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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19. 2024

요조 | 왜곡된 어느 하나의 단면

Come, Closer.


지난 3월 말, 요조가 김광진의 ‘동경소녀’를 리메이크해 음원으로 발매한다는 소식을 접한 에디터는 드디어 그녀를 만날 구실이 생겼다는 생각에 반가웠다. 2010년 발표한 EP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이후, 이렇다 할 활동 없이 새벽 시간 방송되는 라디오 프로그램 <요조의 히든트랙>(KBS 2FM) 진행을 맡으며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트위터 프로필을 ‘동네 음악인, 동네 DJ’라는 소개글로 대신하고 있었다. “마치 수줍음 많은 두 사람이 소개팅하는 기분”이라는 실없는 농담으로 대화를 시작한 건 예상보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그녀의 모습에 걱정이 앞서서였다. 하지만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꺼내놓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수록 그녀는 웃음이 많고, 소탈하며 솔직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시간과 마음을 들인 대화가 끝난 후,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EDITOR 조하나 PHOTOGRAPHY 천윤기






# 그놈의 홍대여신


‘홍대여신’. 누구보다 이 수식어를 꺼려하는 건 당사자라는 걸 알기에 에디터가 내놓기 싫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인터뷰를 위해 시작부터 반드시 꺼내야 할 단어이기도 했다. 그녀에 관한 기사는 물론 그녀의 앨범을 홍보하기 위한 보도 자료에도 요조라는 이름 앞자리는 언제나 ‘홍대여신’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성 뮤지션이 가졌으면 하는 ‘여신’의 이미지와 자유롭고 독립적인 음악을 상징하는 ‘홍대’가 만났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수식어구인가, 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분명 그 이름은 요조 스스로 가져다 붙인 것이 아닌 우리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어쩌면 요조가 진정 하고 싶은 말들이, 하고 싶은 것들이, 원치 않은 수식어에 가려져버린 건 아니었을까. 



‘홍대여신’이라는 수식어가 이젠 익숙해졌을 법도 해요.
그게 저에게는 칭찬인 동시에 굴레였어요. 어쨌든 좋은 뜻으로 시작된 수식어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제가 드러내놓고 불편함을 내비치는 게 어쩌면 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움도 있어요. 그래서 일단은 “고맙습니다”라고 대답은 하지만 내심 그 수식어가 저에게 너무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불편한 점들을 떠올리게 되죠.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병을 선고받고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친다고 하잖아요. 처음엔 부정했다가 그다음엔 화를 내고, 체념하고, 감사하고, 받아들이고. 저도 마찬가지로 그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동안 하나의 과정을 겪은 것 같아요. 처음엔 어리둥절했다가 분노의 시기를 거쳐 결국 체념하고 자포자기했다가 어느 순간이 되니 그걸 제가 오히려 약간 개그처럼 받아치게 되는 거죠. “그래! 난 여신이니까!” 이러면서 제가 저 자신을 비하하고 그걸 웃기게 보이도록 내버려 두는 거죠. 확실히 제가 그 수식어에 염증을 느끼게 되면서 오랫동안 숨어 지내게 된 것 같아요. 앨범도 잘 안 내게 되고, 대외적인 활동에도 소극적이 되어가고. 그래도 한참 활동을 안 하니까 이제 좀 사그라지는 분위기인 것 같아요. 지금은 많이 무덤덤해졌어요. 사람들은 또 금세 잊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누군가가 추앙받게 되니까요. 


그 뒤로 ‘홍대여신’이라는 단어가 홍대 씬에서 활동하는 여성 뮤지션의 대명사가 됐잖아요. (웃음) ‘제2의’, ‘제3의’ 홍대여신이 계속해서 등장했고.
어휘 자체가 주는 순기능은 분명 있는 것 같아요. 그동안 집중받지 못했던 홍대 씬이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는 부분에선 충분히 환영할만한 일인 거죠. 하지만 제 개인적인 입장에선 부담의 연속이었어요. 


2004년 발매된 허밍어반스테레오 앨범에 객원 보컬로 데뷔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뮤지션을 꿈꿨어요?
아니요. 전혀 아니었어요. 대학 동아리에서 취미 삼아 음악을 하는 게 고작이었죠. 대학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하던 재즈바에서 함께 일하다 알게 된 친구가 허밍어반스테레오의 이지린씨였어요. 1년인가 지나서 지린씨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됐어요. 자연스럽게 동네 친구로 친하게 지냈죠. 어느 날 갑자기 그 친구가 “너 노래 잘해?” 하고 묻는 거예요. “응. 노래방 가면 80~90점은 나와” 했죠. 그러니까 그 친구가 자기가 만든 노래가 있는데 여자곡이니 가이드를 좀 불러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슬리퍼 질질 끌고 코앞에 사는 지린씨네 집에 가서 녹음을 했죠. 그런데 그걸 지린씨가 그냥 앨범으로 낸 거예요. 본의 아니게, 얼떨결에 데뷔 아닌 데뷔를 하게 됐죠. (웃음) 


그 뒤로 음악 활동이 이어졌나요?
허밍어반스테레오 앨범을 듣고 여기저기서 피처링을 해달라는 제의가 많이 들어왔어요. 그러면서 저도 취미로 하던 음악을 점점 진지하게 대하게 됐죠. 


그러다 어떻게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객원보컬이 된 거예요?
그것도 정말 우연이었어요. 사석에서 서로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채로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를 만났죠. 쭈뼛거리면서 “저도 예전에 앨범에 목소리 실린 적이 한번 있다”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거죠. 


허밍어반스테레오 객원 보컬로 참여했던 2004년과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를 만난 2006년 사이에 공백이 있었네요. 자신의 목소리가 앨범에 실린다는 것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아뇨. 너무 좋았죠. 허밍어반스테레오 앨범이 발매되고 그 매력에 빠져 음악 한답시고 휴학을 한 2년 정도 했어요. 아르바이트하면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공연도 했고, 오디션 같은 것도 많이 보러 다녔죠. 앨범 만들어주겠다는 사람을 만나서 작업하다 엎어진 일도 많았고.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많이 겪으면서 나중엔 거의 포기 상태였어요. 음악 하는 데에 있어서 마음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우니까 내가 직접 뛰어다니면서 함께 음악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야겠다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때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를 알게 된 거예요. 자연스럽게 공연 무대에 코러스로 올라가면서 같이 술 먹고 놀고 그랬어요. 그러다 민홍 오빠(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멤버)가 “내가 프로듀싱해줄 테니 네 앨범 한번 내보자” 해서 얼떨결에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 My Name Is Yozoh


2007년,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와 함께 작업한 정규 앨범 <My Name Is Yozoh with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가 발매됐다. 앨범 수록곡 중 여러 곡이 각종 CF의 러브콜을 받으며 달달한 일상을 노래하는 요조의 달콤한 목소리는 홍대 앞에서 나른하게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는 뮤지션의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졌고, 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오르내리며 수많은 이슈에 그녀의 이름이 연관되기 시작했고, 그녀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달콤한 노래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녀가 하고 싶은 노래는 그게 아니었다. 



첫 앨범 <My Name Is Yozoh with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나오고, 기분이 어땠어요?
감개무량, 그 자체였죠. 


앨범은 만족스러웠어요?
일단은 ‘드디어’ 앨범이 나왔다는 것 자체에 만족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게 저한테는 ‘드디어’ 나온 앨범인데, 친구들에게는 ‘이제야’ 나온 앨범이었던 거예요. 스무 살부터 음악 좋다고 소심하게 깨작깨작 하다가 스물일곱에 첫 앨범이 나왔다니까 친구들이 다 그랬어요. “이제야 앨범이 나오냐? 다 늙어서?” (웃음) 


그 앨범의 히트로 지금의 요조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네. 그렇죠. 저도 그렇고,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모두들 전혀 예상하고 기대하지 못했던 반응이었어요. 


그 당시, 뮤지션으로서 확신을 가졌어요?
첫 앨범 작업 땐 정말 멋모르고 신나서 재밌게만 했어요. 민홍 오빠(프로듀서)만 믿고 하라는 대로 했던 것 같아요. 제가 음악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 기회를 준 두 사람이 있는데 한 명은 허밍어반스테레오의 지린씨고, 나머지 한 명이 민홍 오빠거든요. 민홍 오빠가 프로듀싱한 첫 앨범이 나온 후 한참 활동하고 있는데 오빠가 그러는 거예요. “다음 앨범부턴 네가 직접 곡을 써봐.” 그때 저는 기타 연주도 못하던 상황이었어요. 작곡에 대한 기본 지식도 전혀 없는 상태였고. 그런데 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냥 무작정 믿고 시작했어요. 그렇게 요조만의 이름으로 만들어져 나온 게 정규 <Traveler>(2008)였어요. 


<Traveler> 앨범도 많은 사랑을 받았잖아요.
사실 <Traveler> 앨범을 낼 때까지도 개인적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앨범이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음악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뭔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작업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오히려 앨범을 내고 활동을 하면서 제 정체성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 같아요.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정체성이요. 내가 생각만큼 밝은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 말랑말랑하고 달콤하고 밝은 노래들을 많이 불렀잖아요. 제가 가진 목소리가 그러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노래들을 부른 건데, 시간이 갈수록 제 성향이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회사와도 약간의 마찰이 있기도 했고요. 


요조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노래를 불러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군요.
제가 곡을 써서 작업을 해가면 회사에선 너무 우울하다고 맘에 들어하지 않더라고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발랄함을 살리길 원했어요. 힘들더라고요. 그런 부분을 조율해야 하는 점이. 그러다 제가 좀 더 고집을 부려서 내온 앨범이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2010)였어요. 


전 그 앨범이 제일 좋던데요. 달달하기만 한 요조의 목소리가 성숙하고 쓸쓸하고 슬프게 들렸어요. 확실히 이전 앨범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목소리의 질감이었죠. 그런데 그게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아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저도 개인적으로 그 앨범이 제일 좋아요. 개인적으론 하고 싶은 걸 하니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고. 


요조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뭐가 뭔지도 모르는, 혼란스럽고 흔들리는 상태에서 만든 결과물을 예상과 다르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면… 겁부터 날 것 같아요.
그렇죠.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와 활동할 때부터 그랬어요. 부담을 많이 느꼈죠.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자신을 너무 사리게 된 것 같아요.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도 앨범 낸 지 2년이 넘었다는 채근에 못 이겨 낸 거였고. 압박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앨범을 안 내고 있지 않았을까 해요.  






#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사람이 가장 무섭다.’ 인터뷰 며칠 전, 요조가 트위터에 남긴 글이었다. 사람들의 한바탕 관심에 그녀의 트위터 내용은 이미 포털 사이트 검색어와 기사란에 오르내린 뒤였고, 결국 그녀의 계정은 비공개로 바뀌었다. 자꾸 움츠러드는 그녀에게 어떤 이는 위로의 말은 건넸고, 어떤 이는 비난과 야유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비겁하고, 여럿이 있으면 비열하다’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떠올랐다. 준비가 채 되기도 전에 너무 일찍, 너무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은 그녀는 지금, 그 거품들을 조금씩 떼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과 경험을 쌓아 부와 명성을 얻으려는 사람들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그녀는 가고 있었다. 사고로 친동생을 떠나보낸 2007년 이후, 그녀의 세상은 한순간에 그렇게 바뀌어버렸다. 


굳이 데뷔년도로 따지자면 뮤지션이 된 지도 10년이 다 되어가요. 예전엔 몰랐던 답들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나요?
아니요. 전혀 모르겠어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음악에 목숨을 걸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전 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낮은 편이기 때문에 제가 음악을 하든 안 하든 이 사회는 달라질 게 없고, 내 음악을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명감 같은 걸 가질 필요가 없는 거죠. 근데 노라조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요. 이 사람들은 듣는 이들에게 너무 밝은 기운을 주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음악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 거죠. 저는 그저 제 잉여로운 감정이나 주절주절 하는 거고요. (웃음) 


자존감 없이 주절주절 하는 요조의 음악에 위로받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럼요. 그런 분들이 있다는 거에 대해 감사하고 만족하고 있어요. 하지만 더 많은 앨범을 내고, 지금보다 더 잘 되어야지 하는 생각은 안 해요. 뭐라 그래야 하지, 야망이라고 해야 하나? 저한테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럼 곡을 쓰고 앨범을 내는 데에 있어서 요조의 음악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전혀 동기부여가 안 되겠네요.
사실 대중이나 팬들로부터의 동기 부여는 전혀 안되고요. 전 그냥 제가 곡을 쓰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되는 것 같아요. 


혼란스러운 가운데 낸 1집의 반응이 굉장히 컸고, 회사와 여러 관계자들, 이 씬의 사람들과 만나고 활동해 오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외부적인 요소들에 의해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괴리감을 크게 느꼈나요?
네. 많이 끌려 다녔죠. 지친다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이런 얘기가 어쩌면 되게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을 텐데… 전 제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좀 지워지길 기다렸어요. 


새 앨범이 나오면 다시 기억나지 않을까요?
절 좋아해 주시는 분들은 그렇겠죠. 어쨌든 거품은 걷히지 않을까 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 그걸 거품이라 생각하고, 그게 걷히길 기다렸다고요?
당연하죠. 진짜 내 음악을, 나를 좋아해 주는 게 아니라 타이틀적인 부분이나 홍대, 인디 열풍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 때문에 그냥 ‘쟤가 요즘 인기 있다니까’ 해서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요. 보이는 모습이나 트렌디함을 따라가기 위해서요. ‘홍대’, ‘인디’도 하나의 트렌드가 된 거겠죠. 제가 좀 숨어있고 안 보이면 그런 게 조금이라도 걷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지금은 그런 거품이 좀 걷힌 것 같기도 하고…. 


본인이 자처한 상황도 아닌데 굳이 숨을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좀 멍청한 거죠. 경우에 따라선 이 대중적인 인기를 이용해 다른 걸 챙길 수도 있었을 텐데… 회사에서도 그런 걸 바랐고요. 부모님도 친구들도 그래요. ‘이거 다 한 때다. 지금 바짝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야 한다. 네가 언제까지 이렇게 인기 있을 것 같냐?’ 사실 그런 얘기 들으면 솔직히 불안하기도 하죠. 노래를 하면서 번 돈으로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런 것도 포기할 만큼 지치고 힘들더라고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언제부터였어요?
<우리는 선처럼 가만히 누워> 발매한 이후, 회사와의 계약 기간이 반년 정도 남아있었어요. 회사에서 분명 원하는 부분이 있고, 저도 어느 정도 맞춰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걸 제가 못해주고 있다는 스트레스도 분명 있었거든요. 계약이 끝나고 좀 쉬고 싶다고 회사에 이야길 했죠. 다른 곳에서도 제의가 들어왔는데 모두 고사하고 혼자 지냈어요. 


새로 옮긴 레이블(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은 어떻게 인연이 닿았어요?
제가 회사를 나와 혼자 있을 때 일을 봐주던 매니저 친구가 지금 회사로 들어갔어요. 자연스럽게 그 친구 따라서 들어간 거죠. 정말 허무하게도, 이유는 그거예요. (웃음) 이 친구는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왔고, 제 성향이나 성격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앨범을 내고 활동을 하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부담을 주지 않아요. 그래서 이 회사로 들어오게 된 거고요. 


숨어 지낸 시간들이 많은 도움이 되던가요?
앨범을 내고 음악 활동을 하면서 받은 인기나 저를 둘러싼 이미지들이 저에겐 너무 과분하거든요.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더 잘해야지’, ‘더 벌어야지’ 하는데, 전 지금도 충분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 음악을 많이 사랑해 주시는 것과 길 가다가 누가 날 알아보는 건 분명 다른 문제예요. 길에서 담배도 못 피고, 남자친구랑 뽀뽀도 못하잖아요. 가끔씩은 저도 술 마시고 꼬장을 부릴 수도 있는 건데…. 


그런 게 너무 싫어서 극단적으로 ‘에이, 나 음악 안 해’ 하고 도망가고 싶은 적은 없어요?
아니요. 그런 적은 없어요. 너무 좋아하니까. 


음악이 요조 자신에게 구원이 되어주나요?
네. 많이, 아주 많이요.





# 희극과 비극을 오가며


한번 무너져 내린 세상은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고 인생은,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요조 자신에겐 허무, 그 자체였다. 지금 하는 모든 것과 앞으로 하려는 모든 것들로부터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그런 고통과 방황과 혼란과 함께 삼십 대를 맞이한 요조의 목소리는 더욱 깊어졌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망에 맞설 힘이 없어 결국 자포자기하다, 끝내 자신을 자책하고야 마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하지만 비극은 희극의 또 다른 단면이었다. 아무리 힘들고 죽겠다고 해도 배가 고팠고,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조소를 보낸다. ‘그래도 네가 살아야지, 뭘 어쩌겠어’ 하는, 스스로를 위한 작은 위안이다. 그렇게 그녀는 세상을 껴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간다. 


1집과 EP 앨범을 비교했을 때, 가사도 그렇고, 목소리도 그렇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많이 달라졌다는 걸 스스로 느껴요?
네. 되게 우울해졌죠. (웃음) 실제로도 1집을 만들 땐 연애를 해도 마냥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전체적으로 슬픔이 지배하는 것 같아요. 이젠 연애를 해도 어느 선 이상을 넘어갈 수 없는 한계가 느껴지죠. 사실 그건 누구나 알고 있는 거거든요. 저한테 유독 그 감정이 특별하게 꽂혔나 봐요. 남들은 다 알고 있는 감정이라서 ‘원래 사랑이 그래, 인생이 그래’ 이러고 그냥 넘어가는 건데 저한텐 그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던 것 같아요. 계속 걸리고, 슬프고… 그래서 그런 감정이 들어간 노래가 계속 나오게 되고…. 


나중에 앨범을 되돌아보면 그때 당시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주겠네요.
지금도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랑 낸 앨범 들으면서 그래요. “와! 대박! 고민 하나도 없는 완전 초딩! 조증 환자!” (웃음) 


친동생을 떠나보내고 나서부터 삶에 대한 가치관이 많이 변했다고 들었어요.
사실 아직까지도 그 힘든 시간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다들 삶에서 조금은 느끼고 살고 있을 ‘부질없다’는 경험을 저는 너무나도 심하고 강력하게 겪은 것 같아서… 가끔 제가 뭔가에 발동이 걸렸을 때 오히려 제 발목을 잡기도 해요. 뭔가 추진력 있게 해 봐야지, 하다가도 ‘에이, 부질없어’ 하게 만드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자유롭게 놔주고 소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찾자는 생각으로 바뀌게도 했잖아요.
그렇죠. 욕심부리지 않고, 큰 거 바라지 않고. 지금 주어진 환경에서 행복하게 사는 게 좋다고 생각하죠. 


그러다 또 어쩔 수 없는 외로움에 맞닥뜨리면 다시 힘들어지기도 하고….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고 뭘 더 많이 안다고 해서 현명하게 대처하게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외로움도 같이 태어나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데, 내가 이 그림자가 싫다고 어둠 속에 들어가도 그 그림자는 어두워서 잠깐 안 보이는 것뿐, 어쨌든 여전히 있잖아요. 이젠 미운 정든 친구다, 생각하면서 마음을 좀 편하게 먹긴 했지만 그렇다고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성인군자처럼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에요. 전 힘들면 술 많이 먹고, 잠을 많이 자요. 밥도 안 먹고 잠만 자면 살이 쪽 빠지죠. 


그러면 좀 나아지나요? (웃음)
그냥… 피폐해진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 배고파서 먹게 되는 거죠. 참 웃긴 거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요. 내가 아무렇지 않을 땐 일상이 지겹게 느껴지지만, 나 자신이 피폐해진 순간엔 오히려 그 일상이 나를 다시 정신 차리게 잡아주는 것 같아요. 라디오 DJ 하고, 이거하고 저거 하다 보면 보통 때처럼 또 견딜만해지는 거죠.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있어요 지금. 


어떤 작은 시도라도 해본다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의미일 거예요.
그렇죠. 저도 자기애가 유독 심한 거 같아요. 상처 안 받으려 본능적으로 사리게 되고, 또 한편으론 내가 못되게 굴면서 ‘네가 잘못한 거야. 난 원래 이래’ 하면서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그렇지 않다는 걸 또 내가 모르는 건 아니고. 그러면서 나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고. (웃음) 


그때그때마다 그런 인생의 장면들을 음악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건 뮤지션으로서 참 행복한 일이겠어요.
그럼요. 저도 그게 참 감사해야 할 일이구나 생각해요 항상. 


뮤지션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악으로 수익을 낼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 수익으로 음악을 해서 또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순환이 잘 이뤄져야 하고. 뮤지션으로서의 미래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 같은 건 안 해요?
사실 그런 부분을 걱정은 하지만 진지하게는 생각 안 하는 것 같아요. 저한테는 약간 뭐랄까.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삶의 또 다른 모습은 죽음이라는 생각이 항상 가까이 다가와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분명 제가 앨범을 내고 활동을 하는 게 경제적인 이유와 관련이 있긴 하겠지만 애써서 굳이 미래를 준비하고 고민하진 않아요. 


다음 앨범은 언제쯤 나오게 될까요?
딱히 꼬집어 언제라고 말하기보단… 몸이 달아야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연애를 안 하면서 ‘외로워, 외로워’ 입으로만 얘기할 때가 있잖아요. 외롭긴 한데 딱히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거죠. 자신이 절박해지면 어떻게든 연애를 할 거예요 아마. 저도 언제든 앨범을 내고 싶죠. 하지만 아직까진 몸이 달지 않은 것 같아요. 앨범을 내고 싶어 못 견디는 순간이 찾아오겠죠. 


곡을 쓰고 연주하고 노래를 들려주는 과정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건가요?
저는 좀 이기적인 것 같아요. 음악 하는 행위 자체는 저를 위한 거예요. 행위 자체는 그런데, 제가 만든 노래들이 앨범으로 발매되어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는 순간, 더 이상 그건 제 것이 아닌 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떤 노래가 어떤 사람에게 각별해지게 된다면 그 사람 노래가 되는 거죠. 옛날 노래 들으면 그 순간의 감정과 냄새, 추억, 사람이 생각나잖아요. 그럼 그 노랜 그 사람의 것이 되는 거예요.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그 감정을 모를 거 아니에요. 그 냄새와 추억을 절대 모르죠. 오직 듣는 사람만 아는 거죠. 제 노래도 누군가의 것이 될 거고, 저는 알 수 없는 거겠죠. 노래를 써야겠다는 동기나 노래를 만드는 과정, 앨범이 발매되는 순간, 앨범으로 돈을 버는 사람, 여기서 형식적인 주인은 내가 되지만 실질적인 노래를 가져가는 건 결국 내가 아니고 그 노래와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 누군가인 것 같아요.




F.OUND magazine, May 2012

이 콘텐츠의 모든 저작권은 파운드 매거진과 조하나 에디터에게 있습니다.




Behind Story


요조와 나


이십 대는 홍대 클럽 거리에서, 삼십 대는 독립 잡지 피처 에디터로 홍대 인디 씬을 탐색했던 나에게 요조는 의미 있는 인물이었다. ‘아이돌’이 한국 음악 시장을 잠식해 가던 때 개성 있고 다양한 인디뮤지션의 세계는 그저 ‘홍대 감성’쯤으로 소비되었고, 그중에 얼마 없는 인디 여성 뮤지션은 ‘홍대 여신’으로 불리며 마케팅에 이용됐다.


‘홍대 여신’이라는 타이틀로 소비되던 자아로부터 일탈을 꿈꾸는 여정을 지나고 있던 당시의 요조와 나의 여정이 맞닿았다. 만나는 순간, 우리는 같은 결을 지닌 사람임을 알아차렸고, 좀처럼 인터뷰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던 그녀가 아주 오래도록 나와 대화를 나눴다. 


나는 사실, 요조를 만나 인터뷰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단순하게, 그녀의 이름은 ‘요조숙녀’에서 따온 것이리라 짐작했다. 두 시간에 걸친 그녀와의 대화 끝에서야, 요조라는 이름이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 실격>에 등장하는 ‘오바 요조’에서 따온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를 오가며 익살과 위선의 가면을 쓴 채 광대를 자처하며 그저 약하디 약한 존재로 살아가는, 당신의 모습이기도, 또 내 모습이기도 한 ‘요조’.


그녀는 작은 책방을 운영하며, 여전히 글을 쓰고 노래를 짓고 부르며, 자신만의 작고도 단단한 세계의 확장을 계속한다.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담담하게 세상에 꺼내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조차 생각하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사뿐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성실하게, 요조는 삶을, 산다. 


요조 EP <이름들> ‘Tommy’



요조 EP <이름들> ‘Unknown Ho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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