해야 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참아야 했을 것이고, 나서고 싶어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대통령이었다. 그러면 뭐 하나, 이미 떠난 버스인데.


초등학교 시절, 우리 가족은 반지하에 살았다. 맞벌이에, 아빠는 멀리 현장에서 한 달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한 집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장마철이면 안절부절 못했다. 뉴스에서 ‘폭우’라는 자막이 나오면 나는, 제일 먼저 나일론 스타킹에 모래를 넣어 만든 걸로 화장실이며 거실이며 하수구부터 막았다. 집엔 늦도록 나 혼자였다. 핸드폰이란 게 없던 때였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나는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에 혼자서 한참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엄마는 일을 마치고 돌아와 세상에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물을 퍼냈다. 엄마의 원망은 아빠에게 이어졌다. 폭우가 내려 집에 물이 차면 자연스럽게 부부 싸움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비 때문에도 싸운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비만 오면 집안에 물이 찼다. 그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이라도, 이후엔 재빨리 동네 교회로 뛰어가 도움을 청했다. 경찰도 소방관도 기억에 없다. 물이 차오르는 우리 집에 초등학생 여자애 하나가 울고 있을 때 주저 없이 뛰어들어 도와준 건 동네 이웃뿐이었다. 


나는 지금도 비 오는 날이 힘들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서다. 그동안 상처라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찌 보면 그런 기억으로 사람들과 공감하는 잡지사 기자 일이나 작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그 기억이 고맙진 않다. 분명 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부잣집 애는 그런 기억을 가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부잣집 애 나름 힘든 일이 있겠지만, 그 수많은 힘든 일 중 저절로 이미 사라진 위험 요소들이 부자가 아닌 집 애들에 비해 훨씬 많다. 부자가 아닌 집 애들은 직접 시간을 들이고 깨져봐야 알 수 있는 길을 부잣집 애들은 몇 걸음만에 닿는다.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걸 받아들여가는 것 자체가 인생 아닐까 싶다.


못 사는 사람에 대한 잘못이나 책임이 잘 사는 사람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경제는 돌도 돈다. 누군가 잃는 만큼 누구는 번다. 부자라는 개념은 가난한 자가 ‘있어줘야’ 성립되고, 오래 지속될 수 있다. 그걸 위해서 부자들은 무엇이든 한다. 부자들은 정치, 대통령, 언론, 통신, 기술, 모든 분야에 마음만 먹으면 손을 뻗을 수 있다. 차라리 이명박을 사면하는 게 이재용 복권시킨 것보다 나을 뻔했다. 나는 이재용이 뭔가 께름직하다.


전 세계 어떤 정부, 어떤 지도자라도 천재지변 재난, 재해 피해 앞에서 슈퍼히어로가 될 수 없다. 그동안 잘못된 정치인들의 아주 잘못된 정책의 결과가 오랜 시간 조금씩 조금씩 쌓여 사태를 더 크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지기에 사람들은 이제, 너무 지치고 피곤하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나중에 따지자. 윤석열 말마따나 “지금 국민들 숨이 넘어가는” 상황이니. 과연 , 이 사람이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하고 재발을 방지할 건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과연 우리가 어떤 지도자와 정부를 세운 건지, 대체 어떤 인간을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건지 온전히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겠지.


문재인은 코로나를 막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정은경에 큰 지지와 힘을 실어줬다. 지금 생각하면, 정은경의 나긋하고 다정한 말투의 브리핑을 매일 들으며, 그녀의 하얘져가는 머리칼을 보며, 우리 모두 일종의, 위로를 받은 게 아니었을까. 모든 게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를 믿으세요, 하는 무언의 위로. 정은경의 브리핑 매너와 태도는 정말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 외교부 장관이었던 정경화의 CNN 인터뷰가 우리 다이빙 센터 강사들 사이에서까지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너네 나라 장관, 멋지다"라는 말을 들었다. 박근혜 때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어색하고 썰렁한 북한, 남한 농담 들어줘야 하고, ‘강남스타일’ 추면 웃어줘야 하고, 괜히 위축되고 자신 없었는데, 문재인 때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말 그대로 ‘대접’을 받는다. 특히 태국에 사는 나로선 피부로 실감한다. 해외에 나가보면 안다. 한국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단 걸. 이제 더 이상, ‘중국도 일본도 아닌 어정쩡한 나라’ ‘전 세계 유일한 분단 국가’가 아닌, ‘코리아’로서의 당연한 국격이 만들어진 거다. 앞으로 이걸 윤석열이 얼마나 후퇴시키고 망가뜨릴지 상상도 못 하겠다. 


윤석열은 내리는 비를 막을 수 없다. 김건희도, 권진 법사도 내리는 비를 막을 수 없다. 윤석열이 딱히 뭔가 할 거란 기대는 아예 없었는데, 이 와중에 ‘사저 지휘’네 뭐네, 안 그래도 사는 거 힘들고 심란한 사람들 속을 더 시끄럽게 만든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나 있던가. 그 대신 이 사람은 박순애를 교육부 장관에 앉혀 애꿎은 엄마들의 시간과 에너지를 앗아가 버렸다. 감투의 무게를 알면서 우습게 여기는 건지, 아니면 아예 감투의 무게 자체를 감당하지 못하는 건지, 모를 일이다. 그 사람 주변에선 결코 정은경 같은 사람을 찾지 못할 것이다. 썩은 물엔 썩은 물만 고이니까.


문재인도, 윤석열도, 권진 법사도, 김건희도, 누구도 내리는 비를 멈출 수 없다. 그래도, 적어도, 한 나라의 지도자인데, 2022년인데, 대통령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예의와 품격이라는 게 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의 위엄과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 국민을 어루만져야 한다. 공감해야 하고, 또 진심이어야 한다. 아니면 연기라도 잘하던가. 나라 지도자가 바뀌면 대한민국 행정부, 말단 공무원에게까지 어떻게든 영향을 끼친다. 모두 우리 집안 누구고, 이웃 누구에, 친구 누구다. 그렇게 한 나라의 지도자는 “나는 정치적이지 않은 사람”이라 말하는 사람의 일상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직간접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또 비정치적으로 구석구석 영향을 끼친다. 내가 대통령에 최소한의 ‘신사의 품격’을 바라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대한민국 국민은 정말 착하다. 일본에도, 미국에도, 중국에도, 북한에게도, 모두에 참 착하다. 심지어 무능하고 공감력, 눈치, 품격 모두 없는 지도자에게마저도, 수많은 반지하에 사는 이들의 노동에 기생해 이득을 취하는 부자들에게도, 우리는 그저 한없이 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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