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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Sep 23. 2024

10. 결핍은 결핍을 낳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꼭 두 사람만을 위해 우주가 켜놓은 조명처럼 부드러운 달빛이 내려앉았고 파도 소리마저 숨죽여 조용히 부서지고 있었다. 키스하지 않고 지나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순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벤은 마치 갓 태어난 아이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천천히 입을 맞췄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는 하나로 겹쳐 모래사장 위의 그림이 되었다. 그의 입술에선 쌉싸름한 와인 맛이 났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났다. 이 섬에선 아무도 그녀를 모르고 판단하지 않는다. 세상에, 이 낯설고 외딴섬에서조차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다니. 괜찮다, 괜찮다, 그녀는 이 말을 머릿속에 반복했다.      


 기다랗게 바닥까지 늘어진 그녀의 비치드레스는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하는 바닷물에 젖어 들어 조금씩 무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끝내 그녀의 허리를 감싸던 그의 손은 등으로 올라가 어깨를 타고 가슴으로 내려갔다. 빌어먹을, 그놈의 가슴! 괜찮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는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그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입술을 떼어내며 말했다. “미안.” 왜 미안해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지만, 그녀는 그냥 그렇게 말했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이어가지 못할 때면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사과했다. 그는 당황하지도 언짢아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왜 그러냐고 닦달하지 않았고, 자신이 뭔가 잘못했는지 되물으며 그녀를 곤혹스럽게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게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 무관심이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든 무엇이든 간에 그에게 고맙고, 또 다행이라 여겼다.    

  

 하나였던 둘의 그림자는 다시 둘로 나뉘었지만,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푸른 달빛을 걷고 시작하자 일그러진 하트 모양이 모래사장에 그려졌다. “나는 며칠 후면 떠나.” 먼저 침묵을 깬 건 벤이었다. 그는 또 다른 다이버 친구들이 있는 보라카이 섬으로 갈 예정이라고 말했고, 그녀가 원한다면 함께 가고 싶다고도 했다. 그녀는 그가 원한다면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 스스로 온전히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그 자유, 그리고 그걸 자기 걸로 만들어 낸 그의 운명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태어나 지금껏 그녀는 늘 소속이 있었다. 가족, 친구, 학교, 직장, 사회, 그 모든 것에서 살짝 빗겨 난 적은 있었지만 벗어난 적은 없었다. 벤은 일찌감치 그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있었고 망설이지도, 후회하지도 않았다. 지금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세상을 모두 품은 듯한 생기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그의 얼굴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녀는 벤의 자유가 탐났지만, 그녀는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님을 알았다. 벤을 따라 또 다른 섬으로 갈 수는 있겠지만 그녀는 곧 그의 자유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다 못해 끝내는 집착으로 치닫게 될 거라는 것도.     


 “나는 여기 바닷속에 더 있어 보려고. 그동안 살면서 막연하게 찾아왔던 게 바로 거기 있을지도 모르겠더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조금 더 선명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의 손을 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론 모래사장에 끌리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그녀는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섬의 서쪽 해변을 따라 하염없이 걷던 둘은 이내 걸음을 멈췄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해변 길은 남서쪽 코너를 끼고 늘어선 커다랗고 넓은 리조트에 가로막혔다. “아쉽다. 이 건물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섬의 가장자리를 따라 무한하고 반복된 원을 그리며 끝없이 걸을 수 있을 텐데….” 그녀는 농담처럼 들리게 가볍게 말했지만, 무엇보다 진심이었다. 조금 전 키스를 하다 그녀의 신호로 모든 게 정리된 순간부터 사실 그녀는 오늘 밤이 반드시 섹스로 이어져야 한다는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벤이 그녀를 더 이상 서로의 욕망을 채우는 대상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보길 바랐다. 그렇다면 둘은 어떤 대화든 끝없이 밤새 나눌 수 있게 될 거라고 믿었다. 이렇게 헤어지면 그녀는 그를 더 잡아두기 위해 가슴 위로 그의 손을 허락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사람, 특히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 예외는 없다는 사실에 체념을 반복할 것이다.     

 

 벤은 자연스럽게 걷던 방향을 반대로 돌려 서고는 그녀를 보고 찡긋하며 말했다. “괜찮아. 이번엔 파도를 왼편에 두고 반대로 걸으면 되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든 여전히 우리가 바닷가를 걷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들만 골라서 하는 걸까. 그녀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엔 자신에겐 없는 뭔가 특별한 보석이 박혀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자신의 마음은 늘 볕이 들지 않아 곳곳에 눅눅함과 서늘함이 서린 지하 한구석 같았다. 세상이 딱 잘라 그곳은 나쁜 곳이라 머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외로운 금기의 공간. 그래서 그녀는 태어나 지금까지 자기소개서의 성격란에 ‘명랑, 쾌활’이라고 의무적으로 적어 왔지만, 언제나 밀려드는 죄책감마저 그녀 자신만의 비밀이 되었다. 늘 무언가에 발가락만 담그기보단 빠져들라고 말했던 태훈은 그래서 그녀에게 부담스럽고 버거웠다. 결국 그녀는 그를 본능적으로 밀어냈고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후회했다.   

   

 그때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그녀가 서울을 떠나기 직전 헤어진 민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한국 떠났다는 소식 들었어. 언제 돌아와? 보고 싶어.’ 그녀는 낭만적인, 너무나도 낭만적인 달빛으로 물든 바닷가 모래사장을 마음에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사람과 걷고 있는 현실에 불쑥 침투해 버린 그 메시지의 무례함에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조차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그녀는 언제나 충만함보다 결핍에 더 이끌렸다. 작고 왜소한 자신의 덩치만 한 묵중한 기타를 둘러메고 온몸을 쥐어짜며 내지르는 민우의 목소리는 구슬프게 텅 빈 공연장으로 퍼져나갔다. 콤플렉스투성이로 태어나 자라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향해가는 삶의 여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는 없으니 이렇게 노래라도 하며 사는 거라고, 그가 말했을 때 그녀는 그 ‘노래라도’라는 긍정적 허무주의에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을 꼭 닮은 결핍을 알아본 그녀는 그 결핍을 채우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 여기며 관계를 맺었다. 은행 업무부터 팬클럽 관리까지 모든 게 그녀의 당연한 업무가 되었다. 한동안 그녀는 자신이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제 모습이 사그라드는 줄도 모르고 고단한 관계를 묵묵히 이어 붙였다.      


 결핍이 결핍을 알아보고 상처가 상처 곁은 맴도는 관계가 무너져 가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을 땐 이미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김민우의 여자 친구’로만 세상에 남아있었다. 민우가 운 좋게 유명 TV쇼에 나가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자신의 역할과 관계의 명분을 찾지 못한 그녀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다. 자신의 결핍이 또 다른 결핍을 갈망했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의 결핍과 상처가 곰팡이로 자욱한 눅눅한 벽지의 패턴에 번져 가려질 수 있었다.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헤어지는 거야.” 그녀가 민우에게 작별을 고하며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아니, 그녀 자신을 믿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관계에서 그녀는 결국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을 상대한다는 걸 깨달았고 상대의 마음이 아닌 자기 마음이 변하는 걸 신뢰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걸 초월할 만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녀가 지금껏 해온 사랑이라는 건 그녀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연약한 방식에 대한 연민에 더 가까웠다.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받을수록 불안해졌다. 언제나 스스로 관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익숙한 지하 공간으로 돌아와 무릎을 껴안고는, 그녀는 영원할 수 없다면 일찌감치 망쳐버리는 게 오히려 낫다고 자위했다.     

 

 벤은 어쩌면 그녀가 그때 놓쳤던 구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원하는 것이 구원인지, 정확히 어떤 것으로부터의 구원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과연 이 삶의 목적이 구원 그 자체인지 명확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모든 게 너무나 익숙해 질서정연해진 한 세상을 박차고 나와 이제 막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고 또 다른 새로운 질서를 그녀만의 방법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이번에도 그녀는 따뜻하고 풍요로운 구원보다 어둡고 눅눅하고 질척이는 고독을 선택한다.      


 그녀는 오래도록 벤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바닷가를 걸었다. “우리가 인연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녀는 그가 가진 충만하고 따뜻한 기운을 잠시라도 빌려 품을 수 있었던 세상이 마련해 준 우연에 감사했다. 그녀의 가난한 영혼은 언제나 비뚤어진 자격지심으로 활약했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자기 모습을 부정하거나 숨기려거나 고치려 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방향을 돌려 걷고, 또 걷다가 출발했던 처음으로 돌아온 둘은 서로를 길게 안았다. 이번 생에서 둘의 인연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몰랐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토록 부드럽게 항복할 수 있는 자신에 그녀는 놀랐다.      


 “네가 찾는 게 무엇이든 하나, 넌 그것에 가까워지게 될 거야. 그리고 네 비밀이 무엇이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      


 벤은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달빛 조명의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는 다시 혼자 무대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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