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임기 초임 한 인문학자가 말했다. “그는 지금 할 일은 많고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는 대통령 일을 하기 싫어 죽을 맛이다”라고. 하지만 그가 그 자리를 박차지 못하는 건 “대통령직에 따른 막대한 권한과 특혜, 즉 권력의 맛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스트레스 관리가 안 되는 대통령
온 국민이 알다시피 윤석열의 스트레스 관리 방법은 음주다. 막대한 스트레스와 압박 속에 살아가는 대통령이 그것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면 외부의 비판에 대한 과민반응이나 신중하지 못한 부적절한 대응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크고 작은 실수들이 터진다. 그럴 때마다 대통령은 주변 사람들과 참모를 탓하고 늘 격노하며 스스로 신뢰와 리더십을 일게 된다. 윤석열 정부의 ‘돌려 막기’ 인사는 현 정부의 말로를 내다본 수많은 이들이 정부 요직을 고사하기 때문이며 행정 비리나 실수가 드러나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정부의 분위기 탓에 말단 공무원 사회까지 태만과 무책임으로 가득하다.
소위 ‘중도’라 일컫는 사람들이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나라가 바뀌냐’라며 정치에 무관심한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을 쌓으려 하지만, 마트에서 들어 올린 대파 한 단의 가격부터 갑자기 아픈 아이를 안고 응급실로 뛰어갔지만 몇 시간째 진료를 받지 못하는 가슴 미어지는 상황, 교실의 아이들이 교육받는 역사, 수십 년간 지켜온 한 나라의 가치관과 철학 등이 제왕적 대통령제인 대한민국에선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바뀐다.
“지지율 따위에 연연하지 않겠다”라고 큰소리치던 윤석열도 최근엔 30% 콘크리트 보수층을 위한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불과 몇 년 후엔 인간보다 1,000배 이상 똑똑하고 능력을 갖춘 AI가 등장하고 인간의 화성 이주 계획이 현실화되고 있는 2024년에 대한민국 대통령은 ‘반국가세력’ ‘전체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만 외치고 있다.
⬆️ 2024년 을지연습 이틀째인 20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케이스포(KSPO)돔에서 다중이용시설 테러 대응 훈련이 진행돼 소방 관계자들이 ‘공산당 아웃’이라고 적힌 팻말을 목에 걸고‘단결투쟁’이라고 적힌 끈을 머리에 맨 시민을 구조하고 있다. ⓒ 한겨레신문 김영원 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강한 자기애와 약한 자존감, 법 집행자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심리적 방어 메커니즘이 결합된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리더십 스타일과 행동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높은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을 때 자기 방어적이고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이는 말로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윤석열 재임 기간 내내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는 정치적 압박과 스트레스, 불안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윤석열은 현재 높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리그레션(Regression, 퇴행)’이라는 방어 메커니즘이 활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합리적이고 신중한 판단보다 본능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그의 리더십 스타일에서 나타나는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의사 결정을 설명한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에서 윤석열은 더욱더 자신의 사익과 입지를 강화하는 결정을 내리거나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도 더욱 강경한 정책을 펼칠 것이다.
늘 옳지는 않지만 늘 확신에 찬 사람들
윤석열은 어릴 적부터 그를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훈육했던 가부장적 ‘교수’ ‘아버지’, 9수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검찰에서 평생을 보내며 만난 수많은 피의자와 범죄자들, 정치 검사들, 또 그들과 유착된 비위 공무원들과 국회의원들, 그리고 그를 계획대로 권력의 자리에 앉혀 호시탐탐 제 주머니를 채우기 바쁜 농단 세력에 둘러싸여 있다. 모두 하나같이 ‘늘 옳지는 않지만 늘 확신에 찬 사람들’이다. 각자 필요한 것들의 아귀가 완벽하게 맞아 들어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하는 이들의 상호보완관계 속에 한때 ‘적폐청산’에 앞장서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검사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어 중심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은 하루하루 저만큼씩 퇴보하고 있다.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마음으로 챗GPT에 물었다.
“그럼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해?”
물론 챗GPT스러운 답이 나왔다. 헌법적 근거를 들어 대통령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했을 경우,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대통령 탄핵안 발의와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되며 이후 헌법재판소가 탄핵 사유가 적법한지 여부를 판단해 최종결정한다. 인간이 만든 이상적인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밟으라는 챗GPT의 말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현실적으로 지난 총선에서 야당이 크게 이겼으나 200석 이상을 확보하지 못한 건 여전히 ‘윤석열을 지켜보겠다’라는 사람들이 그래도, 여전히, 상당하다는 의미이다. 대통령이 일을 ‘매우 잘못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국민이 60%에 육박하지만 우리 모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촛불혁명으로 전 세계가 극찬하는 평화적 정권교체를 만들어 시민이 정치를 변화할 수 있다는 경험을 쌓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이후 한국 사회가 겪은 지속적인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갈등에 대한 실망과 피로감이 너무 컸다. 이건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 매우 크다.
윤석열이 위반한 헌법과 법률은 수두룩하나 하루하루 이슈가 이슈를 덮어 사람들은 이제 만성 무기력감에 빠졌다. 박근혜 정권 때 ‘헬조선’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무의식적인 무력감과도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언론 역시 입을 다물고 해야 할 질문을 하지 못하며 기자의 일을 했다는 이유로 무참한 수사와 압수수색에 시달리는 선배‧동료 기자들을 보며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루하루 다짐한다.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일 때 목이 닳도록 외치던 ‘공정과 상식’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낸 내부고발자들은 온 세상에 벌거벗겨지고 조롱당한다. 현재 대한민국 20대의 70%가 정치 뉴스를 피한다고 답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각자도생 하며 점점 더 이기적이 되어가고 무관심해지고 무감각해지는 세상. 윤석열이 바라던 바다.
한국 사회는 유난히 정치와 정치인에 너무 큰 권력을 준다. 사회를 이끈다는 ‘오피니언 리더’와 엘리트 지식인, 레거시 미디어는 모두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며 제 안위만 챙긴다. 박근혜 정권엔 수백 장은 나붙었던 대학의 대자보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생들은 더 이상 정치와 사회문제, 국가정책, 미래에 대해 토론하지 않는다. 아무도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나라에서 반 세기만에 선진국의 반열에 든 대한민국의 다음 스텝이 네오나치즘이 득세하고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미국이나, 양극화로 갈등하다 끝내 폭동에 이른 영국이나, 품위도 방향도 잃고 점점 더 우경화되는 일본이나, 오만하고 모순적인 이스라엘이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러시아와 같아지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챗GPT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대자보를 쓰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상식적이고 정의로운 가치 판단을 위해 공부하고, 읽고, 쓰고, 목소리를 낸다. 이것이 챗GPT와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또다시 매몰되지 않을 것이다.
이래 봐야 당장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일제강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며 바위에 글자 하나하나를 세긴 사람들은, 또 다른 독재자의 횡포를 막으려 길 위에 선 광주 시민들은, 다음 세대가 제 손으로 직접 투표해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하려고 군인들 앞에 나선 보통 사람들은 모두, ‘이래 봐야 당장 바뀌는 것도 없는데’라고 핑계 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