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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Mar 15. 2023

나라에 두 번 버림받은 사람들


처음은 나라가 너무 힘이 약해 지켜주지 못해서였고, 두 번째는 나라가 너무 멍청해 있는 힘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스스로 나라의 의무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전자는 1930년대에 일어났던 일이고, 후자는 놀랍게도 2023년, 방금 일어난 일이다. 


우연히 같은 날, BTS의 RM 인터뷰를 봤다. ‘K-팝’을 비꼬는 외신 기자들의 작정하고 뜯으려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K’는 ‘프리미엄 라벨’이다. 선구자들이 싸워 쟁취하고 ‘품질 보증’ 같은 것이다.” 


‘젊음에 대한 숭배, 완벽주의, K-팝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한국의 문화적 특성이냐’는 외신기자의 오만하고 무례한 질문에도 그는 부드럽게 답했다. 


“서양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은 침략당하고 황폐해지고 둘로 갈라진 나라다. 70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유엔(UN)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나라다. 지금은, 전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이제 갓 서른 된 청년이 백인 기자의 푸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고도 다정하게, 그리고 침착하게 상대를 설득했다. 그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다독의 흔적이 보이는 통찰 깊은 대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한 나라의 통치권자인 대통령에게서가 아닌, 한 아티스트에게서 봤다. 


박근혜가 일본에 위안부 할머니를 제물로 바친 치욕적인 날,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국민으로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대한민국 헌법의 권리를 가진 국민으로서, 한 국가, 사회,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국가가 바로 이럴 때 나서라고 그동안 내 윗세대가 뼈 빠지게 일하고 과로에 쓰러지며 힘을 기른 것 아니었나, 국가가 대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국민을 지켜야 하는 건가,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진 날이었다. 


<더 글로리> 인기가 한창이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여기 태국도 마찬가지다. 나는 동은의 엄마가 제일 나쁘다고 생각한다. 동은의 자퇴 사유에서 ‘학폭’을 지우는 대신 가해자 부모에게 돈을 받고 폭행당한 친딸 몰래 합의했다. 나는 엄마가 아니라 모른다지만, 우리 엄마라면 안 그랬을 것만은 확신한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그런 똑같은 짓을 했다. 온갖 폭력에 지친 나의 가여운 국민에 대한 예우, 국가가 외면해 온 오랜 시간 동안 혼자 들판에 서서 피 흘리고 싸워온 시간에 대한 존경, 그리고 국가의 현 책임자로서 부끄러운 역사 속 한때 국가로서 제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정중하고 따뜻한 사과와 공감, 그리고 연대. 정부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이것부터 했어야 했다. 그런데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역시 나는 이 답 또한 RM에게서 구하게 될 것인가. 


한국은 피해자‘부터’ 비난하는 나라다. 성폭력에 시달리면 피해 여성의 행실이 문제요, 10·29 참사는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 있어 피해자가 된 거라 둘러댄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너무 오랫동안 피해자로 살아왔는데, 왜 그리 피해자를 비난할까. 우리 안의 피해자를 제대로 보듬어주지는 못할 망정 보호는 상처에 소금 뿌리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지. 피해자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평생 피해자로 살아온 자국민 생존자 등에 칼을 꽂았다. 그런데, 뭐, 오므라이스를 쳐드시러 일본까지 좋다고 쫓아가서 '나 잘했지?' 칭찬 들으려 머리를 조아리시겠다고. 어쩜 그리 잔인하고 무능하고 아둔하고 무식한가. 


그리고 한국은, 피해자‘만’ 비난하는 나라다. 한 세기 가까이 사과 한마디 못 받고 뒷모습 보며 발만 동동 구르는 내 조국이 이리도 수치스러운 게 박근혜에 이어 두 번째다. 나는 헌법을 수호하고 권리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내 나라를 아름답고 평화로운 민주주의 국가로 지킬 의무가 있다.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부끄러운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아 비웃음 당하고 비난받을 것이다. 당신은 감히 ‘대통령’이라는 관을 쓰고 당신의 국민에게 해선 안 될 짓을 했다. 당신은 한 나라를 너무 쉽게, 처참하고 굴욕적으로 팔아넘겼다. 국가로부터 두 번째 버림받은 일제 강제징용 생존자는 오늘 하루가 지난 수십 년만큼이나 길고도 무거울 것이다. 그 무게의 수십 배 고통을 겪어도 모자랄 '엄마'인 정부는 동은이를 또 버렸다. 선생도, 학교도, 사회도 동은이를 또 버렸다. 가해자의 폭행을 방관하고 방조하고 시시덕거린 이들의 이름도 기억하고 심판할 것이다. 나는 내 나라가 너무 부끄럽다. 그래서 더욱 연대할 것이다. 나의 작은 힘을 보탤 것이다. 피해자의 편에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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