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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Sep 19. 2022

<오징어 게임>이 해외 사는 나라는 개인에 미치는 영향

블랙리스트 감독 황동혁의 성공이 외국인 노동자인 나에게 더 특별한 이유.


<오징어 게임>이 미국 버전의 방송 예술 대상 ‘에미 어워드(Emmy Award)’에서 한국어 작품 최초로 6관왕에 올랐다.


황동혁 감독 스스로 “감독이 된 후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든 영화”라 밝히며 애정과 열정을 바친 <남한산성>의 실패 후, 1년간 두문불출했다. 그러던 그에게 다시 손을 내민 건 아이러니하게도 <남한산성>의 제작사, 싸이런픽쳐스였다.


싸이런픽쳐스 김지연 대표는 소설가 김훈의 딸이기도 하다. 그는 황감독의 시나리오를 전작의 실패와 손해와 분리해 읽은 게 틀림없다. 김 대표의 느낌이 맞았고, 영화 제작을 밀어붙인 추진력은 ‘신의 한 수’였다.


이 작은 태국의 시골 외딴섬에도 어린아이가 <오징어 게임> ‘영희’ 드레스를 입고 영화에 나온 게임을 하고 논다.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에도 K팝이 울려 퍼진다. 이제 더 이상 “한국에서 왔다”라고 하면, 일본과 중국 사이의 애매한 나라로 보지 않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외국인 친구들은 김치를 미개한 음식으로 취급했다. 지금은 나에게 김치 좀 구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건강과 몸매 관리에 좋다는 얘길 많이 보고 들었단다. 영화, 드라마, 음악에 투영된 한국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음식과 사는 모습에 관심을 가지며, 한국을 온전히 한국이라는 나라로 봐주는 날이 올 줄 몰랐다.


<기생충>의 봉준호,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최근 세계무대에서 인정받은 세 감독은 모두 박근혜, 이명박 정부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인물이다. 황감독은 공지영 장편소설 <도가니>를 만들었고, 영화에서 경찰과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표현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변호인>에 노무현 역으로 분했던 송강호도 그랬고, 이제는 방송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김제동도 그랬다.


대한민국 국민이 듣고 싶은 음악, 보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건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섬에 살고 있는 중국인 친구는 자기 나라에 돌아가면 페이스북에 접속할 수 없다. 자유가 뒷받침된 콘텐츠의 힘과 영향력은 수치화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봉준호, 박찬욱, 황동혁, 모두 그 치사하고 서러운 시간에도 포기하지 않아 영화팬으로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한국 영화, 음악, 음식, 문화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명성을 드높인다는 것을 두고 괜히 ‘국격’을 높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한국인의 취향과 의견, 결과적으로 한국인의 ‘목소리’에 덩치 큰 나라가 귀 기울인다는 의미이다. 문화의 힘이 강해진다는 건 ‘국력’이 강해진다는 말이다.


초등학교 때 뜻도 모르면서도 머라이어 캐리 노래 가사를 한글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외워 부르곤 했다. 처음 보는 외모와 창법, 언어였지만 멋졌다. 마이클 잭슨,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브리트니 스피어스, 어셔, 제이지, Ye, 비욘세부터 밥 딜런, 너바나, 푸 파이터스, 오아시스, The xx까지, 영어를 통해 사고하는 방식으로 쓰인 영어 노래를 들으며 자랐으니, 그들을 대상화하고 쫓아가야 할 롤 모델처럼 여기는 최면에 걸렸다. 그렇게 미국의 문화는 개발도상국 한국의 초딩의 삶을 일찌감치 지배했다. 자연스레 웨스턴은 이스턴보다 앞서고, 합리적이며, 품격 있고, 부유하고, 우월하다는 인식이 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런 일이 역으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블랙핑크 새 앨범이 나오자 한국어 가사를 영어로 번역해 의미를 해석하려는 해외 팬들이 지구의 반을 넘는다. 전 세계 학교마다 한국어 학과를 개설하고, 대학에선 한국 문화와 전통, 역사 등을 진지한 연구 태도로 접근 중이다. 이런 소프트 파워와 한국만의 매력, 카리스마를 정치와 외교, 남북 관계로까지 잘 이어갈 기회가 우리에겐 차고 넘친다. 예전 한국 가수들은 같은 내용도 영어로 부르면 멋이 나고, 한국어로 부르면 짜치다고 생각했다. 장기하는 한국어를 노래라는 틀 안에서 가장 맛깔나게 잘 가지고 노는 친구였고, 지금은 더 능글맞게 잘한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를 더 이상 '한'의 문화가 아닌, '힙'의 문화로 보는 데엔 2년 전 문재인 정부 때 한국관광공사와 이날치가 콜라보한 한국 홍보 영상도 한몫했다.


https://youtu.be/3P1CnWI62Ik



한국에서의 오랜 잡지사 기자 경험으로 공사와 공무원들과 일하는 게 얼마나 속 뒤집어지는지 잘 안다. 이들은 아무도 결정권이 없다. A를 지나 B의 결재에, C의 결재까지 거치다가 D가 뒤집으면 프로젝트 자체가 백지로 돌아간다. 아무에게도 결정권이 없다는 건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거다. 그래서 겁 많고 소심한 공무원들과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진행하기 쉽지 않다. 최대한 안전한 선택만 하다 보니 콘텐츠는 지루하고 고리타분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관광공사와 이날치의 영상은 문재인 정부 실무진이 굉장히 오픈된 마인드로 작업을 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하청을 받은 프로덕션 업체를 선택하는 감각도, 일을 진행하는 추진력도, 너무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덜하지 않게 균형을 잡는 테크닉도 좋으니 가능한 결과물이다. 펄럭이는 태극기에 국뽕 자극하는 신파조의 음악, 눈물을 그렁이며 나라 사랑을 표현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느끼하고 올드한 콘텐츠만 뽑아내며, 맞춤법도 틀리고, 영어 스펠링도 틀리고, 엉망진창인 현 정부를 보며, 요즘 계속 다시 보게 되는, 이날치와 한국관광공사의 2년 전 콜라보레이션 영상이다.


국력이 국익으로 연결되도록 순발력 있게, 창의력 있게 움직여야 할 현 정부는 답이 없다. 때가 되면 당연히 군대에 가겠다는 BTS 멤버의 의지와 관계없이 ‘BTS 군 면제’ 타이틀을 이용해 정치 몰이나 하고 있다. 창작자를 지원하고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리가 만무하다. 박근혜, 이명박 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로 득실한 정부이니 또다시 블랙리스트나 만들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 아까운 기회의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부를 앞으로 5년 내내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끔찍하지만, 나는 내 나라가 선택한, ‘자유’를 외치며 쓰러져간 투사들의 피로 치른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을 믿는다. 작가 유시민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등 ‘-주의’로 끝나는 말 중 유일하게 이념이 아닌 ‘시스템’을 말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민족주의, 자유주의, 보수주의 정권의 이념보다 앞서기에 ‘살찐 바보들’이 정권을 잡아도 나라를 마음대로 망가뜨리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시스템 ‘민주주의’의 엔지니어링이 과연 이런 어둠의 시간을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해볼 때가 오고야 말았다. 다음 세대 아이들이 나처럼 덩그러니 해외에 혼자 살아갈 때 ‘한국 출신’은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가 되었으면 한다. 원숭이 흉내를 내거나 눈을 찢으며 놀리는 사람도 줄어들 것이다. 미국 시민으로 살고 있는 내 조카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고 덜 서러울 것이다. 이 세계의 운명은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사랑하고 또 믿는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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