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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May 11. 2024

빈지노|아름다운 청년

Young and Beautiful

미니멀하고 세련된 비트 위에 한 사람이 걸어온,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길이 펼쳐진다. 재기 발랄한 플로우와 서정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음악을 들으며 별을 쫓던 소년이 젠틀하고 사려 깊은 신사가 되어가는 과정, 딱 그만큼의 이야기다. 세상을 향한 치기 어린 반항과 자존심 대신, 화려한 겉치장과 어깨에 들어간 힘 대신, 묵묵히 펜을 꾹꾹 눌러써 내려간 일기와도 같다. 혼자서 흥얼거리던 가사가 비트를 만나 음악이 되고, 그 음악을 통해 많은 것을 겪은 청년의 진솔한 이야기다. 음악으로 세상을 지나온 스물넷부터 스물여섯까지의 순간들이 담긴 앨범 <2 4 : 2 6>.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국 스트리트 씬의 시작과 발전에 있어 주저 없이 ‘형님’이라 칭할 수 있는 인물들로 이어온 ‘K-Street’이 주목하는 새롭고 젊은 세대, 래퍼 ‘빈지노(Beenzino)’다. 묵직한 형님들의 기운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그를 통해 참신하고 새로운 스트리트 씬의 현재와 미래를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와 믿음도 함께였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ER 천윤기 





빈지노에게도 방학은 왔다. 지난해에 복학한 미대에서 학교 생활하랴, 음악 작업하랴, 이래저래 정신없던 그의 EP 앨범 <2 4 : 2 6>도 지난 7월 3일 발매됐다. ‘핫클립(Hotclip)’과 ‘재지팩트(Jazzyfact)’가 아닌, 빈지노의 이름만으로 세상에 나온 첫 번째 솔로 앨범.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깍듯하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은 그는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파운드 매거진과의 인터뷰가 조금 낯설었는지 처음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엔 해맑은 미소가 번졌고, 그 모습이 꼭 어린아이처럼 맑고 밝아보였다.


빈지노 <2 4 : 2 6>




도시와 시골을 오간 꼬마 래퍼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만 해도 이사를 수십 번 다닌 빈지노가 가장 멀리 이사를 간 건 여덟 살 때 아버지를 따라간 뉴질랜드였다. 뉴질랜드는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한 파티를 열어줄 만큼 문화적으로 쿨한 곳이었다. 저녁 7시쯤 학교 강당에 한껏 멋을 낸 초등학교 학생들이 모이고, 디제이의 음악에 맞춰 선생님과 함께 춤을 추고 노는 멋진 파티였다. 어린 빈지노에게 그 모습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다. 평생 살 거라 생각했던 그곳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건 몇 년 후, 부모님의 이혼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돌아온 빈지노의 어린 시절은 양평에서 시작됐다. 힙합을 들으며 래퍼들을 따라 하고 백스트리트 보이즈(Backstreet Boys)를 좋아하는, 세련된 감각을 선망하던 아이는 인적이 드문 시골 마을에서 수십 분 거리나 되는 학교를 오가며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렸다. 전체 학년을 통틀어 반이 하나뿐인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받는 관심과 사랑은 도시 학교의 그것보다 더 깊었다. 그 소중한 시간들이 지금 빈지노가 쓰는 가사에 남았다.


“시골이 얼마나 신기한데냐 하면, 25~30명 정도 되는 친구들이 학년 그대로 올라가요. 반도 안 바뀌고.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옮겨가면 다른 마을 애들이 더해져서 반은 2개가 되는데, 초등학교 친구들 모두 그대로 있어요. 친구들이랑 같이 음악도 듣고 춤도 추고. 재밌었어요. 한국 학교에선 파티를 안 열어주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제가 뉴질랜드 문화를 학교 친구들에게 퍼뜨리려고 엄청 노력했죠. 외국 힙합도 많이 찾아 듣게 됐고, 마스터플랜(Master Plan)도 알게 됐어요. 친구들 꼬셔서 주말만 되면 버스 타고 이태원에 나가 힙합 옷도 사 입고. (웃음) 힙합 관련 인터넷 동호회에 가입해서 대학로에서 하는 정모도 나가고. 주로 듀렉 쓴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죠. 전 초등학생이었고요. 형, 누나들이 예뻐해 줬어요. 그때 GD가 “내 나이 열셋” 하면서 나왔을 때였거든요. 뉴질랜드에서 온 지 얼마 안 돼 영어가 더 익숙했던 때라 대학생 형들 랩 하는 거 보면서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이 가사를 써서 동호회에 올리는 걸 보고 저도 일기에 가사를 쓰고 그랬죠. 동호회 형들이랑 팀 짜서 정말 말도 안 되는 녹음도 해보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영향


빈지노의 학창 시절엔 언제나 미술과 음악이 있었다. 부모님과 약속한 공부 시간을 채우는 대신 서울에서 보낼 수 있는 주말을 보장받았다. 양평과 서울 간의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도심의 멋과 시골의 풍경을 오가며 빈지노는 많은 것들을 가슴에 품었다. 버스를 한번 놓치면 히치하이킹을 하지 않고는 집으로 돌아가기 힘든 시골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영감을 얻었다. 지금 돌아봐도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시골의 여유와 도시의 다이나믹함이 뒤섞인 시절이 지나고, 예술 고등학교로의 진학과 함께 빈지노의 본격적인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미술 좀 한다는 학생들이 모인 예고에서 처음엔 주눅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시골 생활과는 다른 도시 생활에 적응 기간도 필요했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건 래퍼가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지만, 엄마가 새로운 가정을 꾸리시면서 저에겐 새아버지와 누나, 형이 생겼어요. 가정환경의 변화가 저에게 안 좋은 영향과 상처가 됐을 거란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전 그로 인해 더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친아버지와 뉴질랜드에서 생활하면서 아버지의 안 좋은 모습을 많이 봤어요. 엄마와 함께 살면서 많은 부분이 바뀌기 시작했죠. 전 원래 남이 쓴 컵도 절대 같이 안 쓰고, 남이 만진 것도 안 만지고, 사람 만나면 말도 잘 안 하고 딴 데 가 있고 모른척하고, 그런 애였거든요. 소심하고 깔끔 떠는 애. 그런데 새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남자다운 면이나 ‘진짜 멋’을요. 엄마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자가 여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고, 남자로서의 믿음직스러운 모습과 책임감 같은 것도 배웠죠. 내가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선 책임감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도 새아버지의 영향이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선 대학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대학만 가봐라, 난 음악만 할 거야.’ 그렇게 미대에 합격해서 학교를 다니는데 미술이나 음악 모두, 영역은 조금 다르지만 창의력에 집중해야 하는 일이라 두 가지 일을 함께 한다는 게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 1학기, 2학기를 엉망으로 다녔어요. 그리고 나선 안 되겠다 싶어 휴학을 했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피처링이나 앨범 활동에 전념하게 됐어요.”








내 목소리가, 가사가 세상에 처음 들려진 날


피스쿨(P’Skool)이 2009년 발표한 앨범 <Daily Apartment>의 메인 MC로 참여해 이름을 알리기 전부터 빈지노는 여러 힙합 뮤지션들과의 작업에 참여했다. 힙합 리스너들 사이에서마저 생소했던 빈지노라는 이름이 쟁쟁한 래퍼들 사이에 오르내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오랫동안 목말라했던 루키의 출현에 열광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은 ‘DC 트라이브’였다. 빈지노가 녹음해 올린 곡을 우연히 듣게 된 사이먼 D(Simon D)가 그를 일리스트 컨퓨젼(Illest Konfusion, IK) 크루로 영입한 것이다. 누군가는 ‘운이 좋다’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우연이었다’ 할 것이다. 하지만 빈지노는 담담했다.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래퍼가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래퍼가 될 거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땐가, 혼자 작업한 곡을 DC 트라이브에 한번 올린 적이 있었어요. 별 반응은 없었죠. 그러다 대학 입학하고 여름 즈음에 여자친구가 “곡이 좋으니 한번 올려봐라” 해서 올렸는데 쌈디(사이먼 D) 형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그땐 막연히 ‘잘하는 래퍼가 될 거야’란 생각만 있었지, 어떻게 해서 앨범을 내고 뮤지션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거든요. 근데 어느 날, 정기석(쌈디)이라는 사람이 쪽지를 보낸 거예요. “그루브가 좋다”라고 그랬었나? 하여튼 만나자고 그러더라고요. 쌈디 형을 그렇게 처음 만났어요. 유명한 래퍼를 만난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를 하고 나갔는데, 3천 원짜리 돈가스 집으로 데려가더라고요. 그때 좀 깼어요. (웃음) IK 크루 얘길 하면서 같이 음악활동을 해보자고 했어요. 그 당시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었죠.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또 나를 맘에 들어하는 래퍼를 만난 것뿐이었죠. 그 이후부터 곡 작업하고 녹음하면 계속 쌈디 형한테 들려줬어요. 형은 그걸 또 주변에 있는 다른 래퍼 형들한테 들려주고. 그때 스윙스(Swings) 형을 소개받아 ‘A Milli’란 트랙에 참여하게 됐죠. 가사를 몇 번이나 바꿔 썼는지 몰라요, 잘하고 싶어서. 내 목소리가, 내 가사가 세상에 처음으로 들려지게 되는 곡이니까요.”






흔들리지 않고 길을 걷는 과정


언더그라운드에서 다양한 피처링 활동으로 차근차근 실력을 쌓은 빈지노는 비트박스 DG(Beatbox DG)와 함께한 ‘핫클립’을 통해 공연의 맛을 알았다. “슈프림 팀(Supreme Team) 공연에 게스트로 혼자 서기엔 벅차니 비트박스 DG와 함께 팀을 이루면 어떠냐”는 사이먼 D의 제안으로 가볍게 시작한 활동이었지만 제대로 공연을 하게 된 출발점이기도 했다. 무대에서 팬들과 만나는 시간도 많아졌고, 팬층도 더 두터워졌다. 점점 래퍼로서의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 잘하고 싶었고, 더 인정받고 싶어졌다. 자신만의 색깔과 감성이 짙은 작업에의 욕심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음악적으로 교류해 온 시미 트와이스(Shimmy Twice)와 함께한 ‘재지팩트’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시미는 재즈힙합에 대해 많은 영감을 준 친구예요. 재즈힙합은 가사가 진지한 건 좋은데 왠지 모르게 우울한 이미지잖아요. 그리고 왠지 촌스럽다는 인식도 강했어요. 시미와 난 재즈힙합의 그런 이미지를 깨고 싶었죠. 언더그라운드 재즈힙합이 절대 촌스럽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외국 음악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는 걸요. 우리만의 진정성이나 신선함에 초점을 맞췄어요. 우리만의 ‘영(Young)한 느낌’, 바이브를 주고 싶었어요. 솔로 앨범을 준비하면서는 재지팩트의 색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 같아요. 재지팩트로 활동할 때나, 솔로로 활동할 때나 비트만 다를 뿐 결국 랩을 하는 사람은 바로 ‘나’거든요. 곡마다 변화를 줄 순 있겠지만, 내가 가진 느낌 그대로 나오는 게 중요하지, 어떤 컨셉을 가지고 일부러 이런 분위기를 물씬 풍겨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요. 이전의 스타일과 항상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선 자유로운 것 같아요. 첫 번째 솔로 앨범을 EP로 낸 건 아직 분명한 내 색깔을 찾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힙합은 미국에서 온 문화고 음악인데, 전 아직 그걸 마스터 못했어요. 나만의 것을 계속해서 찾고 있는 중이죠. 지금은 실력을 기르기 위한 길을 걷고 있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이 어떤 건진 고민 안 하고, 부담 없이 스물넷부터 스물여섯까지 느낀 감성들을 담았어요. 사람들이 계속 듣고 싶은 노래를 만들면 되는 거죠.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음악적 색깔이나 변화에 휘둘리지 않아요.






내가 가고 싶은 길


지난해 6월, ‘Hustle Real Hard’ 콘서트 현장에서 도끼(Dok2)는 더 콰이엇(The Quiett)과 함께 이끌고 있는 일리네어 레코즈(Illionaire Records)에 새로 합류하게 된 뉴페이스로 빈지노를 소개했다. 솔로 앨범 발매를 앞둔 그의 행보에 관심을 두고 지켜본 이들은 어쩌면 메이저 데뷔를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음악성과 대중성 모두를 갖춘 젊고 똑똑한 호감형 래퍼 빈지노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대형 기획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길에 더 집중하는 것을 선택했다.


“사실 재지팩트 활동하면서 이 분위기로 대중가요 시장에 나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내 노래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이 좀 더 메인스트림화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제의가 들어온 여러 회사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어요. 근데 내가 그걸 하면 결국 바보가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장 인상적인 곳이 있었어요. 유명한 작곡가 한 분이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턱 좀 깎으면 되겠네.” 그 말이 너무 징그러웠어요. 턱 깎으면 대체 뭐가 된다는 건지. 랩을 더 잘하게 되는 건가? 노래가 더 좋아지는 건가? 돈을 많이 벌게 되는 건가? 그들이 나에게 원하는 게 느껴졌어요. 굉장히 좋은 환경을 제안한 회사도 물론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 보였어요. 음악적인 부분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걸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활동하는 씬의 스케일이 커지다 보면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더 많아질 텐데,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대중음악을 겨냥한 시장에 합류하는 건 일단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낸 후에 일리네어 레코즈에 들어가게 됐죠. 콰이엇 형이랑 도끼, 둘이 뭉쳐서 음악하고 성과를 내는 모습이 멋있더라고요.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어요. 한국의 대형 기획사나 힙합 레이블 중에도 움직임이 멋있는 곳들이 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가장 큰 매력은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거였죠.”





I’ll Be Back


버벌진트(VerbalJint)와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와 작업하며 같은 마이크 앞에 서던 날, 빈지노는 초등학교 때부터 즐겨 듣고 따라 부르며 꿈을 키웠던 어마어마한 래퍼 형들과 마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뻤다. 그렇다고 주눅 들거나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뻔한 것도 뻔하지 않게 표현하는 신선함을 빈지노는 자신의 무기이자 자신감으로 삼았다. ‘무엇을’ 표현하느냐 보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형들과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도록 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색다른 표현 방식을 찾는 그에게 이제 랩 가사를 쓰는 일은, 랩을 하는 일은 즐거움과 놀이, 그 이상이 됐다.


“랩은 정말 어려워요. 자연히 슬럼프가 오죠. 이젠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땐 쏟아낼 게 많아서 그런지 손만 대면 가사가 술술 써졌어요. 근데 그때는 지금보다 아는 게 없어서 더 쉽게 쓴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이제 뭐가 좋은지 별론지 정도는 아니까, 그래서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화가인 엄마도 창작 작업을 하시는 분이시니까 이런 대화를 많이 나눠요. 실력이 더 늘고 아는 게 많아질수록 부족한 게 더 많이 보이게 되기 때문에 슬럼프가 오는 거라고 엄마가 말씀하셨죠. 예전의 상태로 머무르고 고민을 안 하면 그냥 계속, 그 수준이었을 것 같아요. 가사가 잘 안 나오면 ‘슬럼프다’ 하다가 또 뭐가 하나 나오면 ‘벗어났다! 아직 안 죽었어!’ 하기를 반복해요. 그렇게 ‘I’ll Be Back’이 나왔죠. 이 곡을 공개하고 내가 제일 화났던 건, 이 노래는 슬럼프에 관한 얘기지만 내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슬럼프에 빠지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못한다고 생각하면 이 노래를 왜 썼겠어요? 내 세계 안에서 슬럼프인거지, 남들과 비교했을 때 난 절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If I Die Tomorrow


힙합은 마니아들만의 문화라는 생각에 빈지노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양한 연령대로 팬층이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는 걸 피부로 느끼기 때문. 하지만 음악만으로 집중받기보다는 외모나 학력 같은 음악 외적인 요소들로 이슈가 되는 상황이 불편한 건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기준에서 납득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 당당하다 말했지만, 자신의 실력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꿈꾼다. ‘서울대에 다니는 키 크고 잘 생긴 래퍼’와 ‘실력 있는 래퍼’라는 수식어가 비례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그다. 작업물이 발표된 후 돌아오는 피드백에 취해있기보단 무언가를 표현해 내는 작업시간 자체에 빠져있는 게 더 행복하다는 그에게 어디선가 힙합을 꿈꾸며 혼자 가사를 쓰고 있을 ‘어린 빈지노’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무조건 하고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제가 사실 고등학교 때 잠깐 연기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거든요. 류승범이 <주먹이 운다>에서 욕하면서 복싱하는 장면, 그 장면에 반해서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괜히 미술이 나에게 안 맞는 것 같다고 핑계를 대면서 부모님께 연영과로 진로를 정하겠다고 했죠. 그때 부모님이 “하고 싶으면 해 봐라, 하지만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와라” 하시고 연기 학원에 보내주셨어요. 신중하지 못한 결정이었죠. 6개월이 지나 다시 미술로 돌아왔으니. (웃음)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시도한다는 게 중요하죠.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요. 사람들은 시간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장가갈 때, 시집가야 할 때, 집 사야 할 때, 차 사야 할 때, 결혼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형식에 얽매이고 남들 시선을 엄청나게 의식하죠. 무언가 새로운 길로 가봤다가 아니다 싶어 돌아오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누가 뭐 하다 잘 안 되면, 비웃기부터 하잖아요. 그런 거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 자신에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남들 생각이 아닌 나 자신에 집중하면 마음이 더 편해지는 것 같아요. 내가 나 자신에게 물었을 때 내가 가장 맘에 들어하고 내가 제일 좋은 것, 그거에 집중하면 돼요. 앞으로 나도 그렇게 계속 살았으면 좋겠고,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럼 다들 훨씬 행복해질 것 같아요.” 





빈지노의 솔로 앨범 <2 4 : 2 6>은 그가 걷고 있는 순간들을 기록한 에세이에 가깝다. 별을 쫓고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던 소년이 어느덧 성인이 되어 랩으로 읊어내는 청춘의 에세이. 첫 트랙부터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그가 지나온 발자취들이 하나씩 보인다.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빈지노는 좀 더 자기 자신에 집중하기로 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또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모든 영향들을 어떤 결과로 내보이느냐는 바로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노래 한 곡의 러닝타임을 인생에 비유하자면 이제 막 첫 번째 구절(Verse)을 마무리한 젊고 아름다운 래퍼가 두 번째 구절을 시작하기 위해 목을 가다듬고 마이크를 잡는다. 인생의 가치는 아름다움 자체가 아닌,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과정 자체인 것을 알고 있는 그다. 여러 구절들이 모여 아름다운 한 곡의 노래가 완성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모든 순간은 새롭고 소중하다. 


Beenzino 'Always Awake'



F.OUND magazine, August 2012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Behind Story

인디 잡지에서 늦깎이 에디터 생활을 시작한 나는 당시 인디 씬에서 활동을 시작하던 뮤지션들과 함께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친구는 빈지노다. 2012년부터 지켜봐 온 그는 언제나 여유롭고 친절하고 현명하다. 허투루 말하지 않고, 말한 대로 행동하는 친구다. 이 인터뷰 이후,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주목을 받은 빈지노를 또다시 인터뷰했지만 그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무턱대고 겸손하지도, 또 자만하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가꿔온 그만의 예술가적 에테르가 있었다. 그는 음악을 무기 삼아 자유를 방종으로 여기는 또래 많은 뮤지션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몸에 밴 젠틀함으로 진솔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흔들림 없이 써 내려갔다. 이 인터뷰 이후 더 큰 성공을 거둔 그를 또 다시 만나 인터뷰했지만, 그는 여전했다. 아니, 더 중심이 탄탄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2012년, 스물 여섯 빈지노의 빛나는 출발점과 그의 본질적인 생각과 마음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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