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로 돌아온 그녀는 바닷속에 있는 동안 외면해 둔 스마트폰 전원을 켰다. 아마 그녀가 스마트폰이라는 물건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전원을 꺼둔 역사일 것이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냐고 갖가지 다른 알림음을 울리며 스마트폰이 호들갑을 떤다. 파라다이스의 상징과도 같은 사파이어 빛 바다를 배경으로 야자수 그늘이 드리운 그녀의 곧게 뻗은 다리 사진에 달라붙은 수많은 ‘좋아요’와 댓글을 확인한 그녀는 별 감흥이 없었다.
소셜미디어는 지금, 가장, 최신의 트렌드 전선에서 시장에 출시하거나 대중에 공개되기 직전의 따끈한 제품이나 예술가의 결과물을 남들보다 먼저 만나는 잡지사 에디터에게 필수적인 무기였다. 언젠가부터 그 화려한 직업에 조금씩 회의감이 밀려들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남들보다 무언가를 ‘먼저’ 보는 건 무언가를 ‘깊게’ 들여다보는 것에 비해 그리 멋지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팔로워 숫자는 곧 사회적 지위를 뜻했고, 사람들은 서로 이름 대신 인스타그램 아이디로 부르기 시작했다. “어제 인스타그램에서 봤는데… 무슨 일 있어 보이던데, 괜찮아?”하는 대화가 아무렇지 않아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이 섬에 와서도 여전히 소셜미디어 버릇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잘 나가는 유명 잡지사 에디터가 갑자기 회사를 때려치우고 무명의 작은 외딴섬으로 떠났다는 사실은 판타지로 포장됐다.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게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이뤄진 합의였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줄리아 로버츠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섬에 들어온 뒤로 조만간 모든 소셜미디어를 지우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가 떠나온 문명사회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기엔 설명할 수 없는 미련이 아직 남았다.
‘아무도 내가 바닷속에 있었다는 걸 모르겠지.’ 자신이 세상에 없다는 걸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짜릿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서운하고 섭섭한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없으면 이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뭐든지 열심히 하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최선을 다해 살았던 스스로가 좀 민망해졌다. 그러고는 그녀는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갔다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커다래진 눈으로 입을 쩍 벌렸다. 바닷물이 마음껏 가지고 놀다 간 흔적이 역력한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햇빛의 과격한 키스 자국이 선명한 얼굴에 그녀 자신조차 낯설고 어색했다. 다이빙을 마치자마자 벤의 스쿠터 뒷자리에 앉아 바로 숙소로 돌아온 뒤 그녀는 거울을 처음 본 것이다. 도시에선 언제 어딜 가든, 원하든 아니든 늘 자기 모습을 끊임없이 마주치며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듬고 화장을 고쳤다. 버스와 지하철, 수많은 상점의 쇼윈도, 끝없이 마주치고 부딪히는 사람들의 눈 마저 모두 그녀에겐 거울이었다. 그런데 이 섬엔 어디에도 거울이 없었다. 주기적으로 물들이던 염색이 다 빠지고 손발톱의 네일아트도 모두 지워지고 화장기도 없이, 이제 그녀가 태초의 이브가 된 것이다.
그녀는 서둘러 샤워기를 틀었다. 낮 동안 섬에 뿌려진 햇빛에 뜨끈하게 데워진 물이 나왔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그녀는 아이보리 바탕에 검은 잔꽃 무늬가 들어간, 바닥까지 길게 늘어지고 어깨가 드러나되 야하지 않은, 오히려 청순한 느낌까지 드는 비치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저녁에도 이 섬은 끈적하고 기온이 높아 화장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틴트 몇 방울로 입술에 붉은 기만 넣었다. 가볍고 시원한 바닷소금 향을 머금은 향수를 뿌리고 그녀는 서둘러 벤과의 저녁을 약속한 해변가의 조그만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걸어 나갔다.
해가 지는 바닷가는 푸른빛에서 보랏빛으로 배경을 바꾸고 있었고 아담한 오두막 건물에 들어서니 주인장이 이탈리아 억양으로 반갑게 맞이하며 벤이 앉은 테이블로 그녀를 안내했다. 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가벼운 포옹과 양 볼의 입맞춤으로 맞이하고 의자를 살짝 빼 그녀를 앉히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껏 늘 상의 없이 맨발에 보드쇼츠만 입고 만난 벤이 보송하게 잘 다려진 하얀색 셔츠에 단정한 진을 입고 나타난 모습을 보니 그녀는 자신과 벤이 태초의 아담과 이브에서 갑자기 문명사회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한 것 같았다.
“하나, 너에게선 항상 좋은 향이 나.” 자리에 앉은 벤이 그녀에게 말했다. “고마워. 하지만 이건 그냥 향수인걸” 하는 그녀에게 “같은 향수라도 뿌리는 사람의 체취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향이 다르게 변해. 하나, 너라는 사람의 향이 좋은 거야”라고 벤은 친절하게 정정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부드럽게 늘어놓는 칭찬으로 시작하는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그 역시 멋지다는 말로 화답하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 그에게 부적절한 신호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여졌다. 여성의 언행에 모든 책임을 묻는 사회에서 나고 자란 일종의 보호본능 같은 거였다. 그녀는 언젠가부터 불순한 의도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가 차라리 더 편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벤을 비롯한 자신이 다이빙 보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그녀의 이름을 문장 앞이나 뒤에 꼭 붙인다는 걸 알아챘다. 한국에선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의 이름을 자주 부르지 않는다. 단둘의 대화에서도 벤은 그의 말을 듣는 게 반드시 그녀여야 한다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자주 불렀다. 이것이 문화의 차이든 벤이라는 사람의 습성이든 그녀는 상대의 이름을 자주 부르는 건 참 좋다고, 그녀 역시 누군가 대화를 하든 상대의 이름을 자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라는 이름은 무슨 의미야?” 그때 벤이 그녀에게 물었다. 몰래 하던 생각을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 그녀는 대답했다. “한국 사람들은 주로 이름을 한자로 짓는데 내 이름은 순한글이야. 내가 태어난 시절엔 한글로 이름을 짓는 건 흔치 않았지. 너도 알다시피 ‘원 투 쓰리’ 할 때 한국어로 ‘하나 둘 셋’ 하잖아. 내 이름은 그러니까, ‘원’이지. 우리 아빠가 대를 잇는 장남이거든? 한국에선 장남이 아들을 낳아야 해.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여전히 딸보단 아들이었어. 그런데 내가 태어날 때 아빠가 무조건 딸 하나만 낳겠다고 선언한 거야. 그래서 할머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 그 화풀이를 엄마한테 했고, 엄마는 그걸 나한테 풀었어. 어렸을 땐 아빠가 내 이름을 지을 때 특별한 아이가 되길 바란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내 이름으로 세상의 관습을 깨고 특별해지고 싶었던 건 바로 아빠 자신이 아니었을까 싶어. 어쨌든 내 이름은 ‘원 앤 온리’야. 하지만 그렇게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겠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그녀에게 벤은 “이렇게 예쁘고 건강하고 똑똑하면 됐지. 뭘 더 바라? 그나저나 하나, 너희 아버지 정말 멋진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내 이름은 일본에선 ‘꽃’이 되고, 마오리족을 만나면 ‘사랑을 주다’와 ‘빛나다’라는 뜻이 돼. 아랍어로 ‘하나’는 ‘행복’을 뜻하고 알바니아어로는 ‘달’을 뜻하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신이 나서 자기 부모가 이름을 지을 때 생각지도 못했던 의미까지 담아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한 번도 제대로 대접받아 본 적 없는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거라면 그녀는 기꺼이 밤이라도 샐 수 있었다. 그렇게 이름을 이야기하는 만큼 자기 존재의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이 소환되는 대화 속에서 마음 저 멀리 깊이 잠자고 있던 그녀의 자아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이 섬에 오기로 마음먹은 건 아무도 그녀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파도처럼 수많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빠져나가는 이 섬의 익명성이 좋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누구든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섬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자신이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도시에서 맡았던 역할은 무엇이든 꿰뚫어 보며 마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안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냉소하는 ‘여자 137번’ 같은 것이었다. 이 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이렇게 많이 부르는 건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염세와 비관에 찌든 수천만 중 하나였던 그녀가 이제 정말 그녀의 이름처럼 ‘원 앤 온리’가 된 것이다.
그때였다. 대여섯 개 정도가 다인 테이블이 만석이 되고, 이 섬에서 10년이 넘게 운영해 온 이탈리안 홈메이드 음식에 밉지 않은 자부심을 드러내는 주인장 로렌조가 추천한 카르파초를 들고 나타났을 때 온 섬이 정전됐다. 그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음식을 그들의 테이블에 놓고 바람을 막아줄 작은 유리병 안에 다소곳이 자리한 촛불을 들고 와 밝혔다. 그녀도, 벤도 이 섬의 예고 없는 정전에 이미 익숙해졌다. 사방이 뚫린 레스토랑에서 돌아가던 팬조차 멈춰 서자, 이 섬에 휴가를 온 것처럼 보이는 옆 테이블에 앉은 연인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덥고 후덥지근한 날씨를 불평했다. 땀에 범벅이 된 화장으로 거의 울 지경인 옆 테이블 여자를 보면서 그녀가 앞으로 이 섬에서 화장할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하고 있는데 벤이 속삭였다. “저 사람들 프렌치야. 시끄럽게 불평하는 건 대부분 우리거든.” 그는 자신이 대단한 걸 발견했다는 듯 뿌듯해했다. “하지만 벤, 너는 안 그러잖아.” 그녀 역시 의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문장 앞에 붙였다. “나는 일본에서 오래 지내서 좀 나아졌는데 여전히 음식과 와인 불평은 잘해”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반반씩 섞인 벤이었기에 그녀는 좀 더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하나, 네가 괜찮다면, 한국을 떠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벤이 자신의 빈 잔에 레드 와인을 따르며 정중하게 물었다. “음… 화려하고 요란하고 복잡하고 사람 많은 도시에서 나는 오히려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었어.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편리한 도시에서 사는데 나는 점점 퇴화하는 기분… 그런데 하필 그런 내 모습을 스스로 알아채고 혐오해서 문제였지. 남들처럼 무던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무시하지 못해서 좀 고달팠어. 하지만 정작 문제인 건 내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이었는데 내가 거기에 적응을 못 하는 거라고, 내가 더 강해져서 이겨내야 하는 거라고, 그걸 무슨 인간적인 진화인 것처럼 이죽거리는 사람들도 싫었고,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온갖 진단서와 처방전을 끊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훈수를 두는 사람들도 싫었어.”
벤이 그녀의 와인잔으로 시선을 돌리며 와인병으로 더 따라주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녀는 손바닥으로 와인잔 둘레를 살짝 가렸다. 그러자 그는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그리며 와인병을 제자리에 놓았다. 와인이든 맥주든 어떤 술이든 한 잔이 주량의 전부인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와인 한 잔을 모두 비웠고, 그건 바로 그녀가 편안한 자리에 있다는 걸 의미했다. 더 마셔라, 안 마신다, 왜 안 마시냐, 유전적으로 못 마신다, 하는 실랑이 없이 이렇게 깔끔하게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는 술자리가 대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에 네가 그랬지? 서른넷이면 X나 어린 거라고? 한국에선 안 그래. 여자 나이 서른넷은 마지노선이야. 선택을 강요당하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들에게 나는 그들의 생활 방식에 반기를 드는 배신자이고,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은 회사에서 나는 여전히 언제고 그들의 뒤통수를 치고 결혼으로 숨어버릴 잠재적 도망자야. 그리고 그걸 마치 사회가 여성에게 관대하게 허락한 특권이라고 생각해. 사형선고를 당하고 집행은 안 되는 무기수라고나 할까? 처자식이 있다고, 지킬 것이 많다는 걸 명분으로 밑바닥까지 보이며 정치질하는 사람들 천지인데 사실 나는 가진 것도, 지킬 것도 없어서 ‘가오’는 지키며 살고 싶었거든. 돈은 없어도 낭만은 벌고 싶었는데 그게 참 어렵더라. 그러니까 나는 협조적인 군중이 될 수도 없으면서 그렇다고 앞에 나서는 혁명가가 될 용기도 없는, 어중간하고 비겁한 사람이었어. 주사위 게임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결국 주사위를 판밖으로 집어 던지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어. 도망인 거지, 비겁한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 보내는 비웃음을 지었다.
“하나, 너는 현실도피자가 아니라 그 반대 같은데? 오히려 삶을 너무 사랑해서, 삶에 열정과 미련이 너무 많아서, 사라져 가는 너를 그냥 두고 보는 게 너무 싫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아우라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으로 이뤄졌다. 불안과 두려움은 그녀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무언가를 잘 해내고 싶을 때, 무언가와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 더욱 그녀를 잠식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외롭고 괴로웠지만 그 고통을 부끄럽고 하찮게 여겼다. 그녀는 늘 여기보다 어딘가를, 지금보다 언젠가를 소망하다 결국 바닷속까지 가겠다는 지금에 도달했다.
한때 그녀는 세상의 중심에서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울의 변두리에 살면서도 기계적으로 서울에 파고들려 했고, 그곳에 묻힌 보물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미련에 잠겨 몇 시간 눈을 붙이고는 또다시 어제를 무덤덤하게 반복했다. 그녀뿐 아니라 같은 생각을 하는 다른 모든 사람과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는 경쟁을 해야 했다. 지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수백 개의 ‘좋아요’도 ‘부럽다’는 댓글도 아득한 세상의 변두리도 모자라 바닷속까지 들어가 그동안 차마 마주 볼 수 없었던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그 진실을 그녀는 엿보고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이 의외로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그래서… 나 좋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살아보려고.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이라는 걸 알기에 더 내 방식대로 행복에 가까이 가보려고. 내 나름의 피난처를 찾는 기술을 한 번 배워보려고.” 그녀는 벤과의 대화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그녀의 몸에서 모든 에너지가 균형 있게 완전히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기분 좋은 노곤함이었다.
“하나, 너는 네가 얼마나 아름답고, 지적이고, 재미있고, 매력적인 사람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 레스토랑을 빠져나와 밤의 해변을 걸으며 벤이 그녀에게 말했다. 바닷속에서 우주의 먼지만 한 제 존재의 가벼움과 보잘것없음을 온몸 구석구석 세포까지 받아들인 날, 자신이 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는 특별한 당위성을 포기하면 무엇을 얻게 될지 궁금해지던 밤,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건 나에게 저주와도 같아.” 그녀는 여전히 캄캄한 섬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달더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그녀가 문장을 다 마치기 전, 벤은 허리를 굽힌 채로 고개를 살짝 그녀 쪽으로 향하고는 달빛에 섞인 푸른 눈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