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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May 20. 2024

여전히 우리는 ‘쇼’만 하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에이트 쇼>

*이 글은 넷플릭스 시리즈 <더 에이트 쇼>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5월 17일 넷플리스에 공개된 직후 (5월 20일 기준) ‘넷플릭스 글로벌 Top 10’ 5위에 랭크된 한국의 <더 에이트 쇼>입니다. <연애의 목적> <우아한 세계> <관상> <더 킹> 등 현실 세계와 우아한 영화의 프레임을 잘 조합하는 한재림 감독의 시리즈 데뷔작입니다. 개인적으로 <우아한 세계>에서 현실 조폭이자 기러기 아빠인 송강호가 라면을 먹으며 가족들이 보내온 비디오를 보는 엔딩 씬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현실을 잘 그려내는 한재림 감독과 배우 송강호의 만남이었죠.      


<우아한 세계>(2007)



여전히 할 말이 많은 한국의 자본주의
          

지난 몇 년 동안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와 시리즈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전 세계는 현재 한국이 자본주의에 대해 얼마나 할 말이 많은지 배웠습니다. 엄청난 계급 격차부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이 겪는 굴욕과 고통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작품들은 용기와 지성으로 후기 자본주의 시스템의 잔혹함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노동 착취, 빈곤의 잔인함을 지적하는 새로운 작품 <더 에이트 쇼>가 추가되었습니다. 배진수 작가의 웹툰 <머니 게임>과 <파이 게임>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더 에이트 쇼>는 8명의 타인이 알 수 없는 장소에 갇혀 최대한 많은 돈을 가지고 나가기 위해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게임에서 경쟁하는 모습을 그린 다크 코미디입니다.      


넷플릭스 <더 에이트 쇼> 예고편


     

2021년 팬데믹의 정점에서 전 세계를 강타하고 2024년 두 번째 시즌을 방영할 예정인 <오징어게임>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에이트 쇼>의 8개의 에피소드 내내 <오징어게임>과의 비교는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지만, 나름 차별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먼저 게임의 규칙이 다릅니다. 참가자들은 쇼에 참여하며 많은 시간을 벌수록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헝거게임>의 놀이터 버전인 <오징어게임>보다는 리얼리티 쇼에 더 가깝습니다. 또한, <더 에이트 쇼>는 단 8명의 참가자와 코믹한 톤을 선택했습니다. 이에 더해 계급 사회와 불평등, 부의 분배에 대한 사회적 논평을 다룬 다크 코미디의 옷을 입고, <더 플랫폼>(참가자의 계급을 수직으로 배치)과 <오징어게임>(게임을 통해 경쟁)을 섞은 형식에 심리 게임을 강화했죠.      


<더 플랫폼>


<더 플랫폼> 넷플릭스 서비스 중


참가자는 쇼장에 도착해 자신의 번호를 무작위로 선택합니다. 현실에서 부와 자유, 혹은 가난과 억압 속에서 태어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사는 누구도 자신이 태어난 환경과 상황을 공정한 기회와 성실함, 열정, 노력만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으니까요. 말 그대로 ‘시간이 돈’인 <더 에이트 쇼>에서는 최대한 오래 머물기 위해 카운트다운되는 시계의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오징어게임>에서 참가자들 모두가 볼 수 있게 천장에 매달아 놓은 돈다발처럼 말이죠.      


<더 에이트 쇼>는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인피니티), 8개로 구성된 에피소드, 8인의 참가자쇼의 제목처럼 숫자 ‘8’에 집착합니다각 에피소드 엔딩을 장식하는 인물이 다음 에피소드의 인트로에 등장하는 것 역시 ‘무한대’를 상징하죠. 8인의 참가자 각각의 지난 서사를 다루는 데 오랜 시간을 쏟지 않는 건 좋았습니다. 감독은 8인의 참가자가 ‘어떻게, 어쩌다’ 지금, 여기에 오게 되었는지보다 쇼장에서 각각 어떤 태도를 갖고 어떻게 게임에 대응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여기고, 또 그에 집중하고 싶은 듯 보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살아왔는지보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처럼.     

 


평면적이고 게으른 8인의 캐릭터


하지만 <더 에이트 쇼>가 과연 현실의 불평등한 시스템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군상들을 해학적으로 통찰력 있게 탐구했는지는 의문입니다. 8인의 참가자들은 주어진 캐릭터의 전형적인 고정관념을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소화해 냅니다. 폭력적인 인물, 순진한 인물, 미친 인물, 성스런 인물, 이상한 인물, 짜증 나는 인물, 똑똑한 인물 등 <더 에이트 쇼>에 등장하는 8인의 캐릭터는 8편의 에피소드 내내 일차원적이고 평면적입니다     


모든 참가자는 이름 대신 층수로 불립니다. 그런데 층수로 충분히 예측가능한 캐릭터가 전개되죠. 1층은 장애를 가진 서커스 단원이고, 2층은 엄격한 도덕관념을 가진 강단 있는 여성, 4층은 큰 눈망울을 가진 순수한 옆집 소녀, 5층은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는 중년의 여성, 6층은 도덕성 없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남자, 7층은 지적인 ‘강남 좌파’, 8층은 노출증 관종 사이코패스입니다. 각 층의 캐릭터는 한치의 오류나 반전 없이 고정관념에 따라 위층은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뻔뻔하고 착취를 일삼으며 사기나 치는 사이코패스, 아니면 깡패로 그려집니다. 극의 상황이나 환경이 인물에 주는 변주가 없어 자신의 주어진 역할을 다합니다. 아래층은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기까지 하며 착하기만 하고 늘 당하기만 하는 하층민의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합니다. 이들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누가 빌런이 될지 쉽게 예상 가능하고, 8인의 캐릭터는 에피소드 초기부터 극명하게 드러나며 긴장이나 갈등, 변화, 반전의 싹을 틔우지 못합니다. 2층과 6층의 대립도 흐지부지, 2층과 8층의 대립도 흐지부지. 그리고 시리즈는 8편의 에피소드 내내 이러한 예상에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전개됩니다.      


계급 사회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 중 <더 에이트 쇼>는 관음증에 중독된 우리 사회의 관찰 프로그램 형식을 선택했습니다. 관찰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출연자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공감과 연대, 욕망의 투영 등을 이유로 공감하며 응원합니다. 하지만 <더 에이트 쇼>에는 응원하고 싶은 참가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각각의 캐릭터는 생명력도 없고, 매력도 없고, 재미도 없고, 공감도 없습니다. 




최악의 캐릭터, 8층


그중에서도 8층 천우희의 캐릭터 해석은 최악입니다. 이유 없이, 의도 없이 과장된 목소리와 톤, 말투, 어색한 표정과 행동은 실망스럽습니다. 운 좋게 8층이 되어 계급 사회의 여왕벌이 되어 가지만 잔혹한 쇼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단 한 번의 내적 갈등이나 모순적인 상황에서의 감정은 전혀 표현되지 않습니다. 특히 8층이 갑자기 6층에 돌변해 테이저건을 쐈는지는 도무지 설득이 안 됩니다. 감독이 대놓고 ‘부자는 나쁘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건지, ‘사이코패스 행위예술가’에 덴 경험이 있는 건지, 그저 8층은 시종일관 인간성을 상실한 ‘미친년’으로 표현됩니다. 8층의 캐릭터 빌드업에 더 공을 들였다면 천우희라는 좋은 배우를 통해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를 잘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감독은 3층을 시리즈의 ‘화자’로 내세웠지만, 7층 ‘강남좌파’에 가장 힘을 실은 듯합니다. 감독 자신의 자아가 가장 많이 투영된 캐릭터일 수도 있습니다. 8층과 대비되어 (7층을 위해 8층 캐릭터가 더 단순하게 표현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위층임에도 불구하고 문제의식과 사회의식, 양심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리 지적이고 올바른 신념을 가졌더라도 현실은 돈을 쥔 투자자의 구미에 맞는 영화를 찍으며 스스로 예술가라 자위하는, 또한 그러한 타협에 대한 스스로 느끼는 가책과 사회로부터의 비난을 자본주의 시스템의 탓으로 돌리는 인물이죠. 쇼 도중에도 어떤 상황이나 의도였든 아래층 사람들을 배신했고, 또 앞으로도 살면서 그런 상황이 오면 언제든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시즌 2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말이죠.      


시리즈 내내 한정된 공간에서 단 8명의 참가자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쇼에서 전반적으로 평면적이고 단순하고 게으른 캐릭터는 실망스럽습니다. 6층은 원래 나쁘고, 5층은 원래 우유부단하고, 4층은 원래 기회주의적이고, 2층은 원래 정의롭고, 1층은 원래 하층민입니다. 이들의 연대는 명분도 의미도 없어 얄팍합니다. 3층은 가장 입체감 있어야 하는 캐릭터였지만, 류준열의 흐릿한 미소만큼 흐지부지합니다. 이는 초반부터 속도를 높이고 굉음을 내며 달리는 자동차가 갑자기 안정적인 자가 주행모드로 바뀐 것 같습니다. 




소모적인 게임, 의미 없는 관찰

한재림 감독은 인터뷰에서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그리기보다는 작은 사회가 만들어질 때 발생하는 권력 역학 관계의 형성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시리즈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것 같습니다. <더 에이트 쇼>는 인간 내면의 복잡함과 입체감, 신념의 발로, 타협과 갈등 등에 대해 탐구하는 데 할애했다면 더 좋았을 시간을 소모적인 게임과 폭력적인 벌칙에 대부분 할애하니까요. <오징어게임>에 등장한 게임처럼 게임 자체의 흥미도가 높은 것도 아닙니다. 권력관계의 형성 과정이나 계급 사회 자체의 생태를 깊은 통찰이나 해학 넘치는 풍자, 촌철살인의 코미디로 표현하는 데 역부족입니다.  

  


관음증 중독 사회

시리즈 내내 등장하는 쇼장, 제한된 공간은 8인의 캐릭터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확장됩니다. <더 에이트 쇼>를 보는 우리는 ‘나는 과연 몇 층 사람인가?’ 하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죠. ‘인간’이 아닌 ‘플레이어’로 ‘무대’에서 ‘쇼’를 하며 사는 우리들 삶의 축소판이니까요. 한국만큼 예능 관찰 버라이어티에 중독된 나라가 전 세계에 또 있을까요? 8인의 캐릭터의 쇼장 밖의 삶은 1:1 화면 비율로 바뀝니다. 인스타그램 1:1 화면 비율을 섞어 썼던 억압과 자유의 대비를 표현했던 자비에 돌란 감독의 <마미>(2014)가 생각나더군요. 쇼장 밖 현실이 ‘쇼’인가, 쇼장 안 게임이 ‘쇼’인가, 화면 비율의 변화로 감독은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쇼의 주최자는 바로 우리

<더 에이트 쇼>에서 이름조차 없이 익명의 ‘쇼하는 사람들’은 주최자를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최자를 향한 분노도 없죠. 이것이 <오징어게임>과의 분명하고도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더 에이트 쇼>에선 서로 죽여선 안 됩니다. 안전을 보장해서가 아닌 철저히 시스템 유지와 지속을 위함입니다. 서로를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려둬야' 서로를 착취해 부가 수익을 누리니까요. 승자독식의 서바이벌 게임 <오징어게임>보다 상생과 협력으로 기만하는 <더 에이트 쇼>가 현실적으론 더 잔인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더 에이트 쇼>의 참가자들은 주최자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기에 궁금해하지 않는 걸 수도 있습니다. 쇼의 초점은 보이지 않는, 누군지도 모르는 청중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이 쇼를 즐기는 시청자는 바로 <더 에이트 쇼>를 보고 있는 관객,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야말로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이자 주최자이니까요. 


 

깊은 통찰과 해학의 부재

더 좋은 작품이라면 ‘나는 이러한 시스템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만들 겁니다. 하지만 감독도, 참가자도, 게임을 하다 결국 목숨을 잃은 자도, 그를 떠나보내는 자도, 그 누구에게도 답이 없습니다. ‘라면’을 통해 한국인 특유의 공동체를 중시하던 시대의 향수와 오마주를 불러일으키지만, 2024년 한국 사회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비참함과 잔인함, 폭력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에게 우리 사회의 처참하고 잔인한 쇼를 한바탕 보여주고 낭만주의적인 상처를 핥는 식으로 <더 에이트 쇼>는 쇼를 끝낸 7인이 지속할 현실 세계를 비추며 흐지부지하게 끝납니다. 한재림 감독은 한국의 계급 사회와 썩어빠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컨텐츠가 차고 넘치는 시점, 왜, 굳이, 또, 이런 이야기를 들고 나왔는지, 경험 많은 영화감독으로서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고민하는 지적이고 의식 있는 아티스트로서 깊은 통찰과 해학을 보여줬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에이트 쇼>에는 계급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묘사하는 것 이상의 깊은 통찰과 해학은 부재합니다. 그래서 <더 플랫폼>이나 <기생충> <슬픔의 삼각형>과 나란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The Show Must Go On?!     

우리 모두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 무한경쟁 사회가 심화될 것이며 이에 따른 부작용과 한국의 어두운 미래에 대해 경고받고 배웠습니다.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는 교과서에 예고된 대로 점점 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가운데 아무도 쇼의 중단을 외치지 않습니다. <오징어게임>처럼 이러다 다 죽던가, <더 에이트 쇼>처럼 1층만 죽던가, 과연 우리에겐 선택권이 이것뿐인 걸까요? 우리는 대체 이 쇼를 언제까지,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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