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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04. 2023

등대지기의 거룩한 마음을 닮고 싶어

“잠시 와서 쉬었다 가” 하고 말하는 사람. 


도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타국의 작은 외딴섬으로 도망쳐 온 나는 섬 그 자체일까, 섬과 육지를 끝도 없이 오가는 배일까, 등대를 지키는 사람일까, 몇 년째 생각 중이다. 


나는 그때그때, 내 처지와 기분에 따라 완벽히 고립된 섬이었다가도 섬과 육지, 때론 섬과 섬을 오가는 배였다가도 가만히 등대지기가 된다. 삶의 고단한 질문의 답을 찾으러 들어온 섬에서 일찌감치 답을 찾는 건 포기했다. 이 세상 끝까지 가더라도 나는 어떤 답도 찾지 못할 것이란 깨달음을 얻은 게 이 작은 섬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서울 살 땐 나는 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의 예민함과 까칠함, 과다한 공감 능력을 잡지사 에디터란 직업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로 풀어냈고, 다들 만나보니 화려한 모습 뒤에 가려진 상처가 가련해 오지랖을 부렸다. 누군가의 선배이자 친구, 상담가로 정작 내 상처는 꽁꽁 싸매고 있던 터라 언제고 터질 줄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떠나온 타국의 작은 외딴섬에서도 나는 내가 그랬듯 여전히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잠시 와서 쉬었다 가.”


글로벌 팬데믹의 끝이 보이던 작년 말이었다. 여전히 바이러스는 전 세계에 창궐했지만, 이제 사람들은 지겨워진 눈치였다. 많은 이들이 집단적으로 바이러스를 모른 척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연말에 시간을 내어 내가 있는 섬, 꼬따오를 찾았다. 


이 작은 섬에 들어와 살며 좋은 점은 내가 굳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과 억지로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 ‘척’하는 미소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 섬으로 스며든 지도 햇수로 9년이다. 지금까지도 나를 찾아, 이 들어오기 힘들기로 악명 높은 외딴 섬까지 오는 친구들은 진정 나를 아낀다.


나에겐 지난해 연말 12월 한 달이 1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아마도 한국에서 온 친구들이 캐리어에 함께 넣어온 돌덩이 같은 상처와 현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리라. 팬데믹으로 2년 내내 집에만 갇혀 있던 친구들은 커다란 캐리어에 이 섬에선 필요치 않은 많은 것들을 챙겨왔다. 여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MBTI’를 내게 물었고(나는 여전히 내가 어떤 유형인지 모른다.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인간은 알파벳 4개로 정의되거나 분류되지 않는다.), 갖가지 축약어와 신조어를 써가며 배설하듯 대화를 이어갔다. 


“천천히, 천천히….”


친구들과 대화할 때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쫓기듯 일정을 짜고, 쫓기듯 먹고, 쫓기듯 이야기하고, 타이 마사지를 받는데도 쫓긴다. 


이 섬에 와서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많이 써온 나는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한국어를 쫓아가지 못했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예민한 감정까지 영어로 풀어내기엔 벅차 다소 단정해진 표현을 주로 해온 나는, 이 섬에서 지내온 수년의 시간만큼 내 말과 생각, 일상, 그리고 삶이 심플해졌음을 느꼈다. 이 또한 나와 비슷한 이 섬사람들과 섞여 살다 서울에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친구들을 만나야 실감한다.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이다. 서울의 DNA인 조급함과 불안함, 자격지심, 피해의식을 다 버리지 못했다. ‘심플 라이프’를 말로만 외쳐왔지, 막상 여유 넘치는 삶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당황하며, 또다시 억지로 스스로 우당탕 소동에 밀어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오늘도 고르지 못한 수많은 단어와 문장 속에서 헤맨다. 


친구들은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에서도 서울에서의 삶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한다. 빚 없고, 집 없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고 푸념한다. 그게 바로 나다. 나는 집 사려고 인생을 거는 서울의 ‘오징어 게임’이 지긋지긋해 이 섬으로 도망쳤는데, 친구들은 그런 내가 제일 부럽다고 난리다. 그러면서도 제 몸보다 더 큰 캐리어에 든 옷가지와 물건을 채 다 써보기도 전 아주 짧은 휴가를 마치고 부리나케 서울로 다시 돌아간다. 올 때보다 더 무거워진 캐리어를 끌고.


서울 친구들이나 다이빙 코스를 예약한 손님들은 섬에 들어오기 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곤 한다. 그러면 늘 “필요한 게 없어요, 나는” 하고 답한다. 정작 필요한 게 많은 사람은 당신들인데. 당신이 이곳에서 진정, 잠시라도, 쉬었다 갈 수 있길 바란다. 등대지기의 거룩한 마음을 바라며 오늘도 서울에서의 고단한 하루를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있을 친구들에게 말한다. 


“잠시 와서 쉬었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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