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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16. 2024

조정석 | 깊이는 시간을 담보로 한다


“남의 말에 휘둘릴 필요 없다. 스스로를 믿어라.” 


MBC 수목미니시리즈 <더킹 투하츠>에서 근위대장 ‘은시경’이 국왕이 된 ‘이재하’에게 건넨 말이다. 현재 브라운관 속에서 진중하고 차분한 눈빛을 가진 ‘시경’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 조정석은 최근 관객 수 300만을 돌파한 영화 <건축학개론>(2012)의 ‘납뜩이’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해 뛰어난 연기력과 표현력으로 주연보다 주목받는 조연배우를 칭하는 ‘씬스틸러’라는 찬사를 받기 이전부터, 그는 뮤지컬 <헤드윅>(2006, 2008, 2011)의 ‘헤드윅’이었고, <내 마음의 풍금>(2008)의 ‘동수’였고, <스프링 어웨이크닝>(2009)의 ‘모리츠’였다. 뮤지컬 팬들이 작품에 대한 믿음을 갖는 데엔 조정석이라는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충분했고, 그 역시 그런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2004년, 뮤지컬 <호두까기 인형>으로 무대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배우 조정석이 만난 작품은 하나의 세상이고, 우주였다. 때론 뒤틀려있고 엉망이기도 한, 크고도 작은 세상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겪어오며 그는 배우가 되었다. 배우로서의 깊이를 얻기 위해선 시간이 담보로 되어야 한다는 삶의 비밀을 깨달은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단단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김희언, 뮤지컬해븐, 쇼노트, 흥미진진





하루가 다르게 번복되는 드라마 스케줄 때문에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일정 조절을 통해 매거진 마감을 3일 앞두고서야 비로소 마주하게 된 배우 조정석. ‘뮤지컬 무대에서 오랜 경험을 쌓아온 배우가 갓 진출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이슈로 조정석은 이미 수많은 매체들로부터 밀려들어오는 러브콜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터였다. 급박하게 진행되는 드라마 촬영 스케줄로 피곤할 법도 한데, 조정석의 또렷한 눈매와 밝은 미소는 인터뷰 내내 사라질 줄 몰랐다. ‘유쾌하고 다정하고 사려 깊은 사람’ 이미 그를 만난 적이 있거나 그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했다. 마침 파운드 매거진과의 인터뷰가 약속된 날, 영화 <건축학개론> 관객 수가 300만을 돌파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오랜 시간 동안 영화 데뷔를 꿈꿔온 배우로서 여러 가지 감회가 교차했을 순간이었다.






# 시간의 힘을 믿는 배우


고등학교 시절, 연기자가 아닌 음악가를 꿈꿨다고 들었어요.

사실 야마시타(Kazuhito Yamashita)나 카오리(Muraji Kaori) 같은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그들처럼 유명한 연주자이자 훌륭한 음악가가 되고 싶었죠. 


당시 국내에선 클래식 기타가 크게 각광받지 못했는데, 클래식 기타리스트를 꿈꿨다니 의외네요.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꿈꿀 때,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조명을 받는 걸 우선시하진 않잖아요. 사실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꾼 건 저에겐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자연스럽게 기타를 뚱땅거리고 있었고, 다니던 교회에 클래식 기타를 치는 형이 있었고, 그러면서 음악을 알게 되고, 음악가가 되고 싶었고,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또래 친구들 대부분은 일렉 기타리스트를 꿈꿨는데, 전 클래식 음악을 해보고 싶었어요. 단순히 훌륭한 스킬을 가진 기타리스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음악가가 되는 게 제 꿈이었던 거죠. 그 매개체가 클래식 기타였을 뿐이지. 


진지하게 음악가로서의 진로를 고민하고 대학입시를 준비했겠네요.
네. 그런데 두 번 낙방해서 삼수까지 하게 됐어요. 


연기 쪽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때까진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그저 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중학교 때 극기 훈련 장기자랑에서 잼(ZAM)의 ‘난 멈추지 않는다’에 맞춰 춤을 춘다거나, (웃음) 고등학교 때 댄스그룹을 만들어서 축제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거나, 교회의 성극을 통해 연기를 하거나 연출을 한다거나 하는 모든 것들이요. 


반응은 어땠어요?
반응 엄청났죠. 


‘내가 무대체질이구나’ 하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내가 이런 거에 소질이 있구나, 하는 생각은 못했어요. 그냥 재밌고 좋았는데 진지하게 생각은 안 해본 거죠.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어쩔 수 없는 ‘딴따라’ 기질이 저를 자연스럽게 이 방향으로 이끈 것 같아요. 


연기로 진로를 바꾸게 된 건 어떤 계기였어요?
삼수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였죠. 어느 날, 교회 전도사님이 갑자기 신촌 베니건스(웃음)에서 만나자고 하시는 거예요. 돈도 없으셨던 분이… 이상하다, 하면서 따라 나가 밥을 먹었죠. 거기서 전도사님이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연기에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연기해 볼 생각이 없느냐” 하고요. 전도사님의 말씀에 단번에 ‘아, 내가 정말 그런 재능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믿음이 많으셨나 봐요.
네. 저는 청년부 회장 출신입니다. (웃음) 


진로를 바꾸고 나서 다시 치른 입시(서울예대 연극과)에 덜컥 붙었어요. (웃음)
네. 


연극 무대가 목표였나요?
사실 연극과에 진학하면서 한 생각은 ‘내가 만약 배우가 된다면, 연기를 한다면, 영화배우를 해야지’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학교 들어가서 뮤지컬에 빠진 거죠. 


뮤지컬의 어떤 매력이 정석 씨를 사로잡던가요?
당시 <오페라의 유령>을 보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명을 받았어요. 스펙터클한 무대 장치와 조명,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내뿜는 에너지, 현장감, 100% 생(生) 라이브! 그런 것들이 한순간에 한꺼번에 저에게 확 와닿았어요. 학교에서 실제로 공연을 하면서 그런 느낌이 그대로 이어졌죠. 말 그대로 엄청난 마력에 빠진 거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뮤지컬 배우를 준비하게 된 건가요?
네. 반했으니까. 그래서 동아리도 ‘신체훈련동아리’로 옮겼어요. 배우는 몸도 잘 써야 되고, 몸을 잘 다스려야 하니까 그런 트레이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몸도 많이 쓰고 춤도 많이 추고 마침 우리 과가 또 연극과다 보니 자연스럽게 뮤지컬 작품도 많이 올리게 됐어요. 


배우로 무대에 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신체 쓰는 법이나 발성부터 노래로 연기하는 법까지, 구체적인 준비를 한 건가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던 건 아니었어요. 학교 입학할 때 ‘오로지 열심히 하자’는 결심을 했거든요. 힘들게 들어온 대학인만큼 내가 여기서 미친 듯이 열심히 하겠다, 했어요. 내가 여기에 발을 디디는 순간, 배우가 되는 훈련을 끊이지 않고, 놓지 않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노래는 이 정도까지, 발성 훈련은 이 정도, 그런 거 없이 정말 닥치는 대로 열심히 했던 기억밖엔 없네요. 


이십 대 초반, 배우를 꿈꾸는 시절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잘 못 볼 수도 있잖아요. 조급한 마음에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고 준비하기보단, 빨리 주목받고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집안 형편이 부유하지 않아서,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도록 빨리 돈을 벌고 싶긴 했었죠. 학교를 다녀야 했고, 학비를 제가 냈어야 했기 때문에 빨리 프로 무대에 진출해 연기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빨리 성공해야지, 멋진 스타가 될 거야, 이런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음악가를 꿈꿀 때도 그랬고, 배우를 꿈꿀 때도 그랬고, 멀리까지 내다봤나 봐요. ‘하다 아님 말겠다’가 아닌, ‘무슨 일이 있어도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하겠다’라는 생각으로.
그렇죠. 저는 무엇이든 단번에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도 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거죠. 깎이고, 깎이고, 깎여야 좋은 호흡이 나오는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뮤지컬 <헤드윅>



# ‘헤드윅’을 하기엔, 나는 아직 어리다


대학 졸업 후 첫 번째 프로무대 데뷔(<호두까기 인형>(2004)), 기억해요?
어우~ 최고였죠. 정~말 치열하게 오디션을 준비해서 배역을 맡고 무대에 섰어요. 정말 너무너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어요. 내가 작품을 하면서 돈을 받아 그걸로 생활을 하고, 계속해서 연습을 하고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어요. 


프로무대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내가 아직 멀었구나, 모자라는구나’ 지레 절망에 빠져 그 길을 포기하는 이들도 많아요. 정석 씨는 어땠어요?
내가 배우라는 길을 연습하고 훈련하면서 ‘이제 됐어, 준비됐어, 준비완료! 나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무대를 보여줄 거야!’라고 생각한다는 건 어리석은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있을 때 데뷔를 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아니에요. 물론 기본기는 탄탄해야죠.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한 만큼, 딱 그만큼만의 역량으로 데뷔를 했다고 한다면, 무대 위에서 공연하면서 동료 배우들, 선배님들로부터 배우는 건 천 가지가 넘어요. 제가 볼 땐, 배우로서 데뷔 전까지 배우고 준비하는 것보다 현장에서 배우는 게 훨씬 더 많아요. 그러면서 내가 가슴으로 느끼는 것들, 작품에서의 감정선이나 그림들이나, 동선이나, 그밖에 내가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연기적인 부분들은 진짜 현장에서 많이 배운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내가 이만큼의 능력을 끌어올려 데뷔해야지’ 하는 생각이 없었어요. 내 능력이 부족하니 못하겠다, 그만할래, 하는 생각도 없었고요. 단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충실히 이행했던 것뿐이죠. “너 왜 그거밖에 못하니?” 구박을 받아도, 그건 단지 그때뿐이에요. 오히려 나를 발전시키기 위한 채찍질이죠. 무대에 같이 서는 배우들이랑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함께 배우고 연기하면서 주고받는 모든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저를 발전시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줬어요. 


<헤드윅>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어요. 2005년 한국에서 초연된 작품인데 다음 해 ‘헤드윅’을 맡게 됐어요. 당시 뮤지컬계에선 ‘신인’이나 다름없었는데, 너무 ‘잘’ 해서 더 큰 주목을 받았죠. 조정석의 ‘헤드윅’이라는 캐릭터는 본인이 생각한 방향대로 잘 풀린 것 같나요?
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로, 내가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서툴렀지만 잘한 것 같아요. 


2006년, 2008년, 2011년, 세 시즌에서 ‘헤드윅’이 됐어요. 같은 역할을 오래, 자주 할수록 그 배역을 잘 알게 되고 깊게 빠지게 되면 오히려 혼란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헤드윅’은 정말,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에요. 중독이에요, 중독! 아마 ‘헤드윅’을 맡았던 다른 배우들 모두 느낄 거예요. 여전히 내가 부족한 것 같고, 모자란 것 같고… 모자라고 부족한 걸 채우기 위한 욕망 때문에 내가 ‘헤드윅’에 도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어느 순간 하게 되더라고요. 그 모자람이나 부족함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질 틈이 없어요 사실. 그걸 계속 찾아내고 싶어서. 그걸 잘 찾아내서 선사하고 싶어서, 관객들에게. 전 지금도 제가 ‘헤드윅’을 하기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요. 


‘헤드윅’은 배우 조정석에게 동경의 대상인 거네요.
네. 저에게 있어 ‘헤드윅’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는 거죠. 


세 번째 <헤드윅> 프레스콜에서 “헤드윅의 순탄하지 못한 삶에 공감한다. 세상에 나의 반쪽이 있다고 나 역시 믿고 있다. 세 번째 시즌을 맞아 공감하는 부분이 더욱 많아졌다”라고 했어요. 경계 위에 서서 자신의 자아를 찾고 괴로워하며 혼란스러워하는 ‘헤드윅’의 삶에서 조정석의 삶이 교차되는 부분을 발견하나요?
그렇죠. 또 그게 맞는 방향성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하는 연기는 제 삶에서 끌어오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아직도 ‘헤드윅’을 하기엔 어리다고 생각하는 거죠. 


제대로 된 ‘헤드윅’을 표현하기에는 배우 조정석은 아직 어리다?
‘헤드윅’의 순탄치 못한 삶을 표현하기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항상 그래요. 공연은 재밌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제가 재미있는 ‘헤드윅’을 관객들에게 직접 보여줘야 하는데, 제가 아무리 무대 위에서 우스꽝스러운 짓을 한다고 해도 어떤 연륜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연기에서 묻어 나오는 깊이가 다른 거거든요. 연기의 깊이는 연륜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연륜은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나는 거고요. 


앞으로도 조정석에게 ‘헤드윅’이라는 인물의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는 건가요?
그렇죠. 저는 늘 언제나. ‘헤드윅’은.  


헤드윅 'Origin Of Love'




MBC 드라마 <더 킹>



# 지금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펌프보이즈>(2007)에서 정석 씨의 순발력에 놀란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땐 저도 깜짝깜짝 놀랐어요. 빙의현상이 왔다고 할 정도로. (웃음) 


작품이 시작되기 전에 준비하는 경우의 수들이 있을 텐데… 연습하고 준비했던 것들 이외에도 자신이 모르는 능력들이 무대 위에서 마구 튀어나왔나 봐요.
<펌프보이즈>의 30%가 짜인 극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70%는 모두 애드리브이었거든요. 준비된 경우의 수는 언제나 있지만 그 경우의 수를 벗어난 엄청난 아이디어와 애드리브가 나올 땐 저도 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죠. 


그런 경험들이 지금 영화나 드라마 연기를 하는 데에 크게 도움을 주겠네요.
네. 그런 것 같긴 해요. 드라마 연기엔 정말 순발력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순발력을 갑자기 기를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동안 제가 알게 모르게 뮤지컬이나 연극 무대를 통해 순발력을 길러왔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요즘. 


작품수가 늘어갈수록 배우로서 단단해지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함께 늘어가고 있다는 걸 느끼나요?
그럼요. 지금도 항상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불안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리츠’ 역할을 맡았어요. 주연은 아니지만, 어찌 보면 이 작품을 상징하는 역할이기도 해요. 정석 씨가 맡은 역할 중엔 평범한 캐릭터보다 소외되고 상처받은 캐릭터들이 더 많아요. 그런 역할들을 주로 맡은 이유는 뭘까요?
일단 제가 느낄 때, 역할이 매력 있어야 해요, 재미있어야 하고. 이십 대 중반 이후부터 배우생활을 했는데 사실 그때는 좀 색다르고 파격적인, 남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캐릭터에 더 끌렸죠. 배우는 유니크한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끌리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오히려 그런 역할만 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배우로서 평범한 역할에 점점 매력을 느끼게 돼요. 그래서 요즘은 멜로물도 하고 싶고…. 


어떤 캐릭터를 맡든 잘 표현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배우에겐 필요하겠죠?
그럼요. 있어야죠. 자신감 없으면 연기 못해요. 


다른 인터뷰에서 “한참 캐릭터에 빠져 지내다 작품을 끝내고 그 캐릭터에서 헤어 나올 때, 캐릭터만 남고 자신은 없어지는 것 같다”는 이야길 했어요.
그런 느낌을 <스프링 어웨이크닝> 할 때 느꼈어요. 내 생활이 없다 보니 나는 점점 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공연 끝나면 인간 조정석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공연 끝나고 저녁 먹고, 다음날 아침, 점심 먹고 다시 공연장에 올 때까지, 계속 ‘모리츠’로 고민하고 생각하고… 어느새 점점 ‘모리츠’가 되어가고 있는 나를 느꼈어요. 조정석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고. 그땐 그래야만 그 인물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달라졌나요?
네. 지금은 달라졌어요. 내 인생이잖아요. 


극 중의 인물과 거리를 둘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게 잘 안 되지 않나요?
늘 고민해요 사실. 내 직업이 배우인데, 인간 조정석은 없이 늘 이 인물로 살다가, 또 다른 역할을 맡으면 또 그 인물로 살다가, 이런 걸 계속해서 반복하느냐. 아니면 조정석은 있되, 이 인물, 저 인물 말 그대로 ‘연기’를 하느냐. 때에 따라 다르겠지만, 늘 언제나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아직 뚜렷한 답을 얻은 건 아니지만, 후자에 더 가까워지고 싶어요. 전체적인 맥락은 같은 건데, 내가 얼마만큼 인물에 몰입했다가 빠져나올 수 있느냐, 얼마만큼의 거리를 둘 수 있느냐의 차이겠죠.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 자신만의 캐릭터를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게 배우라면, 배우 자체의 삶이 풍요로워야겠죠. 사랑도 해보고, 실연도 해보고, 별의별 일 다 겪으면서 인간 조정석으로서 뭔가가 쌓여야 캐릭터를 만났을 때 긍정적인 소스로 쓰일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이죠. 3개월 공연을 단독 캐스팅으로 가는 경우엔 어느 정도 공연이 안정권에 들면 공연 시간 이외의 시간은 내 시간이 돼요. 연애도 하고, 친구들 만나서 놀기도 하고, 그러는 거죠. 


캐릭터와 헤어지는 시간은 주로 어떻게 보내요?
작품이 끝날 때 가장 많이 드는 시간은 아쉬움인데, 그 아쉬움 때문에 뭔가 홀가분하면서도 뭔가 되게 찝찝한 느낌이 계속 들어요. 그런 감정들을 공연장에서 충분히 다 느껴요. 무대 철수 작업 하는 것도 보고. 그러면서 혼자 생각하고 느끼는 거죠. 그러면서 얻는 것들이 정말 많아요. 아~ 이건 뭐라 말로 표현도 못하겠어요. 그런 것들을 다 느낀 다음엔 쫑파티 끝나는 동시에 머릿속에서 다 지워버려요. 


어제까지 붙들고 살던 작품이 끝나고, 하루아침에 모든 게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허무함 같은 건 안 느껴요?

물론 있죠, 허무함이…. 없을 수가 없죠. 하지만 배우로서 감수하고 어쩔 수 없이 가지고 가야 하는 거겠죠. 



영화 <건축학개론>




# 배우가 가진 ‘제3의 눈’


뮤지컬과 연극 무대에 서면서, 언제쯤 영화나 드라마로 활동 영역을 넓혀야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요?
시기적으로 이때부터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해야지, 하는 건 없었어요. 공연하는 동안에도 영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미 약속된 공연이 있어서 못했던 경우도 있고… 공연은 영화보다 기획하고 준비하는 기간이 더 짧거든요. 약속된 공연이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영화를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제가 1~2년 동안 스케줄 아무것도 안 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타이밍이 잘 안 맞았던 것 같아요. 


이번엔 타이밍이 좋았네요?
네. 정말 운이 좋은 거죠. 


배우 조정석이 영화나 드라마로 진출한 시기가 늦은 감이 있다, 라고 아쉬움을 표현하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전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저는 지금이 딱, 적당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무대 위의 연기와 브라운관, 스크린 연기, 모두 해보면서 어떤 차이점들을 가장 크게 느끼나요?
아무래도 무대 연기와 카메라 연기의 차이겠죠. 무대 연기는 무대 위의 제 모습이 관객에서 오픈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그림 안에서 어우러지는 좋은 걸 보여드려야 해요. 그런데 카메라 연기는 카메라 앵글 안에서 모든 걸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죠. 카메라 연기는 지금도 현장에서 계속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뮤지컬은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작품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게 배우에게 맡겨지잖아요. 그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해 내는 건 관객의 몫이고요. 그에 비해 영화나 드라마는 배우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들이 직접적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되진 않죠. ‘지금 내가 카메라에 어떻게 나오고 있는 거지?’라는 카메라에 대한 의식이 연기에 방해가 되진 않나요?
내가 어떻게 보이고 있는가에 대한 의식은 무대 연기나 카메라 연기가 똑같아요. ‘제3의 눈’으로 연기하는 나를 바라봐야 지금 내 연기가 어떤지 인지할 수 있죠. 감정적으로 슬픈 연기를 하는 장면에서 내가 지금 슬프다고 마음속으로 계속 슬퍼만 하는 연기를 하고 있으면, 한마디로 객관적으로 내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하지 못하게 되는 거죠. 그냥 나 혼자 슬퍼하는 거지, 연기를 하는 건 아닌 거나 다름없어요. 그럴 때 ‘제3의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게 필요해요. 그래야 관객들이나 시청자들이 연기하고 있는 나와 같은 걸 느낄 수 있어요. 이건 정말 중요한 거예요. 


항상 연기할 때 ‘제3의 눈’을 생각하나요?
네. 제가 만약 탁자 위의 사이다를 마시고 나서 웃는다면, 누가 봐도 ‘아, 저 사이다가 맛있구나’ 하고 생각하겠죠. 바로 그런 눈이 필요한 거예요. 그 눈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든,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든 똑같은 거죠. 연기자에게는 항상 그 눈이 필요해요.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 관객들의 반응이 직접적으로 전해지잖아요. 관객의 눈빛이나 표정, 박수 같은 것들이요. 영화나 드라마는 편집 과정 이후,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통해 작품을 접한 관객들의 반응이 나중에 오는 거고. 그런 면에서의 어색함이나 거리감 같은 건 안 느껴요?
드라마는 배우가 연기한 장면들을 작가와 감독이 편집하는 거잖아요. 그 인물을 연기했으면 끝인 거예요. 제가 연기한 여러 장면 중 어떤 걸 쓰느냐에 대한 권한이 저에겐 없는 거죠. 그래서 사실 내가 연기한 장면이 어떻게 편집돼서 어떤 피드백이 올까, 하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어요. 하지만 제가 현장에서 연기를 하면서 ‘아,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게 연기를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감(感)’은 있어요. 그 감을 가지고 연기를 하는 거죠. 


공연이 시작되면 누구의 관여도 없이 ‘오직 배우에게만 주어지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뮤지컬만의 매력이 분명히 있겠네요.
그렇죠. 배우의 힘만으로 쭉 가야 하니까. 근데 무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이 상황엔 이게 제일 적절하겠구나, 해서 연기를 하면 이걸 무대 위에서 바로 받는 상대배우가 리액션을 하면서, 그동안 연습해 온 모든 걸 발휘해 앙상블을 만들잖아요. 연습한 대로 안되거나, 실수하고 어긋났거나, 그럴 땐 최대한 센스를 발휘해서 재치 있게 넘어갈 수 있어야 하죠. 극의 흐름상 관객들의 집중력이 한번 깨지면 다시 극에 몰입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니까요. 최대한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게끔, 실수가 실수가 아닌 것처럼 해야 한다는 면에서 카메라 연기와 맥락은 같은 거죠. 


영화 <건축학개론> 300만 관객 돌파, 축하드려요. ‘납뜩이’는 이제 자타공인, 명실상부한 <건축학개론>의 씬스틸러가 됐어요. (웃음) 그런데 한편으론 ‘납뜩이’라는 캐릭터가 영화보다 더 사랑받게 되는 게 작품에 있어서는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 생각은 감독님도 애초부터 갖고 계셨던 생각이에요. 그래서 편집할 때 조금 누르셨다고 하시더라고요. 


‘납뜩이’를 준비하면서 관객들에게 이 인물이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누구에게나 한 명쯤은 있을 법한 친구, 나보다 한수 위인 친구, 자신의 친구를 동생처럼 보는 친구… 이런 느낌들을 ‘납뜩이’로 살려내고 싶었어요. 


본인의 삼수 생활이 연기에 도움이 됐나요? (웃음)
그럼요. 도움 많이 됐죠. 그게 내 생활이었으니까. (웃음) 그렇다고 제가 ‘납뜩이’처럼 친구 데리고 “야, 키스라는 건 말야~” 이렇게 한건 아니지만, 재수생의 느낌은 잘 아니까요. ‘납뜩이’는 위풍당당한 아이예요. 재수생에 대한 자격지심 같은 걸 느끼는 애도 아니고.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정말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친구죠. 부모님이 가라고 하니까 대학은 가야겠고, 공부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자기가 대학 못 갔다고 대학생들을 부러워하는 애가 아니라는 거죠. 굉장히 쿨한 친구죠. 그러니까 재수하면서 고3이랑 연애하지. (웃음)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 자신을 믿는 배우


첫 영화 <건축학개론> 들어가면서,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았겠어요.
‘납뜩이’ 오디션에 많은 분들이 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내가 붙었으니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은 있었는데, 나에게 첫 영화이기 때문에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물론 이게 나에겐 첫 영화지만, 그동안 제가 쌓아온 필모그래피에선 언제나 ‘다음 작품’ 일뿐이니까요. 


<더킹 투하츠>의 은시경 역할은 어떻게 맡게 됐어요?
제가 처음 찍은 드라마 <왓츠 업>(2010) 송지원 감독님과 <더킹 투하츠> 이재규 감독님이 친분이 있으셨대요. 이재규 감독님이 <왓츠 업> 편집도 도와주시고. 그러다 편집본에서 저를 발견하셨고 <더킹 투하츠> ‘은시경’으로 캐스팅하신 거죠. 제가 ‘은시경’이라는 인물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셨대요. 


‘납뜩이’와 ‘은시경’이 같은 배우란 걸 모르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역할이 너무 다르니까 헷갈릴 수도 있겠죠. 사실 같은 배우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는 건 저에게 좋은 칭찬이에요. 상반된 인물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거니까요. 혹시 ‘납뜩이’와 ‘은시경’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그분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저 그 인물을 극 중의 인물로만 봐주시면 혼란이 없을 거라는 거예요. ‘조정석’이라는 인물을 중간에 끼워놓고 생각하니까 혼란스러운 거거든요. ‘이 역할도 조정석, 저 역할도 조정석’이 아니라 ‘이건 납뜩이, 저건 은시경’, 이러면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멘붕’이 별로 안 오지 않을까요. (웃음) 


완성된 대본 없이, 결말을 모르고 연기하는 드라마라 뮤지컬이나 연극에 비해 캐릭터에 몰입하는 게 더 어렵거나 하진 않아요?
공연은 사전에 전체적인 흐름을 알고 있지만 드라마는 모르잖아요. 그러다 보니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성격적인 면이나 인격상으로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상상력을 많이 발휘하게 돼요. 감독님과 계속 이야기하면서 연기를 하는 거죠. 하지만 그게 인물에 대한 몰입에 방해가 되진 않아요. 


오랫동안 꾸준히 공연 무대에 서다 영화나 드라마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어요. 뮤지컬이나 연극은 내가 좋아서, 돈을 지불해 티켓을 사고, 직접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건데, 드라마는 안방에 앉아 채널만 선택하면 볼 수 있는 거죠. 요즘 매스미디어의 힘을 톡톡히 느끼시겠어요. (웃음)
네. 배우로서, 나라는 배우를 많은 사람들이 알아간다는 건, 그리고 나에 대한 인지도가 넓어지는 건 정말 행복하고 환영할 일이죠.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일단 봐주는 사람이 있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연기하는 맛이 생기고 흥미와 재미가 더 생기니까. 예를 들어 내가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는데 한두 명이 나를 봐요. 그래도 물론 나는 그들을 위해 노래하겠지만, 한두 명보다 백 명이 응원해 주고 봐주는 게 더 좋은 거잖아요. 내가 연기하고 공연하는 걸 많은 이들이 관심 있게 봐준다는 건 배우로서 정말 엄청난 행복이에요. 나라는 배우를 사람들이 점점 알아가고 있다는 게 정말 좋죠. 


소위 말해 첫 작품에 ‘뜬’ 배우가 아닌, 그동안 꾸준히 준비하고 쌓아 올려 온 배우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 시간 동안에도 ‘나 연기 그만해야 하나?’ 절망했던 적이 있겠죠?
있었죠. 정말 힘들 때가… 배우 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그때 <그리스>(2005)를 하고 있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내가 재밌어서 연기를 시작했는데, 연기하는 게 재미가 없는 거예요. 내가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만 들고… 마치 내가 지우개처럼 갉아 없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을 때가 있었어요. 근데 자연스럽게 그 시기를 넘겼어요. 무대의 막은 다음날도 계속 오르고, 새로운 관객들이 다음날 또 찾아오니까. 그리고 제가 좀 긍정적인 면이 있긴 해요. ‘어느 일은 안 힘들어? 누구는 안 힘들어?’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아까 나온 얘기처럼 배우가 나이를 먹어갈수록 배우로서의 스펙트럼이 넓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나이가 드는 게 두렵지 않겠네요?
전혀요. 저는 이십 대 중반에 빨리 삼십 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삼십 대가 되니 배우로선 참 좋은데,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결혼하고 애 낳고 그러는 걸 보니까 자꾸 부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요즘은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대엔 언제쯤 돌아올 계획인지, 이 질문 많이 받으시죠?
사실 아직은 계획이 없어요. 제가 집중도를 중요시해서 뭔가 하나에 집중하는 걸 더 좋아해요. 당분간 영화와 드라마에 몰두하고 싶어요. 하지만 조만간 꼭 좋은 소식 알려드릴 거예요. 그리고 항상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게, 저한테는 영화든 드라마든 공연이든, 항상 ‘다음 작품’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공연을 할 수도 있고, 영화나 드라마를 할 수도 있는 거고. 


영화나 드라마의 캐릭터가 대중들에게 너무 강하게 각인되면 다음 작품에서 오히려 슬럼프를 겪는 경우가 있어요. ‘납뜩이’라는 캐릭터의 이미지 때문에 앞으로 작품에 지장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저에겐 복잡 미묘하고 예민하고 민감한 면도 있지만, 반대로 두루뭉술하고 단순한 면들도 있어요. 바로 이럴 때 제가 참 단순하단 생각이 들어요. 내가 다음 작품과 역할에 있어서 ‘납뜩이’의 이미지 잔상이 너무 크니, 그걸로 인해 방해받을 거란 생각? 물론 요즘 ‘납뜩이, 납뜩이’ 하니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요. 그렇지만 그래도 난 다음 작품에 그냥 충실하면 되지 뭐, 하는 생각으로 항상 결론이 나요. <건축학개론>에선 제가 ‘납뜩이’였지만 다음 작품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 그 인물로 보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스스로를 믿는 거네요?
네. 그게 절 단순하게, 그런 걱정이 안 들도록 만들어주죠. 


시간이 좀 더 흘러 나이가 든 후에, 그동안 해왔던 작품들 중 무대 위에 다시 서고 싶은 작품이 있어요?
제가 했던 작품, 제가 했던 배역들 모두 그래요. 또 다른 나이의 조정석으로 다 다시 해보고 싶은 작품들이고, 역할들이에요. 그만큼 제가 했던 작품과 배역들이 참 좋아요. 그래서 전 제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해요. 좋은 작품, 좋은 배역을 참 많이 만났죠. 앞으로 어떤 작품과 배역을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참여한 작품들과 맡은 역할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예요. 


앞으로도 좋은 연기, 조정석이 표현해 낼 수많은 역할들, 기대할게요. (웃음)
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웃음) 



조정석은 배우다. 뮤지컬 무대에서도 그랬고, 연극 무대에서도 그랬으며, 스크린에서도, 브라운관에서도 그는 배우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배우였다. 마치 인터뷰하고 있는 자신을 지켜보는 ‘제3의 눈’이 있는 것처럼 그는 에디터가 아닌 무언가 또 다른 것을 계속해서 의식하는 듯했다. 처음엔 그런 모습이 하도 부자연스럽고 어색해, ‘오늘 인터뷰, 뭔가 말렸다’하는 생각을 하던 에디터가 인터뷰를 마치고 든 생각은 ‘당연하잖아. 그는 배우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고, 살아갈 거니까’였다.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는 플랫폼을 확장하는 데에 있어 조정석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가 인터뷰에서도 강조했던 ‘배우로서의 연륜’을 꾸준히 쌓기 위해 그저 수많은 작품 속 캐릭터를 만나고 떠나보낼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자신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 쌓여온 연륜이라는 것이, 배우 조정석의 눈빛에 얼굴에 목소리에, 손짓에 행동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헤드윅’과 ‘모리츠’가 아닌, ‘납뜩이’와 ‘은시경’을 통해 조정석이라는 배우의 가능성과 진가를 이제야 알아본 이들이 있다면, 이제 조정석의 본격적인 ‘쇼 타임’의 시작을 지켜볼 차례다. 그는 이제 무대와 스크린, 브라운관, 어디서든 연기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관객들이 배우 조정석에게 보내는 믿음과 조정석이 자신 스스로에게 보내는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카드를 찾아내 보일 테니까.  



F.OUND magazine, May 2012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Behind Story

서른 넘어 늦깎이 피처 에디터로 데뷔해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 주위에서 아티스트와의 깊이 있는 인터뷰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도 칭찬을 많이 받아 ‘정말 내가 사람을 잘 구워삶는 타고난 재능이 있는 건가’ 착각이라도 하려는 무렵, 조정석을 만나 보기 좋게 깨졌다. 2012년 당시, <건축학개론>의 ‘납뜩이’는 신드롬을 일으켰다. 상상을 초월하는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와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성실했다. 인터뷰 질문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 스케줄을 미루면서까지 나에게 시간을 더 내어줬다. 


하지만 나는 손에 땀이 나고 어지러웠다. 영화, 드라마로는 신인이었지만 이미 뮤지컬 계에서는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고 있던 베테랑 배우인 그와 인터뷰 내내 숨바꼭질을 했다. 그는 반짝이는 눈과 미소에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절망에 가까웠다. 하나같이 옳은 말만 골라하던 그를 곱씹으며 내가 무엇을 놓쳤나, 또다시 혼자만의 숨바꼭질 이차전에 들어갔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들이 누군가의 실패와 좌절,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이루지 못한 욕망을 투영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아티스트에게는 더더욱. 


인터뷰 녹취록을 몇 번이고 다시 들어보니 이 세상에 조정석을 흔들고 좌절시킬만한 시련이나 고통은 없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나약하고 불안한 ‘모리츠’로 살던 시절, 자살 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는 그의 고백처럼 그는 배우로서의 삶에 깊게 잠식된 적도 있었고, 인간 조정석으로서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꾸만 누군가로 변신하고픈 중독에 빠진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왔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이미 시련과 고통을 수차례 겪고 그로부터 빠져나오길 반복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내공이었다.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 조정석이라는 배우를 탐구하는데 실패했다는 자괴감 서린 인터뷰에 배우와 팬들, 소속사가 극찬을 보냈다. ‘납뜩이’ 신드롬은 그를 1년 만에 안방극장 주연 자리에 데려다 놓았고, 인터뷰를 위해 이듬해 또다시 그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사실을 고백했다. 인터뷰 이후, 그에 관한 글을 쓰며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러자, 그가 말했다. “사실 배우가 아닌 사람 조정석으로서의 이미지가 노출되고 소모되는 걸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나란 사람에 대해 이미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배우 조정석이 맡는 역할을 궁금해할까요?”     


나는 조정석과의 인터뷰로 또 한 번 인터뷰어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찾지 말고, 아티스트가 하고픈 이야기를 들을 것. 


이후 해가 갈수록, 작품이 더해질수록 ‘떠오르는 스타’에서 ‘믿고 보는 배우’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의 한 장면을 기록하고 기념하는 사람으로 순수한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조정석 'The Origin of Love' <헤드윅> 넘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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