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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Dec 28. 2023

장기하|성장 보고서

His growth rings

장기하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꾸준한 톤으로 유지됐다. 표정 또한 인터뷰 내내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나, 머리 아픈 이야기를 할 때나 특유의 목소리 톤과 표정은 유지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말이나 표정으로 친절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다. 유난히 여백이 많은 듯 느껴졌던 장기하와 얼굴들 정규 1집 <별일 없이 산다>의 무심하고 무표정한 느낌 그대로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1집 이후, ‘별일 없이 절대 못 살았을’ 지난 시간들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지나오며 만들어진 2집 앨범 <장기하와 얼굴들>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했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ER 김희언 




음악, 능동과 수동 사이


장기하는 스스로를 ‘TV 키드’라 칭했다. 그 시절 또래 모두가 그랬듯, 어린 시절 TV를 통해 접한 문화가 곧 세상 전부였다.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을 필두로 한 댄스 가수는 물론, 현철, 태진아, 주현미로 이어지는 트로트도 좋아했다. 그러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을 열렬히 맞이했고, 당시 사서함으로 공지되던 스케줄을 미리 체크해 그들이 출연하는 라디오와 TV 프로그램들을 모조리 녹음하고 녹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이 떠난 빈자리를 대신한 건 패닉이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사주신 어쿠스틱 기타를 재미로 튕기다가 “음악과 사랑이 꽃 피는 교회”에서 드럼을 혼자 쿵작쿵작 두드려본 장기하는 교회 친구들과 밴드도 만들었다. 얼굴 다 아는 교회 친구들 모아놓고 자작곡으로 공연을 했다. 나름 알아주는 ‘동네 뮤지션’이었다. 음악이 그의 놀이이자 세상이었다. 그러다 장기하는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한다. “프로페셔널한 뮤지션은 누가 봐도 천재인 사람이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라는 부모님에게 설득당했다. 부모님을 설득할 만한 음악에 대한 확신은 사실 없었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내 것이 될 것만 같았던, 아직 알 수 없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주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당시 사회학과는 학교 내 모든 학과를 통틀어 80년대 분위기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었어요. 정치적인 관심사나 토론 문화가 대부분이었죠. 저는 그런 거에 익숙하지 않아서였는지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더 신선하고 좋더라구요. 재미를 느꼈어요.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건 술을 정말 많이 먹었다는 거예요.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막, 미친 듯이 먹는 그 분위기가요. 사실 중학교 때부터 식사할 때 아버지가 술을 한두 잔씩 따라주셨는데, 그 맛이 참 좋더라구요. 고등학교 땐 친구들끼리 술 마시는 게 눈치가 좀 보이잖아요. 대학은 문화 자체가 그걸 긍정하는 문화니까, 그게 너무 좋아가지구… (웃음) 그러다 보니 2년이 훌쩍 지나 있더라구요.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밴드라는 걸 한 번도 못해보고 군대를 가고, 졸업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아는 애들은 죄다 과 애들뿐이라, 제가 애들한테 악기를 하나씩 직접 가르쳤어요. 저도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떤 최소한의 형태가 나오도록 연주하는 법은 알고 있었으니까. 기타, 베이스, 드럼 라인을 다 제가 만들어서 애들한테 가르치면서 밴드를 시작했어요. 그때도 고등학교 때처럼 아는 애들 모아놓고 공연을 하는 거죠. 학교 공연장 빌려가지고.

 

학교도 아닌, 학과 내에서만 활동하는 밴드였네요. 

그렇죠. 다 제가 “하자!” 해서 한 거예요. 그때도 춤추는 애들 3명 정도가 있었어요.

 

음악 스타일은 어땠어요? 

스타일이 없는 음악이었죠. (웃음) 멜로디와 리듬, 가사는 있는데… 가사는 대학생의 일상을 그린, 뭐 그런 거… ‘녹두거리’(서울대에 술집이 많은 거리), ‘용가리’(술 마시고 뿜고 다니는 학생들), 뭐 이런 노래들. 3학년 되자마자 시작한 밴드를 한 학기 정도 했어요. 애들이 할 일도 많아지고 그러니까 더 이상 하기 힘들어지더라구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단독 공연은 한번 하고 끝내자, 해서 8곡 정도 있는 자작곡을 가지고 학교 문화관 같은 걸 하나 빌려서 공연을 했어요. 그때 학교 안에 다른 무리들이 ‘홍대에 가서 밴드를 해야겠다’ 하고 준비하고 있었나 봐요. 근데 거기에 드러머가 없었던 거예요. 그중 한두 명이 우리 밴드 마지막 공연을 보러 왔어요. 그때 단독 공연 홍보하면서,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에게 돈을 안 받고 되레 100원을 준다고 했는데, 그 100원을 받으려고 왔었나…. (웃음) 막상 공연을 보니까, 춤추는 애들도 있고 뭔가 좀 골 때리는 걸 하는 놈인가 보다 했는지, “우리랑 같이 하자” 하더라구요. 그해, 2002년부터 눈뜨고 코베인이라는 밴드의 드러머로 홍대에서 공연을 하게 됐어요.

 

그럼 깜악귀(눈뜨고 코베인 보컬)를 비롯한 사람들을 모두 다 학교에서 만난 거네요? 

그렇죠. 그 사람들은 학교 내에서 활동하는 것 이상으로 홍대에 진출하려는 부푼 꿈을 안고 있던 사람들이었어요.

 

왜 홍대 진출이 목표였어요? 

1, 2학년 땐 어떤 것에도 별 관심 없이 지내다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밴드를 시작하고 음악을 하다 보니, 더 잘하고 싶고 더 재밌는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드럼 학원도 다니고 그랬어요. 프로 드러머가 될 생각이 있었죠. 학교 안에서 밴드를 하다 보면 막연하게 홍대가 동경의 대상이 돼요. 홍대 가서 다른 밴드들 공연 보니까 잘하는 것 같고, 뭔가 장르가 있는 음악을 하는 것 같고. 그때는 그게 다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걸로 생계가 해결이 되는 줄 알았어요.

 

순진했군요. 

그렇죠. 어차피 그때는 생계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홍대는 나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리그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쿨 리그와는 다른 리그죠. 홍대에서 우리의 자작곡을 공연하는 것이 스쿨 리그에서 꿈꾸던 최종적인 종착점이었던 거예요. 눈뜨고 코베인 사람들이 “홍대 가서 하자!” 하는데, 이건 나한테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거의 매주 공연을 했어요, 2년 동안.

 

밴드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부모님과의 갈등은 없었어요? 어쨌든 ‘서울대’라는 학력은 공부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걸로 통하니까 말이죠. 

우리 부모님이 그런 얘기를 대놓고 하시는 스타일이 아니세요. 오히려 그런 얘기는 음악 시작하고 나서 인터뷰를 통해서 많이 들었어요.

 

본인 스스로는 갈등이 없었어요? 

3, 4학년 들어서는 모든 게 확실해졌던 것 같아요. 음악 말고는 정말 하고 싶은 것도, 떠오르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음악 말고 다른 것을 해서 행복할 거라는 생각도 안 들었고. 그렇다고 ‘내가 음악을 해서 먹고 살 수 있을 거다’라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때는 그저 ‘프로 드러머가 되어야지’ 생각했기 때문에 드럼 연습 열심히 해서 실용음악과 나온 애들보다 더 잘해가지고, 드럼 연주로 인정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음악의 어떤 매력에 끌린 거예요? 무대 위에서 느끼는 희열? 아니면, 생각대로 음악을 구현해 내는 작업 과정 자체에 매력을 느꼈나요? 

당시엔 합주를 하는 것, 그 자체가 좋았어요. 대충 하는 거 말고, 정말 잘 맞춰서 듣기 좋은 하모니를 이뤄내는 그 자체. 그땐,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탄생, 장기하와 얼굴들


장기하는 대학에 입학한 지 6년 만에 군에 입대했다. 공연하느라 차일피일 입대를 미뤘고, 그러다 눈뜨고 코베인 1집 앨범 녹음을 한다길래 조금 더 미뤘다. 그 앨범은 결국 첫 휴가를 나와서야 만져볼 수 있었다. 군 복무 기간 동안 내무실 기타는 내내 장기하가 독차지했다. 그렇게 군대에서 만든 장기하의 자작곡이 제대할 때쯤엔 10곡 정도로 쌓였다. ‘싸구려 커피’, ‘느리게 걷자’, ‘달이 차오른다, 가자’ 등 장기하와 얼굴들 1집 앨범 수록곡의 반은 모두 군대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장기하는 자신이 프로 연주자보다 창작에 더 잘 맞는 사람이라는 걸 막연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사람이 살면서 직관적으로,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들어차는 생각이 있다면, 언제나 그걸 따라가는 게 옳다고 믿었던 장기하는 제대 후 사회에 나와 가장 먼저 해야 할 과제를 스스로 정했다. “내 자작곡을 가지고 밴드를 해보자.” 그렇게 장기하는 방방곡곡을 돌며 밴드의 멤버가 될 ‘얼굴들’을 모았고, 제작, 포장, 배송까지 모두 수작업을 거친 그들의 첫 EP <싸구려 커피>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공 CD 한 장 한 장, 일일이 손으로 직접 음원을 얹어 구운 수공예 CD였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CD는 최소 수량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들은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첫 공연이 있던 날, 정성스레 구워 만든 CD 100장 중 ‘뻑’이 난 12장을 제외한 88장의 앨범을 공연장에서 직접 판매했다. 그러다 어느새 1,000장씩 CD를 구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뒤이어 발매된 장기하와 얼굴들 정규 1집 <별일 없이 산다>는 ‘공장제 대형 음반’이 되었다.



장기하와 얼굴들 '싸구려 커피'



군대에 있을 때 쓴 곡들이 많아서인가요? 1집의 가사들은 현실에의 무기력함을 인지는 하는데, 체념해버리는 느낌이에요.  

그런 느낌이나 정서는 꼭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느낀 건 아니고. 20대 들어서 그런 느낌은 계속 있었어요. 뭔가 꽉 막히고, 답답한 느낌. 지금까지 해왔던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 같은 거. 그런데 입대 후 실제로 갇혀 있는 상황이 되니, 그런 감정이 더 증폭되었을 순 있겠죠. ‘싸구려 커피’ 가사는 정확하게 그 어느 날 군대에서 느꼈던 느낌을 그대로 쓴 거였어요. 흐린 날, 회색빛 하늘인데 비는 안 오는 그런 날에 ‘이 하늘은 되게 낮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은 이걸 비유적인 표현이라 생각하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 직접적인 느낌을 쓴 거죠.

 

장기하와 얼굴들을 준비하면서 밴드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그릴 때 생각했던 이미지는 어땠어요?

우선 음악적으로의 롤 모델이 몇 팀 있었고. 하지만 무조건 정말 열심히 고민을 해서 내 얘기를, 나만 표현할 수 있는 솔직한 내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어떤 퍼포먼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저런 고민하다가 ‘나를 받아주오’ 노래가 만들어진 계기로 여성 코러스가 필요해서 수소문 끝에 여자 둘(미미 시스터즈)을 섭외했죠. ‘말은 하지 말라’라는 주문을 했어요. 대신 그때는 제가 지금보다 멘트를 훨씬 많이 했어요. 보통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했으니까, 농담도 많이 했죠. 음악 외적인 걸 많이 하려고 했어요, 그땐. 음악을 하다 보면 시기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은 말을 많이 하면 그 분위기로 빠질 수가 없는 것 같아서 오히려 말을 줄이는 편인데, 그때는 사람들이 음악을 듣든가 말든가 하는 식으로 노래와 연주를 쓱 하고 내려가는 밴드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춤추는 사람도 세우고, 이래저래 혼자 떠들기도 하고 조크도 하고, 그런 식이었던 거죠.

 

복고적인 사운드와 아날로그한 느낌이 장기하와 얼굴들의 이미지가 돼버렸어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는데… 옛날 음악이 좋긴 했어요. 음악을 하면서 모범으로 삼았던 뮤지션들이 대부분 70년대 뮤지션이었으니까. 송골매라든지 산울림이라든지. 그때는 한국말로 노래를 하는 데에 있어서 어떤 정답 같은 게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정답을 이미 70년대에 선배들이 이미 다 제시했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 이후에 전통이 끊긴 거라고. 전 세계적인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사람들이 말하는 ‘대세’라는 거겠지만, 저는 그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음악을 하려면 정답을 찾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죠. 선배들이 제시한 정답을 모방해 음악의 틀과 방식으로 취하고, 내용은 제가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2집 준비를 시작할 때, 그런 생각에 변화가 생겼나요? 

네. 지금은 그게 꼭 정답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젠 ‘어디에든 정답은 없다’는 생각에 가깝죠. 정답을 정해놓고 음악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작년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에서의 ‘장기하 만취설’이 아직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어요. (웃음) 

작년 상반기를 통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다가, 7개월 만에 처음으로 한 공연이 지산 공연이었거든요. 1집 내고, 1년 반을 달리다 보니까, 도저히 못하겠더라구요. 제가 그렇게 바쁘게는 못 살거든요. 공연도 좋고, 음악도 좋지마는 사람이 살고 봐야겠다 싶어서 반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지냈어요. 그러다가 지산 무대에 오르기 전 2달 동안 금주를 했어요. 지산 둘째 날 우리 공연 끝나고 나서, 진짜 미친 듯이 처먹었어요. 봉인이 풀리는 순간이었죠. 지산에서 코린 베일리 래(Corinne Bailey Rae) 공연을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막상 술 깨고 정신 차리고 보니 공연 본 기억은 없고 오후 5시도 아닌, 새벽 5시, 숙소에 누워있었어요.

 

공연 안 하고 쉬어보니 어떻던가요? 

별로 안 좋더라구요.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하도 공연을 안 하니까 오히려 자존감에 타격이 오더라구요.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란 걸 스스로에게 입증할 기회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 기분만 안 좋아지고.

 

쉴 새 없이 공연만 오래 해도 매너리즘에 빠지잖아요. 

그것도 맞아요. 그래서 쉬는 건데. 이게 참, 역설적인 거죠. 좋으라고 쉬었는데, 더 기분이 안 좋아져. 그 상황을 타개하려고 나간 게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이었어요. 그때 지산 공연이 한 두어 달 남았었나? 타락한 자존감과 늘어진 내 몸과 마음을 추슬러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으려면, 남은 두 달 동안 뭔가 나 자신에게 충격요법을 써야겠다 했어요. 저는 사실 취미가 술밖에 없어요. 제 유일한 놀이 방식이죠. 그 술을 끊으면 나에게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충격 요법이 되겠다 했어요. 그래서 두 달 동안 금주하고, 운동도 하고, 그랬죠. 결국 지산 공연이 목표했던 대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어요. 자존감 확 살았어요. 공연할 때 느낌이 너무 좋았었거든요. 관객들과 저 사이에 느껴지는 그 에너지가 너무 좋았어요. 두 달 술 끊고, 운동도 했으니 무대 위에서 막 날아다니는 거예요. 그 후로 한동안은 술 먹어도 다음날 숙취가 없었어요. 그래서 더 먹었지. 하반기엔 이따금씩 공연도 하고.




2집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2008년 장기하와 얼굴들의 등장은 당시 사회의 키워드로 통했던 ‘88만 원 세대’와 ‘청년실업’, ‘루저’, ‘잉여 인간’ 같은 단어들과 절묘하게 연결됐다. 서울대 다니는 엘리트가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 하는 노래를, 흐느적거리는 춤을 추며 표정 하나,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위안을 받는 것도 같고, 왠지 모를 쾌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이 모든 게 말과 글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연결하고 만들어낸 스토리겠지만, 장기하와 얼굴들이 사회적 키워드와 연결된 이미지의 수혜자라는 건 장기하 자신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다. 한국 대중음악계는 음악보다는 음악을 둘러싼 이야기들에 더 관심이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장기하는 안다. 결국, 음원이나 CD를 통해 음악을 사서 듣는 사람들은 ‘그저 음악이 좋다’는 이유로 듣는다는 걸. 그들이 ‘88만 원 세대’를 대변하는 아이콘이기에 음악을 사서 듣지 않는다는 걸. 그는 이슈 메이킹의 영역과 음악을 듣는 영역을 별개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분명, 이슈 메이킹 영역이 아니다. 결국, 모든 건 ‘듣기 좋은 음악’으로 통한다는 것을 장기하는 안다. 자신의 음악에 자신감이 가득한 그는 음악 외적인 얘기가 어떻게 풀리든지 간에 모든 것을 초연하게 받아들인다. 음악만 좋으면, 그 음악에 어떤 스토리가 붙어 다니던 크게 개의치 않는다. 진짜 큰 문제는 자신의 음악에 자신이 없을 때 생기는 것이다. 어쩌면 그 사회적 키워드로 인해 장기하와 얼굴들은 음악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장기하가 음악적으로 밀도 있게 집중했을 2집 앨범이 기다려졌다. 그렇게 2년 4개월 만에 장기하와 얼굴들이 음악만으로 대중을 만나는 시간이 왔다.

 

2집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1집을 돌아봤을 때, 1집에서 느꼈던 한계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나요? 

송라이팅 부분에서 저는, 제가 만든 노래들이 다 좋다고 생각해요. 만들다가 중간에 안 좋은 것 같으면 아예 곡을 버리죠. 음반에 실은 건 제가 자신 있고 좋아하는 곡들이에요. 그래서 그런 거엔 불만이 없었고. 다만 하고 싶은 게 생긴 거죠. 1집은 저 혼자 다 만들었기 때문에, 밴드 앨범이라기보다는 싱어송라이터의 앨범에 가까웠고, 이거와는 다른 개념의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밴드니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걸 역으로 얘기하면 1집에 대한 한계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겠네요.

 

프로 연주자의 꿈은 결국 버린 건가요? 

네. 손이 말을 잘 안 들어서.

 

못하는 거예요, 안 하는 거예요? 

못하니까 안 하죠. (웃음) 제가 연주하는 게 듣기 좋은 소리가 안 나는 것 같아서요. 듣기 좋은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연주를 하고, 전 또 제가 잘할 수 있는 걸 또 하고.

 

기하 씨는 밴드의 지휘자 같은 역할을 잘하는 건가요? 

저한텐 그게 어울리는 것 같아요. 연주를 하고 있으면 큰 그림을 보기가 어려워요. 연주를 되게 잘하면 큰 그림을 볼 수가 있는데, 저는 애초에 연주를 아주 잘하는 게 아니니까요.

 

작업은 주로 기하 씨 혼자 하나요? 

작사/작곡까지는 혼자 해요. 1집 때는 편곡까지 혼자 집에서 다 해서 완전히 완성된 상태의 음악을 애들한테 들고 가서 “이렇게 쳐라” 했어요. 2집을 만들면서 편곡 작업을 멤버들과 함께 했어요. 이건 제 인생에서 나름대로 꽤 새로운 시도였어요.

 

왜 작업 방식에 변화를 준 거죠? 

1집을 만들 땐 몰랐던 게 하나 있었어요. 이건 1집을 내고 공연을 하면서 알게 된 건데… 1집 내고 공연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1년에 공연 100개를 넘게 할 정도였으니까. 다양한 크기와 다양한 종류의 무대에 올라보고, 방송도 해보고, 페스티벌도 나가보고, 클럽 공연도 해보고, 단독 콘서트도 해보니까 조금씩 알겠더라구요. 멤버들 사이에 시너지가 굉장히 중요하고, 또 그게 사운드의 매력을 만든다는 걸. 밴드 음악이라는 건 재즈처럼 즉흥 연주는 아니더라도 뭔가 인터렉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좋아하던 국내외 록 밴드들의 영상들을 다시 보니, 그런 게 보이더라구요. 멤버들 간에 왔다 갔다 하는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에 멋있는, 그런 것들이요. 혼자 생각해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거요.

 

1집을 만들 땐 멤버들과 함께 작업할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요? 

그런 생각은 아예 안 했어요. 특히 크리에이티브에 있어서 아무도 안 믿었어요, 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었나요? 

저만 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고 믿었고, 그게 제가 듣기에도 좋았고. 또, 그걸 누가 건드리는 게 싫었어요. 1집 땐, 건반 연주자 멤버가 없어서 세션 연주자와 협연을 많이 했는데, 누가 뭐 하나라도 바꾸면 그게 되게 거슬렸었어요. 그런 식으로 딱 짜인 대로만 해야 하는 스타일이었던 거죠, 저는. 근데 그런 걸 약간 놓으면, 재밌는 게 확 생긴다는 걸 어느 순간부터 인지를 하게 된 것 같아요.

 

공연을 많이 하면서 말이죠? 

네. 그러면서 멤버들이 각 파트에서 저보다 잘하는 게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 하게 된 거 같아요.

 

멤버들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건가요? 

그렇죠. 대신 별로 안 좋은 걸 하자 그러면, “안 돼!” 하고 정리는 하죠. 사공은 늘었어도 선장은 있어야 하니까.

 

밴드를 이끈다는 건 참 어려운 일 같아요. 

정말 어려워요.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요. 혼자서 모든 걸 만드는 경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미가 있어요. 그런 재미를 알게 된 것도 얼마 안 됐지만. 전 이번에 2집을 만들면서 그런 재미를 느꼈어요.

 

2집의 밑그림은 어느 정도 그려놓고 작업을 시작한 건가요? 

사운드에 있어서는 들었던 음반들 중에서 ‘드럼 소리는 이렇게 나오면 좋겠다’라든지, ‘이번 음반에서는 건반 악기를 잘 활용하고 싶다’라든지, 어느 정도 스타일적인 그림은 그려져 있었어요. 디테일한 나머지는 한 곡 한 곡 만들면서 정해졌던 거구요.

 

2집을 원테이크 방식으로 녹음한 건 기하 씨의 생각이었나요? 

네. 제 생각이었어요. “이러이러한 스타일로, 방식으로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하면서 선배님들한테 많이 여쭤보고 다녔는데, 합주 녹음(원테이크) 방식에 도전해 보라는 말씀을 심심치 않게 들었어요. 그때 딱 ‘아, 내가 이거에 도전을 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때 딱 떠올랐던 게 바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이었어요. RATM 앨범을 들어보면 템포가 일정하지 않아요. 어떤 부분은 빨라졌다가, 어떤 부분은 느려졌다가 하거든요. 그런데 모든 멤버가 다 같이 빨라졌다, 느려졌다 해요. 그게 밴드 음악의 재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2집에서 해야 할 과제는 이거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들한테 해보자 얘기하고, 빡세게 연습을 시작했죠.

 

그렇게 얻어낸 사운드나 앨범의 전체적인 퀄리티에 만족하나요? 

네. 제가 상상했던 거 이상으로 그 효과가 눈에 보이게, 귀에 들리게 나타난 것 같아요.

 


장기하와 얼굴들 '그렇고 그런 사이'



기하 씨는 음악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퍼포먼스나 뮤직비디오 같은 표현 방법에 아이디어를 기가 막히게 잘 활용하는 것 같아요. 2집 앨범 중 두 곡의 뮤직비디오(‘그렇고 그런 사이’, ‘TV를 봤네’)를 직접 디렉팅했는데, 반응이 대단했어요. 

작사/작곡, 편곡을 마치고 녹음/믹싱까지 끝낸 후에 뮤직비디오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어요. 완성된 곡을 계속 머릿속에서 재생시키면서 여기에 어울리는 장면이 뭘까 생각한 거죠. 제가 특별히 영상적인 부분에 소질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저에게 어떤 프로페셔널 감독도 따라올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딱 하나예요. 바로 이 음악에 대한 이해도. 누구보다 제가 이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음악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영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뮤직비디오는 음악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음악을 BGM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그렇게 하긴 싫었어요. 무엇보다 음악이 들리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뮤직비디오가 잘 만들어졌다면 바로 그 이유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길을 돌아보면 어때요? 

잘해왔다고 생각해요.

 

서포모어 징크스는 깨졌다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죠. 그중엔 안 되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2집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받는 부담감은 없었나요? 

적어도 1집만 못하다는 말은 듣지 말아야겠다 했어요.

 

오히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더 집중이 안 되고 힘들어지지 않나요? 

맘을 비우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딱히 방법은 없었지만.

 

10년 전, 스쿨 밴드 시절의 장기하와 현재의 장기하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여전히 같나요? 

기본적으로는 같죠.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고, 나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그런 건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은 누가 봐도 저는 음악을 업으로 삼은 대중음악인이 됐잖아요. 그러면서 점점 이 판에서 좋은 음악을 하면서 오래 살아남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게 되는 것 같아요.

 

좋은 음악을 하면서 오래요? 

네. 둘 다요. 원래 좋은 음악을 해야 오래 살아남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그런데 막상 그 예를 생각해 보면 별로 없어요. 별로 없다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거겠죠.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뮤지션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에요. 적어도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그런 길을 걸었다면, 나도 한 번 사는 인생인데 그런 길을 걸으면, 나중에 내 인생을 돌아봤을 때 보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을 가장 많이 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에요. 작년, 공연을 보러 갔다 정말 큰 감동과 느낌을 받고 돌아왔거든요.

 

좋은 음악을 오래 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도 해봤나요? 

그때그때의 선택인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는 뭐에든 휘둘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방송도 하고, 뭐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 내가 마음으로 진짜 원하는 게 뭔지 판단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신경 쓸 게 점점 너무 많아지고 있어요.

 

음악 외적인 걸로 흔들린다는 생각이 들 때, 어떻게 다시 중심을 잡나요? 

안 그래도 최근에 그런 생각이 좀 들어가지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한 20일 정도 술을 끊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여유가 있는 시간엔 항상 취해있으니까, 요즘 통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는 것 같아서.

 

공연이 없는 날의 스케줄은 주로 음주시군요. (웃음) 

네. 요즘 그래요. (웃음) 스케줄 때문에 없는 시간을 짜내서 깨알같이 술을 먹으니까 모든 게 ‘훅’ 하고 지나가버리는 것 같아요.

 

3집의 과제는 뭘까요? 너무 이른 질문이겠죠?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올 한 해는 2집 활동하고, 공연 계속해야죠. 그리고 뭔가 좀 재밌는 걸 해보고 싶은데, 아직 아이디어가… 작년 지산 공연부터 지금까지 제가 하고 싶었던 게 뭐냐면, ‘평범한 형태의 록 밴드로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거였어요.

 

음악 외적인 요소로 사람들 눈을 현혹시키지 않고 말이죠? 

그렇죠. 음악 외적인 거 말고. 기름기 싹 빼고. 그렇다고 미미 시스터즈가 기름기라는 말은 아니지만. (웃음) 특별히 안무, 그런 거 없이 음악 외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연주자들의 잘 연습된 연주를 이용해서 공연을 잘해보자는 걸 목표로 1년 정도를 달려왔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완벽하진 않죠. 이건 계속 가져가면서, 이제는 여기에 뭔가 ‘플러스알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렇고 그런 사이’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던 것처럼 재밌는 뭔가를 해보고 싶은데, 그게 뭐가 될지는 아직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장기하와 얼굴들은 인디 뮤지션이다. EP를 내서 번 돈으로 정규 1집을 냈고, 또 그 돈으로 2집을 냈다. 대규모 자본 없이 한정된 자본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상황이 오히려 장기하의 창작력을 자극한다. 금전적인 한계 안에서 뭔가 재밌는 걸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또 생기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인 욕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디의 방식을 유지하면서 만든 음악이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운 좋게 이슈를 등에 업고 대중음악계로 올라선 인디 출신 슈퍼스타가 아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랬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인디 뮤지션임과 동시에 대중음악인이다. 앞으로 그들의 모습은 더욱더 예측하기 힘들다. 그들은 매 순간마다 점점 더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F.OUND magazine, September 2011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Behind Story


장기하는 언제나 나에게 흥미로운 인물이다. 나와 같은 해에 대학에 입학했고, 이삼십 대를 홍대에서 보냈다. 하지만 각자 다닌 대학 이름이 달랐고, 자주 드나들던 클럽 이름도 달랐다. 새 천년의 희망과 기대를 가득 품었던 우리 세대가 88만 원 세대, 잉여 인간으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면서 ‘서울대 나와서도 배고픈 인디 씬에서 돈 안 되는 음악하는’ 장기하로 상징되는 건 아무래도 억울했다. 그래서 더 장기하가 오랫동안, 잘 해내길 바랐다. 서울대를 나와서도 아닌, 무기력한 잉여 인간이어서도 아닌, 그만의 재능과 크리에이티브함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길 바랐다. 그래서 그 당시 2집이 중요했고, 장기하는 훌륭하게 해냈다. 그리고 사회가, 그리고 시대가 제멋대로 덧씌운 역할놀이도 잘 해낸 장기하는, 지금도 ‘흥’ 있게 ‘멋’ 있게 잘하고 있다. 담백하고 심플하게, 자기가 제일 잘하는 거 하면서, 제멋대로 별일 없이 사는 게 제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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