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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Sep 21. 2023

자기혐오로 가득한 밤들을 보내고

눈썹달이 뜬 밤의 해변에 서서 내 책을 스스로 리뷰하다.



예민한 건 무감각한 것보단 차라리 나은 거라고 스스로 승부를 본 날이었다. 또다시 찾아온 자기혐오의 시간으로 가득한 밤들을 보내고, 겨울잠에서 깨어나 이제 막 동굴에서 빠져나온 눈을 하고는, 부랴부랴 선셋을 보러 해변에 나갔다. 오늘 아침, 내가 눈 뜨면서 다짐한, 유일한 ‘오늘의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5분. 집에서 해변까지 걸리는 시간. 갈 곳 없던 가난하고 지친 내 영혼이 어쩌다 이 작은 섬에 닿아 5분이면 바다에 닿는 곳에서 존재하고 있다. 어디 다친 데 아픈 데 없고 잘 먹고 잘 지낸다. 내 인생에 이만큼 평화로운 날들이 있을까. 


이 평화는 값지다. 나는 하루 전까지만 해도 수개월간의 깊은 우울과 무기력감에서 허우적댔다. 또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는 평안이지만, 지금 나는, 괜찮다. 


이 섬에 관한 나의 이야기를 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깊은 우울감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었다. 오랜만이었다. 권태인이 불안인지 우울인지 모를 거대한 감정에 이토록 휘청거린 게. 이미 수많은 폭풍을 이 섬에서 만났건만, 인생은 적립식이 아니다. 또다시 내 마음에 큰 파도가 왔다. 몸이 좀 아프기도 했다. 몸이 아프니 마음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프니 몸이 아픈 건진 모르겠다. 이 둘은 항상 같이 다니니까. 지금은 잘 회복 중이다. 


책 제목은 출간 전 여러 번 바꿨는데, 표지에 인쇄된 제목을 보니 ‘도망’과 ‘용기’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든다. 그 불안정한 미래에, 그 파랗기만 한 바다에 풍덩 빠져버린 몇 년 전의 내가 지금 봐도 멋있다. 맞다. 도망도 용기다. 용감한 자는 아름답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땐 ‘안정’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그럼에도 나는 하루도 안정을 느끼지 못했다. 월급쟁이의 겉만 번지르르한 ‘안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순식간에 ‘불안정’으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아도 마음의 불안정은 언제고 찾아온다. 마음 수련이 잘 되어 있을 땐 감기처럼 앓다 가고, 마음이 흐트러져 있을 땐 중병이 되기도 한다. 이번엔 호되게 앓은 중병이었다. 


‘불안정’을 택한 나는 자유를 얻는 대신 커다란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산다.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대가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리고 원하던 자유를 나는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는 불안감과 위기감이 나를 검은 파도처럼 덮쳤다. 나는 수면 아래로 끌려내려 가 고통스러워했다. 아니, 차라리 수면 아래가 나았다. 나는 자진해 수면 밖으로 나가길 거부했다. 온갖 상처와 고통을 껴안고 나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자유의 거대한 힘에 휩쓸렸던 나는 어쩌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적당한 통제와 욕망 자극을 사회적으로, 또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같은 루틴을 반복하고 일터에 가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 사회 구성원의 책임 때문이기도 하지만, 막상 직장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 자유를 어떻게 누릴지 몰라 흥청망청 낭비해버리거나 무언가에 중독되거나 우울해져 버릴 것이다. 2023년을 살아가며 유튜브를 보는 우리는 모두 ‘경제적 자유’를 외치지만, 그 ‘자유’가 얼마나 무서운 힘이 될 수 있는지 이제 막 경험한 나는, 얼마나 내가 준비 없이 자유로워졌는지 깨달았다. 나의 자유를 혼란 없이 고스란히 즐기려면 여전히 수련이 필요하다. 


“나의 선택을 증명하기 위해 억지로 버티며 살고 있는 걸까? 여기서… 또다시?” 


무거운 질문이 내 앞에 결국 닥쳤다. 그동안 내가 피하고 도망쳐 온 질문이다. 결국 수면 아래 숨어있는 나를 기어코 찾아내더니 답변을 독촉한다. 세상은, 우주는, 나에겐 너무 어려웠다. 늘 도장 하나씩 깨듯 하루하루 닥치는 대로 살아온 것 같아 도망쳐 온 이곳에서 여유로운 삶을 원했고, 여전히 그런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또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 한 짐을 이고 있는 내가 스스로 못나 보였다. 측은하기도 했고. 보다 못해 우주가 제동을 거는 것 같았다. 모두, 잠시, 멈추라고.


마음이 시끄러워지니 고요하고 평온하던 바닷속도 시끄러워졌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그것을 바라고 소망하고 계획을 세우고 행동할 텐데, 그걸 모르니 당장 하루, 일분일초가 버거웠다. 여유롭게 멀찌감치 바라보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마음으로 조바심을 냈다. 


내 삶에서 가장 깊은 우울과 방황을 겪었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다. ‘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열정이 사그라지는 걸 인정해야 할 땐, 더 오래 힘들어했다. 내 삶의 경험을 뒤돌아보면,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사라졌다고 믿었던 열정은 언제나 다른 것으로 옮겨졌고, 그렇게 내 삶이 이어졌다. 


삶에서 중요한 시기마다 고유의 냄새가 있다. 지금도 그런 냄새가 난다. 지금은 이 열정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가엾은 내 열정은 지금 갈 곳을 잃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라는 제목을 가진 내 책은 사실 제목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서울을 떠났지만, 삶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닿은 ‘파라다이스’에서 얻은 깨달음은 나의 물리적인 위치와 환경이 바뀌더라도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다 소용없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아담하고 아름다운 파라다이스 섬에서도 내 마음이 지옥이면 더 끔찍한 곳으로 변할 수 있다. 서울에서도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마음수련의 고수다. 나는 아직, 멀었다. 


언제나 시작은 자기혐오다. 모든 건 내 탓이고, 더 잘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한 내가 부적격이다. 나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평가관이 되어 내 삶에 점수를 매긴다. 아무도 강요한 적 없는데 스스로 그런다. 결국 나는 자신의 최면에 걸려 무력해진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자신 없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가 안쓰러워진다. 스스로 가여워진다. 깜깜한 동굴에 스스로 기어들어가 무릎을 앉고 고개를 파묻은 내가, 그렇게 스스로 방치된 내가 애처롭다. 


애처로운 나에게 스스로 ‘먹어라, 쉬어라, 자라’ 잔소리를 시작한다. 문고리 반 바퀴 돌리는 걸 못해 나가지 못하는 우울감과 무력감도 배가 고프면 잠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밖으로 나가니 이 아담한 섬은 여전하다. 수년 전 이 섬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낯설고 새로웠던 모든 게 이젠 모두 익숙하다. 길거리 단골 과일가게에 들러 망고스틴을 하나씩 주의 깊게 고르는 나를 보고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 익숙한 일상마저도 나는 너무 많이 놓쳐버렸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 내 삶의 소명과 목적, 방향을 모두 잃은 기분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10년 전 카오산 로드에 앉아 망고스틴 3킬로그램은 앉은자리에서 먹어 치우고는 빨갛게 물든 손을 보고 씨익 웃던 내가 떠올랐다. 그때 누군가 “너는 10년 후에 꼬따오라는 섬에서 다이빙을 하며 살고 있을 거야” 했다면, 나는 “헛소리 말고 망고스틴이나 하나 먹으라”며 건넸을 것이다. 


자책하지 않는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권태와 방황은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언제든 환영이다. 방황의 시간은 나를 돌아보게 하고, 탐구하게 하고, 좀 더 알게 한다. 고통과 우울의 시간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춰야 할 이야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최근 내 삶에서 얻은 가장 값진 깨달음이다. 나는 최근의 감정을 한국에 있는 엄마와 아빠에게 알렸고, 이 섬의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했다. 우울과 절망을 억지로 감추는 대신 진심으로 행복할 때를 준비하는 치유의 과정이다. 


“너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말을 많이 건다. 가끔 내 마음이 등을 돌리고 심술을 부릴 때도, 상처를 부여잡고 흐느낄 때도,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해도, “하나, 너는 참 따뜻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때가 되면 내 마음도 결국 못 이긴 듯 동굴에서 빠져나와 나에게 말을 걸 것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또다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내 집은 어디인가?’라는 질문들에 다다랐다. 내 삶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 헤맴이다. 그런데도 나는 매번 이걸 난생처음 겪는 방황처럼 크게 호들갑 떨며 고통에 시달린다. 때론 너무 넘치고, 때론 너무 모자란다. 특히 나에게 차고도 넘쳤던 열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여전히 예고 없이 나를 덮친다. 삶의 균형, 마음의 균형, 몸의 균형, 모든 건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래도 여러 번 찾아온 방황 덕에 내 삶의 경험 자체에서 스스로 배우고 있다. 모든 문제의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답을 찾는 과정은 길고도 지루하고 괴롭고 쓰다. 조급함과 불안은 언제나 얄미운 시누이 같다. 이 나이까지 뭔가를 이뤘어야 했다는 비교와 자책, 물질적 기준으로 내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나를 판단해 스스로 흔들린다. 내가 나를 의심하고 자책하고 손가락질하고 무시한다. 내가 나를 막 대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지은 감옥에 들어앉아 있다 보면 그 감옥에서 나올 열쇠도 나에게 있다는 것조차 잊게 된다. 나 역시 한동안 그 열쇠를 내팽개쳐 놓고는 찾을 생각도 안 했다. 나는 두려움과 불안, 자기혐오에 몸을 떨며 뜨겁게 벌을 받았다.


그렇게 오랜만에 나간 해변이었다. 눈썹달이 뜬 밤의 해변에서 진정한 자유는, 어떤 상태와도 관계없이 자유로운 거라고 내 마음이 말했다. 어떠한 환경이나 사람에도 영향받지 않고, 나로서 나답게 살아가는 것, 그게 지금 내가 찾는 진정한 ‘자유’라고. 어쩌면 나는 이걸 직접 경험하고 깨달으려 지금, 이곳에 있는 게 아닐까. 


삶에서 또 다른 챕터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내 인생의 챕터엔 ‘좋아요’도 ‘댓글’도 ‘공유’ 버튼도 없다. 스스로 그 챕터에 점수를 매겨선 안 된다. 좋은 성적이든, 실패든, 성공이든, 정말 중요치 않다. 나는 그저 다음 챕터를 준비하면 된다.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내 삶으로부터 온전한 자유의 의미를 배울 수 있는 온갖 경험의 기회로부터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 미리 결론 내리지 않고, 새로운 챕터에 압도되지 않고, 용감하고 담담하게 걸어 나갈 것이다.


헝클어진 마음으로 밤의 해변을 걷고 있을 때 수년 전 내가 다이빙을 가르친 친구에게서 내 책을 잘 읽고 있다며 “저, 발리에서 다이빙하는데 ‘굿다이버’라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생각해 보니 제 다이빙 태도나 마인드, 다 다이브마스터 때 사부님한테 배운 것들이더라구요. 새삼 감사해 연락드렸습니다라”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갑자기 우주에서 날아든 랜덤 메시지였다. 자존의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내 마음에 또다시 큰 파도가 올 땐, 그 파도에 올라 서핑을 해보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 좋은 밤이었다. 













�다이빙하는 에디터 조하나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dive_with_h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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