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하나 Oct 31. 2022

미사일이 날아오지 않는 섬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불안한 내 나라를 생각한다.


과민성 공감 증후군. 한국에서 잡지사 에디터로 수많은 인터뷰를 할 때 학벌도, 연줄도, 백도 없는 내가 그 바닥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과민한 공감 능력 때문이었다. 공감으로 다가가는 질문에 인터뷰이는 철저히 낯선,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발화자의 의도를 비틀어 내 뜻대로 해석해 기사를 쓸 수 있는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렇게 나는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진심 어린, 그리고 단단한 인터뷰 기사들을 아카이빙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과도한 공감 능력으로 인해 나는 세월호로 무기력하게 눈앞에서 304명이 물거품으로 변하는 걸 지켜본 이후,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무능력하고 책임 회피만 하는 당국 책임자들과 세월호를 둘러싼 거대한 비리와 검은 커넥션, 참사를 축소하고 무마하고 은폐하려는 시도와 함께 대한민국은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다.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마음에 담았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잘 듣고, 선실 내부에서 가만히 어른들의 말을 잘 따랐던 아이들이었다. 친구들과 ‘가만히 있으라’ 배지를 만들어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어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책임이자 도리였다. 그때 확성기를 들고 앞에 나섰다 구속까지 됐던 청년 용혜인은 지금 기본소득당의 국회의원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렇게 도망쳐온 섬에서 바다에 뛰어드는 일, 다이빙을 업으로 삼았다. 나 좋자고 바다에 뛰어들지만, 여전히 문득문득 바닷속에서 사그라진 어린 영혼들을 생각한다. 박근혜 퇴진 때도 나는 바닷속으로 피켓을 들고 들어가 한국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동참했다. 한국을 떠나서도 나는 여전히 한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나에게 애증의 조국이다.


내일 아침, 아니 오늘 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난다 해도 놀랍지 않을 시국이다. 하지만 나는, 세계 그 어느 나라도 미사일을 겨누지 않을 외딴 작은 섬 꼬따오에 산다. 


카카오톡 사태로 한국에 빨간 불이 한번 ‘깜빡-’ 하고 들어왔던 날, 나는 그 일을 뒤늦게야 알았다. 유러피안이 대부분인 이곳에선 카톡 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대신 이 섬은 전기가 자주 나간다. 그래도 지난 수년간 많이 발전해 예전만큼 자주는 아니어도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몇 시간씩 전기가 나간다. 대부분 다람쥐가 전깃줄을 갉아먹거나 뱀이 걸린 이유다. 개발이 덜 된 섬 동쪽으로 다이빙을 가거나 하이킹으로 깊은 정글에 들어서면 휴대폰 시그널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대로 우리는 괜찮다. 다이빙을 하면 자의든 타의든 다이버는 강제 디지털 디톡스를 받는다. 바닷속에 있는 동안은 스마트폰을 못 쓰니까. 그래서 이 섬에서 살기로 했고, 그래서 참 다행이다. 


오늘은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IT 기술을 처음으로 원망했다. 이태원 참사로 또 아까운 젊음 수백을 전 국민, 아니 전 세계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길거리 위에서 잃었다. 머나먼 타국에 있는 나 역시 숨이 가쁘고 어지러웠다. 잡지사 피처 에디터로 문화 관련 일을 할 때 이태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다. 내가 수백, 수천 번을 지나다니던 그 거리에서 영혼을 앗아가려 찾아온 악령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특별한 분장이나 코스튬을 하는 축제인 핼러윈의 밤, 수백의 젊은 영혼이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사그라졌다. 


행안부 장관이 멀건 얼굴을 하고는 지껄인 두 가지 대답이 이 아름다운 섬에서의 내 일상에 파고들어 괴롭혔다. 


“경찰을 미리 투입했다고 달라질 일 아니었다.”


10만 명, 그 작은 동네 이태원에 10만 명이 모일 거라 경찰이 직접 예견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해놓고, 장관이라는 인간이 3백여 명의 사상자가 생긴 참사 발생에 대해 할 말이 아니다. 이 말에 가려진 진심이 나는 소름 끼친다. 분명 그는 축제를 즐기러 나간 젊은이들을 탓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찰 인력은 같은 날, 소요 및 시위가 일어난 광화문에 집결시켰다.”


은근히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선 사람들 때문에 이태원 참사에 빠른 대응이 어려웠다는 핑계를 댄다. (이는 앞으로 정부가 촛불시위에 얼마나 강력하게 대응할지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역시 교묘하고 영악하게 죽음을 이용해 편을 가른다. 뱀처럼 스르륵-, 책임져야 할 자리에 앉아 온갖 꿀을 빨면서도, 정작 책임져야 할 땐 책임을 안 지는 이상한 사람들. 그런데 이럴 줄 모르고 뽑았나? 행정과 안전을 책임지는 이들의 터진 입에서 이런 소릴 듣는 게 처음인가? 우리는, 정말 이게 괜찮은가?


세월호 참사의 트라우마를 갖고 살던 아이들이다. '이 나라는 과연 안전한가?'라는 질문을 품고 자란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국가가 또 한 번 배신했다. 이제야 마스크를 벗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살을 만지며, 그저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던 것뿐인 아이들이, 또 떠났다. 우리는, 정말 이게 괜찮은가?


주최자도 관리자도 없는 시민의 자발적인 축제에 보편적 질서를 관리하라고, 아무나 시킬 수는 없으니 할 생각 있는 사람들 가운데 다수결로 투표해 골라서 시키자고, 이런 일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예 기간 정해놓고 하자고, 이래서 만든 게 ‘선출직 공무원’이다.


전 정부가 늘려놓은 구급대원, 소방대원, 재난 대응 인력을 비용 문제를 핑계로 신나게 감축 중이던 현 정부는 부자들 세금 감면하면서 MB 정권 인사들에 둘러싸여 그들이 예전에 해 처먹었던 것처럼 부정부패로 한탕 크게 해 처먹으려는 중이었다. 


앞으로 윤석열 정부는 이태원 참사를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갈등, 남성과 여성의 갈등,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갈등을 더욱 키우며 풀어갈 거다. 행안부 장관과 총리, 대통령실이 은근히 피해자에 2차 가해와 책임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발언을 하면서 온라인에는 벌써부터 위로금 지급 반대 서명과 피해자를 조롱하는 내용이 떠돌고 있다. 윤석열 진영이 원하는 그림대로, 정확히, 그렇게. 자신의 책임을 면하고 실책을 가리기 위한 쇼를 여지없이 이어갈 것이다. 이들은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동선 통제도, 인원 통제도 없었다. 한국에서 기자 생활할 때 취재로 대부분의 해외 아티스트 내한 공연과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수백 명이 모이는 공연 때도 지하철은 정차 없이 공연장 인근 역에 서지 않았다. 수천 명이 모이는 페스티벌에 응급차와 의료진은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2002 한일 월드컵에도 없었던 일이다. 대학 시절, 수년간 홍대 클럽에서 일했지만 매달 클럽데이마다 각 클럽 안전 요원은 언제나 배치됐다. 그게 20년 전이다. 그런데 2022년 대한민국이, 10만 명이 모일 걸 알았으면서 2백 명도 안 되는 경찰을 배치했다. 그것도 대부분 사복경찰이었다. 마약과 성범죄를 단속하는 목적이었단다. 


얼마 전 대한민국 검찰 총장 출신 대통령과 그의 심복들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바 있다. 그러니까 이 정부는 핼러윈에 젊은이들이 놀겠다고 모이면 “이 새끼들, 마약하고 술 마시고 나쁜 짓 하려고 그러지?” 하는 생각부터 하지, “사람이 많이 모이니 위험하겠는데?” 하는 생각을 못 하는 거다. 이 정부가 국민을 대하는 시각이다. 국민은 보호 대상이 아닌 잠재적 범죄자, 문제아일 뿐이다. 예전엔 알면서도 정치적 실익을 위해 모르는 척 쇼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이 정부는 정말 몰라서 못 하는 것 같다. 검사의 DNA이고, 검사의 체질이다. 그들은 검사 생활 내내 공감하지 말라고 학습하며 살아왔다. 그게 대통령이 된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검사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대한민국이 키운 괴물이다. 엘리트주의와 패거리 조직 문화, 잘못된 공명심과 의리, 충성, 신념을 위해 모든 걸 건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검찰은 모든 걸 알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의 삶이든 쉽게 망가뜨릴 수 있다. 국민의힘은 ‘바보’ 대통령이 좋아서 저리 굽신굽신 할까. 윤석열이 손에 쥐고 흔드는 국민의힘 의원들 비리와 부정부패가 얼마일 것이며, 굳이 겁박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는 이들이 얼마일까.


이 머나먼 작은 외딴섬에서 나는, 일상을 멈추고 온종일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에 귀 기울였다. 여러 전문가의 분석 중 가장 흥미로웠던 의견은 한국 젊은이들이 워낙 아침 통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던 적이 많아 그러한 밀집 경험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극한의 상황에 치닫기까지 위험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애처롭고 안타까울 뿐이다. 입시 지옥에 치이며 코로나 3년을 버티며 암흑을 지나 이제 갓 졸업하고, 갓 자격증 따고, 갓 취업하고, 들뜬 마음으로 마음껏 치장하고 축제를 즐기러 나온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차갑게 식었다. 한국이 G7에 들었다고 신났던 게 불과 작년이었는데, 우리는 또 한 번, 정치가 얼마나 서민의 삶에 깊게 파고들어 심지어 목숨까지 해칠 수 있는지 목도하고 있다. 또다시 어른들의 탐욕과 이기심, 책임 회피로 애먼 아이들이 희생됐다.


오늘 미국에서 온 친구와의 대화에서다. 한국에서 2년을 미군으로 주둔했다는 그 친구 역시 윤석열의 ‘이 새끼’ 발언을 알았고, 바이든에게 했단 걸 무마하기 위해 그 대상을 한국의 국회 상대 여당으로 바꿨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윤석열에 ‘Stupid’라는 단어를 썼는데, 역시 같은 단어를 트럼프에게도 썼다.


유럽 수장들 역시 대부분 보수파 리더로 바뀌었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점점 이기적으로 되어가며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내셔널리즘으로 몰고 갈 징후가 다분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서로 총을 겨누고, 여기서 누구라도 핵 버튼 한 번 누르면 그냥, 우린, 모두 다 같이 죽는 거다. 


거기에 짐을 보탠 바보 한국. 정치도 모르고 경제도 모르고 외교도 모르는 무능한 인간이 하필 전 세계가 휘청할 때 대통령이 되어 자신이 무슨 짓을 벌이는 지조차 모르는 새에 얼마나 더 큰,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할지, 그 나비효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고한 희생을 치를지,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서 고국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들고 있다.


해외 살면 내 나라가 객관적으로 보인다. 내가 아무리 K팝과 K드라마, K푸드를 좋아하는 외국인이라 해도 레고랜드 사태로 경제가 불안하고, 핼러윈 파티에서 3백여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치안과 안전이 불안한, 북한이 매일같이 미사일을 쏘아대는 안보가 불안한, 고등학생의 작품을 정부가 위협하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한국이란 나라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2022년 10월 31일, 핼러윈의 밤, 나는 친구들과의 코스튬 파티 약속을 취소하고 혼자 덩그러니 앉아 너무 일찍 떠난 무고한 영혼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국가란 무엇인가, 시민은 무엇인가, 또다시 생각한다. 내 생에 남은 핼러윈은 영영 즐겁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국가로부터 또 다른 트라우마를 얻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징어 게임>이 해외 사는 나라는 개인에 미치는 영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