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왔다. 오랜 타국살이를 정리한 것치곤 그리 많지 않은, 그것도 다이빙 장비가 반 이상인 짐과 함께. 2015년, 태국 남동부 외딴섬으로 열 손가락을 거의 다 접어가며 다이버로 살았다. 이제 지구 반대편 멕시코로 떠나 살아볼 작정이다.
그 사이, 만료 직전인 10년짜리 여권을 바꾸고 멕시코 워킹비자를 만들기 위해 잠시 머무는 한국. 이제 나는 한국에서도 이방인이다. 여전히 세상 어디에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나는 한국에 오면 외국인들이 쓰는 선불 유심을 꼽고, 엄마 집에서 에어비앤비처럼 머문다. 짐은 다 풀지 않고, 반 정도만 푼다.
내가 태국 외딴섬에서 지내온 몇 년간 엄마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시골에 집을 지었다. 어렸을 적 가끔 들렀던 외갓집에 몇 걸음이면 닿는, 버스도 택시도 배달 음식도 없는 깊숙한 시골 마을이다. 이 집에서 내가 사계절을 온전히 보낸 건 팬데믹이 유일했다. 격리를 감행하면서까지 태국 섬으로 다시 돌아간 건 내 집은 ‘여기’가 아닌 ‘거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현장 유랑 생활을 마친 아빠가 집에 돌아와 있었고, 이 집을 지을 때 들인 콜라와 팬데믹에 들인 환타, 두 마리 개는 토실해졌다.
멕시코 워킹비자 일정이 지연되면서 한 달 이내로 예상했던 한국 체류 기간이 더 길어졌다. 예전 같았으면 몇 년처럼 느껴졌을 시간이 이번엔 이상하게도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 아빠와 언제 또 이렇게 시간을 보내보나. 이참에 ‘가족’에 물리적 시간만큼 마음 또한 쏟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예쁜 집에서 이젠 나도 예쁜 가족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오랜 시간, 한국도 모자라 해외까지 떠도는 나의 근본적인 문제는 집이었고, 가족이었다. 말이 좋아 개인주의지,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멋대로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으니 각자 계속 이렇게 살자고, 너도 너랑 똑 닮은 딸 만나 고생 좀 해보라고, 우리는 걸핏하면 서로 저주를 퍼붓고 등을 돌리기 일쑤였다. 오랜 시간 냉소와 무시로 일관하며 가족에 마음을 닫아버린 나는 혼자 해외살이를 하면서도 앞으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변하기나 할 수 있을까, 꾸준히 스스로 벌을 줬다.
나는 엄마와 꼬인 실타래를 풀지 않고선 이 세상 어디에서도 ‘홈’을 찾을 수도, 만들 수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아빠는 지난 몇 해 동안 부쩍 허약해졌고, 엄마는 치매라는 단어를 부쩍 자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더 이상. 오래도록 방치된 꼬일 대로 꼬인 실타래를 이번엔 풀어보자, 감히 작정했다.
나에겐 늘 무심하고 냉소적인 엄마는 친구들과는 좋은 데 놀러 나가 꽃을 보며 방긋 웃었다. 엄마는 왜 나를 보고 그렇게 웃지 않지, 왜 나에게 따뜻하게 대하지 않지, 내가 그렇게 싫은가, 하면서도 점점 나는 엄마를 닮아갔다. 엄마가 나에게 가시 돋친 말을 하면, 나는 받은 만큼, 아니 더 모질게 되돌려줬다. 악순환이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서로를 마음껏 학대했다. 밖에선 친구들과 온갖 재밌는 걸 다 하면서 결국 엄마의 차가움을 빌미 삼아 집에서 멀어지려 안간힘을 써온 나 역시 온전치 않은 마음이었다. 평생 우리 집 식구들은 각자 밖에선 잘하는데 한 집에만 모이면 말썽이었고, 결국 최대한 서로 안 보는 게 상책이 되었다.
내가 이제라도 마음을 열고 손을 뻗는다면, 우리 역시 변할 수 있을까. 우선 나부터 변해야 했다. 나부터 건강해져야 했다. 하나 있는 자식마저 온전히 품을 수 없을 만큼 늘 무언가에 쫓기며 고군분투했던, 어리숙하고, 또 어렸던 내 어린 시절의 젊은 엄마, 아빠를 보내줘야 했다. 용서도 화해도 필요 없다. 원망도 미움도 미련도 그리움도, 그저 다 보내줘야 했다. 그래야 그 텅 빈 마음에 다시 사랑과 희망과 기대를 채우고 싶었다. 그래야 훗날 내 배우자와 가족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스스로 구원하기로 한 것이다.
집에 돌아온 이후, 어설프게 이쁜 짓을 조금씩 시작했다. 설거지, 청소, 빨래부터 정원 정리에 소질 없는 요리까지, 표현에 서툰 나름의 방식으로 오랜 시간의 물리적 거리만큼 멀어진 엄마의 마음을 덥히려 했다. 어릴 적부터 멀어질 대로 멀어진 엄마와 딸의 거리는 아빠의 술이라는 공공의 적이 생길 때를 제외하곤 좁혀지지 않았다. 엄마도, 나도 방법을 몰랐고, ‘먹고살기 바빠서’라는 명분으로 오래도록 뭉개고만 있었다. 우리는 아주 오래도록 서로를 방치했다. 나는, 엄마와 더 가까워져 볼 작정이었다.
너무 화창해 오히려 불안했던 어느 아침, 터질 게 터졌다. 생글생글 웃으며 뭔가를 물어보는 나에게 엄마는 유난히 차가웠다. 그러면 또 나는 지금껏 나름 해온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보상 심리에 어릴 적부터 키워온 피해의식까지 더해져 금세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펼친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보다 가족을 대하는 게 더 힘들다.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하듯 그냥 살던 대로 살아야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래서 나도 일부러 더 엄마에게 상처를 냈다. 순전히 복수심이었다. 엄마가 집을 비운 후, 아빠와의 2차전이 시작됐다. 이 모든 사단의 발단은 가벼운 말 한마디와 무심한 일상의 표정이었지만, 우리는 각자의 오랜 트라우마와 상처를 서로에게 쏟아부었다.
어린 시절, 티비 정규방송이 끝나고 뜨는 컬러바에 ‘삐-이’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집 밖을 기웃거리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반지하 집에서 엄마도 아빠도 없이 외롭고 서럽게 떨던 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늘 이 소리로 나를 덮친다. 아, 이제 그만. 차라리 화라도 났으면 했는데, 내 마음의 물기가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마르고 갈라졌다. 평생 숙제처럼 떠안고 답을 찾으려 애쓰고 헤맨 가족, 그리고 ‘홈’이라는 의미, 놓아버리고 싶었다. 가련한 구제불능 우리 가족을 이제 나는 정말, 포기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안간힘을 다해 내민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없는 엄마, 아빠의 옹졸함과 그 피를 그대로 물려받아 그 이상의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하는 스스로가 부끄럽고 불쌍했다. 이럴 때마다 나는 항상 스스로 파멸과 자학의 길을 택한다. 또 어디 가 숨어 대충 살아버려야겠다 싶었다. 내 삶을 시궁창으로 밀어 넣는 게 엄마, 아빠를 괴롭히는 가장 큰 복수라 생각했던 열여덟의 나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채 다 풀지도 못한 짐을 다시 싸 집을 나섰다. 짐을 이고 지고 생쇼를 하면서 허허벌판 시골길을 씩씩거리며 걸었다. 차를 몰고 쫓아온 엄마가 돌아갈 때까지 나는 걸었다. 역시 분에 못 이겨 차를 돌려 돌아가는 엄마 차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하고 아무도 없는 시골길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도록 크게 소리쳤다. 그렇게 삼십 분을 넘게 걸어 시골마을을 겨우 벗어나 마을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땐 유난히 짧아진 가을 해에 일찌감치 어둠이 깔렸다. 도시처럼 버스가 온다는 표시도, 시간표도, 어플도 없는 곳에서 한가득 껴안은 짐에는 찬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오들오들 떨며 기약 없는 버스를 기다렸다. 불빛 하나 없는 컴컴한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는 걸 휴대폰 불빛을 흔들며 뛰어가 붙잡고는 겨우 올라탄 버스에 앉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괜히 설움에 복받쳐 눈물을 쏟아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정류장들을 지나 시내 불빛이 보이자 무작정 내렸다. 어디 모텔이라도 들어가 자야 하나, 기웃거리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지났다. 그리고 눈에 든 ‘이태원 참사 추모제’ 현수막, 그 앞에 설치된 조그만 전광판에 나오는 희생자 유족들이 진실을 요구하며 비 오는 날 아스팔트 길에서 삼보일배를 하는 장면에 발길을 멈췄다. 생때같은 자식이 고통스럽게 압사당한 길거리 아스팔트에서 딱히 갈 곳이 없던 나는 사람들이 건넨 촛불을 들고 바리바리 든 짐을 내려놓고는 의자에 앉았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의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밤이었다. 배가 고팠지만, 내 영혼은 더 고팠다.
지방에서 조촐하게 열린 추모제였고, 보수로 가득한 충청도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보라색 점퍼를 입은 이태원 희생자 유족 옆에 앉은 건 노란색 점퍼를 입은 세월호 유가족이었다. 10년 전, 내가 좋아하는 바다와 노란색을 세월호 아이들에게 주고, 또 내가 좋아하는 핼러윈과 보라색을 이태원 아이들에게 줬다. 기가 막혔다. 세월호 참사에 대응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내가 한국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큰 이유가 되었다. 책임지지 않는 어른, 침묵하는 어른, 살아남은 자들에 손가락질하는 어른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어른들에 나는 엄마, 아빠를 투영시켰다. 아니, 엄마, 아빠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사회 시스템에 투영했다.
희생자 유가족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희생자 중 하나가 충남 홍성 출신이었고, 딸을 사랑했던 평범한 엄마는 이제 그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회한으로 단식 투쟁을 이어가는 투사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추모제 뒤편에 자리한 농협 건물 꼭대기 대형 전광판에선 행정안전부의 ‘국민을 안전하게 지키겠습니다’ 홍보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또다시 길거리로 내몰린 자식 잃은 부모들을 보니 기가 막혔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다면 아끼지 말고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해줄 걸…” 유가족 엄마의 말에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꺼이꺼이 울었다.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와 앉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의미 붙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이태원에서 떠난 어린 영혼들이 나를 붙잡아 세운 것 같았다. 아니, 그리 믿고 싶었다. 다시 생각하라고,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네 엄마, 아빠는, 그리고 너는, 여기, 지금, 살아있지 않냐고, 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냐고.
촛불이 다 녹아 촛농에 손이 뜨끈해질 즈음,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나 여기 농협 앞 길거리야. 배도 고프고, 너무 추워. 나 좀 데리러 와줄래?” 엄마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내내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난 엄마가 이제 그만,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내가 어떤 딸이었든, 지금 어떤 모습이든, 그저 내 존재 자체만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제 비가 쏟아지는 날, 반지하 집에 물이 차 오를까 걱정하던 시절도 다 지났고, 그저 아름다운 시골집에서 엄마와 아빠와 내가 아름다워질 차례라고. 우리 더 이상 그냥 생긴 대로 살지 말고, 노력해 보자고. 고된 삶에 치여 엄마 자신도 모르게 익숙해진 무심함과 인색함을 이제라도 바꿔주길, 아니, 적어도 노력이라도 해주길, 나 또한 그럴 테니 엄마도 그래 달라 부탁했다.
컴컴한 시골길을 달리는 차 안에서 엄마와 나는 지금껏 나눠본 적 없는 가장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불빛 하나 없는 컴컴한 시골길은 기적 같은 일상이 되었다. 생이별로 영영 품을 수 없는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애달픔과 그리움을 대신해 우리 가족이 아름답게 살아갔으면. 모든 것이 어긋나고 부서지고 사라져 버린 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스스로 파멸 대신 구원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