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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12. 2024

드라마 한 편이 던지는 인문학적 질문

tvN 드라마 <졸업.>

   

안판석 감독은 세밀한 디테일과 서정적인 이야기, 유려한 장면들로 드라마를 마치 한 편의 문학 작품처럼 표현하는 예술가입니다. 더불어 한국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날카롭고 우아하게 들여다보는 인문학적 태도가 제가 삶을 대하는 결과도 잘 맞았습니다. 특히 드라마 <밀회>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참 좋았습니다.      


그런 안판석 감독의 5년 만의 신작은 20년 간 홍보 업계에 있다가 드라마 작가의 세계에 입문한 박경화 작가와 함께 했습니다. 장편 드라마가 처음인 작가라지만, 드라마를 보면 안판석 감독이 왜 신예 드라마 작가에게 작업을 함께 하자 제안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삶을 대하는 감독과 작가의 단단한 내공이 때론 세속적으로, 때론 우아하게, 깊은 농도의 능숙함으로 펼쳐집니다.        

             





조금만 참아대학 가면얼른 여기 뜨자.”      


늦은 밤, 수업을 마친 고등학생 딸아이를 학원 현관 앞에서 기다리다 피곤하고 말간 얼굴로 나온 아이의 가방을 받아 둘러메며 엄마가 하는 말입니다. 세속적 욕망이 들끓는 대치동에서 영향력 있고 돈 잘 버는 학원강사 서혜진(정려원)은 등급 올리기의 귀재로 소문나 승승장구해 왔지만, 요즘 애들이 쓰는 유행어는 잘 알아도, 제 또래가 뭘 하고 생각하고 사는지는 모른 채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시간표로 살아갑니다.      


10여 년 전,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다니던 법대를 휴학하고 시작한 학원강사 일로 내신 꼴찌였던 고3 준호(위하준)를 공부시켜 명문대에 보낸 게 혜진의 학원 커리어의 시작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하고 학원의 ‘명예의 전당’에까지 이름을 올린 준호가 어느 날, 혜진의 학원 신입 강사 채용에 응시합니다. 이후, 둘의 관계는 사제에서 동료로, 또 연인으로 발전하죠.     


“어른의 연애를 보는 것 같아 설렌다”라는 호평 속에 준호의 ‘행간 고백’이 어른들(?) 사이에 화제였습니다. 국어과 학원 강사인 혜진에게 준호가 비유와 은유에 직설적인 눈빛을 버무린 고백을 한 후, “행간 다 읽었죠?”라고 묻는 씬이었죠.      





하지만 대치동 학원가의 미드나잇 사제 로맨스로 드라마 <졸업.>을 섣불리 포장해 버리기엔 많이 억울합니다. 이 드라마는 한국 사회의 사교육 현실, 그 현실 속에 갇힌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과 학원강사의 욕망과 장사치, 한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신념에 대해 말합니다.      


드라마 초반, 혜진은 팀장으로 팀원 강사에게 상담 교육을 하는 장면에서 “요즘 학교에선 독서 활동이 학생부 평가 항목에서 빠졌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책 읽기를 권하는 건 잘못”이라고 조언합니다. 혜진이 생각하는 학원강사로서 최고의 실력은 최대한 많은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니까요. 혜진을 차갑고 냉정하다 말할 순 있어도, 교육자로서의 신념을 끌어들여 그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학부모들은 오히려 이런 이유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거니까요.      


그렇게 드라마 <졸업.>은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차단하고무조건 점수만 올리면 된다고 말하는 어른들바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뭐, ‘스승’이라도 되고 싶어서 그래?”      


혜진은 이따금 교육자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고민하지만, 언제나 냉정하고 바쁜 현실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족집게처럼 예상 문제를 짚어 주고, 다른 학원과 경쟁해 더 많은 수강생을 데려오려 애씁니다. 교육자의 철학, 신념 같은 걸 생각하는 순간, 혜진은 흔들리고 무너질 겁니다. 정글 같은 대치동 학원가에서 국어 시험 문제 지문으로 나오는 문학 작품과 작가에 인문학적으로 다가가는 방법을 가르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혜진이 오랫동안 애써 외면해 온 자괴감은 준호가 나타나면서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혜진은 준호에게 공부는 시험을 보기 위해, 대학을 가기 위해, 그래서 좋은 곳에 취업하기 위해 하는 거라 가르쳤고, 그렇게 내신 꼴찌였던 준호를 명문대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준호는 “돈이 최고”라고 외치며, 퇴직을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학원강사가 되어 “아버지도 못 가져본 강남 신축 아파트 계약서를 가져오겠다”라고 호언장담하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준호가 학원강사로 들어오며 혜진이 그동안 외면해 온 삶의 가치관에 진동이 일죠.


혜진은 준호를 통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보고 싶지 않았던 스스로의 속물근성을 마주하게 되고 “학원강사가 할 일은 무조건 많은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라며 오랜 시간 스스로 걸었던 주문을 복기하기 시작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요.   


                 




저에겐 이 드라마의 9-10회 차가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도 않은 이 드라마에 대해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죠. 드라마 초반, 혜진이 국어 시험 문제에 의의를 제기하며 학교로 찾아가 재시험을 요구합니다. 그때 강직하고 신념 넘치는 국어 교사 표상섭(김송일)은 동료 교사들이 모두 지켜보는 교무실에서 학원강사 혜진에게 모욕을 당하죠. 교권은 바닥에 떨어지고,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학교를 학원의 보조수단쯤으로 생각하는 한국의 아픈 현실이 표상섭 교사와 서혜진 강사의 충돌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혜진을 보고 입술을 떨며 “기생충 같은…”이라고 했던 김송일 배우의 연기에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10회에서 표상섭 교사는 끝내 학교를 나와 혜진의 경쟁 학원에 들어갑니다. 혜진이 한바탕 집고 난 후 교사라는 자존심과 신념으로 버티던 표상섭 교사가 무너진 거죠. 그리고 말쑥한 수트 차림으로 혜진의 학원을 찾아가 당황하는 그의 눈을 마주 보고 혜진이 자신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상기시켜 주죠.      






충격에 빠진 혜진은 경쟁 학원 원장 ‘백발마녀 서정연’(최형선)을 찾아가 왜 표상섭 교사를 꾀어 학원강사로 만들었냐고 따집니다. 이 장면 역시 압권이었습니다. 단조로운 학원 사무실 배경이 두 배우의 대립과 긴장감으로 화려하고 근사한 무대로 바뀌었거든요.      


“(표상섭 교사는) 학교에 있어야 할 분이에요”라고 말하는 혜진에게 서원장은 표정 하나, 토씨 하나 흔들림 없이 혜진의 뻔뻔하고 속물스런 모습을 조목조목 짚어줍니다. “표상섭 선생을 동료 교사들이 모두 보는 교무실 한가운데 매달아 놓고 신나게 때리며 망나니처럼 싸우고는, 싸움이 끝난 후엔 도덕책을 읊어대는” 혜진의 이중적이고 가식적인 모습을 날카롭고 비정하게 비판하죠.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들의 대화는 우주만큼 넓고 강력합니다.                     








드라마 <졸업.>은 한국 사회가 외면해 온 인문학의 종말이 불러온 현실에도 시선을 둡니다. 사학과 대학원생이자 준호의 절친 승규(신주엽)는 인문학자의 길을 걷는 자신을 스스로 비하하고 조롱하며 시니컬한 태도를 취합니다. 의대 재수를 위해 대학을 그만두는 사학과 학생들에게도 “좋은 결정 했다”라며 응원을 건넵니다. “왜 스스로 인문학을 조롱하고 비하하냐, 아무리 요즘 의대, 법대 아니면 대학도 아닌 것처럼 취급받지만, 이 인류가 이렇게 발전한 이유는 모두 인문학 덕분이다”라고 말하는 준호의 동료 강사 남청미(소주연) 앞에선 “사실, 난 공부 그 자체가 재미있다”라며 수줍게 속내를 드러냅니다. 남청미 강사는 승규를 ‘한심하고, 세상 물정 모르고 뜬구름이나 잡는, 돈 못 벌고 능력 없는 인문학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았으니까요.       

20여 년 전,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이미 ‘인문학의 붕괴’는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아니, 훨씬 전부터요. 인문학 관련 전공을 선택하는 건 마치 자살 행위처럼 치부되었습니다. 아니면 돈 많은 집 자식이거나. 취업의 관문쯤으로 치부되는 대학에 왜 이리 많은 돈을 내야 하는지 투덜거리면서 성의도 없고 능력도 없고 철학도 없는 교수들의 질 낮은 수업에 실망이 컸습니다. 이과는 ‘의대’ ‘공대’, 문과는 ‘법대’, 그것도 안 되면 선배들과 동기들은 행정고시, 외무고시, 언론고시를 준비했습니다. 3, 4학년 수업은 텅텅 빌 정도였죠. 그때부터 이미 한국 사회의 미래에 인문학 교육의 부재가 불러올 결과를 경고하는 목소리는 컸습니다다만아무도 듣는 이가 없었죠인문학이 종말을 맞으며 우리 사회는 인간이 아닌 괴물들로 넘쳐날 거라 떠들어대면서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학원 앞에 아이들을 줄 세웠습니다그렇게 우리는 그 결과의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교육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드라마 <졸업.>이 맘에 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학생의 시각을 존중감 있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부유한 가정 형편은 아니지만 전교 1등을 하는 시우(차강윤)의 맑은 눈빛과 공부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통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의대’에 가라고, 우리는 또다시, 여전히, 앞으로도 말할 수 있는지, 시우의 부모에게, 시우를 가르치는 교사, 그리고 한국 사회에 묻습니다.


덧붙여, 개인적으로 영화 <김씨 표류기>에서의 정려원의 연기가 지금까지 최고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드라마를 통해 순위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그녀의 연기 커리어 중 최고의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배우들은 작년 여름부터 현직 학원 강사에게 발성이나 자세, 판서 등을 배우고 연습했다고 해요.                      

        



<졸업.>은 사제 로맨스가 아닌 어른들의 성장에 대한 인문학적 질문을 담은 드라마입니다교사와 학원강사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교육자로서의 성장,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성장, 이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모와 선생이 오히려 아이들을 가르치며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혜진과 준호가 드라마가 전개되며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설레게 궁금합니다.      


인문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 <졸업.>을 통해 진정한 졸업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드라마 제목이 ‘졸업’이 아닌, ‘졸업.’, 그리고 마침표인 이유도 염두하며 드라마를 끝까지 따라가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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