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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Oct 11. 2024

경쟁과 서열화에 중독된 한국 사회의 도파민 방정식

<흑백요리사>와 <스테이지파이터>: 계급 사회를 즐기는 나름의 방식.

   

해외 생활을 시작한 10년 전쯤에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외국인들이 “남이야, 북이냐?”를 먼저 묻고, ‘김정은’으로 웃기 힘든 농담을 하며 ‘김치’에 코를 막았다. 우리에겐 ‘마카레나’와도 같은 ‘강남스타일’이 나오면 대부분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곤 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팬데믹에 대한 기민한 대처에도 프랑스 친구들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경시하는, 북한과 이웃인 나라다운 발상”이라며 시건방을 떨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프랑스는 인권을 존중하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고, 한국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강도 높은 락다운에 들어가야 했지만.    

  

외국인들과 살면서 ‘이제 정말 한국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알려졌구나’ 하고 피부로 체감한 건 <기생충>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고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을 때였다. 그전까지 K-팝이나 K-드라마, K-푸드는 동남아시아를 넘어 지구 반대편까진 잘 닿지 않아 서구권에서는 여전히 마니아적인 성향이 더 컸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유러피안은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매체에서 떠드는 만큼 K-컬처에 대해 열광적이기는커녕 잘 알지 못했다.        





        


세계로 뻗어가는 계급 사회와 해학의 민족

 

나는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세계적인 성공이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쉬쉬하는 대신 드러내기로 작정한 용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떤 가족>에 대한 일본 매체의 기사를 봤는데, 일본 사회는 이 수상 소식을 딱히 반기거나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대다수의 일본인이 사회의 치부를 국제적으로 드러냈다고 생각해서다. ‘수치의 문화’로 대표되는 일본에 비하면 한국은 ‘자부와 긍지의 문화’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한국 사회 내부의 곪아 터져 가는 계급 문제를 해학의 민족답게 나름대로 즐기는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이 한국의 숨겨진 계급 시스템을 스스로 드러내고 풍자함으로써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듯 최근 글로벌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넷플릭스 <흑백요리사>를 기점으로 “이제 한국은 급기야 서바이벌에까지 계급 시스템을 접목해 세계적으로 두각을 드러낸다”라는 칭찬인지 사르카즘인지 모를 외신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대한민국의 서바이벌 예능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2001년 <슈퍼스타-K>를 시작으로 2010년대에 들어서 <K팝 스타> <프로듀스 101> <쇼미더머니> 등 수많은 프로그램이 히트하며 지금까지 이어졌다.  

    

물론 ‘서바이벌’이라는 컨셉 자체가 주는 긴장감과 예측할 수 없는 상황, 누가 이길지, 누가 떨어질지에 대한 궁금증과 흥미, 높은 몰입도 등의 보편적인 요소가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서바이벌 예능이 유독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한 경쟁 사회인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경쟁적인 성향과 이에 끌리는 본능적인 감각 때문이다. 이는 프로그램 제작진과 시청자 모두 해당한다. ‘생존’ 자체가 한국인의 삶과 결이 맞는다. ‘개천에서 나는 용’이 사라진 지 오래인 한국 사회에서 희미하게라도 남아있는 ‘성공 신화’를 회상하며 시청자들은 자신도 서바이벌 참가자들과 같은 처지에서 도전하고, 살아남는 모습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한국엔 서바이벌 예능이 많아도 너무 많다. 최근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은 <흑백요리사>와 얼마 전 시작한 엠넷 <스테이지파이터>, 노포 식당의 후계자를 찾는 <물려줄 결심>을 비롯해 마술, 군대, 정글, 피지컬, 사랑 등등 숨 쉬는 것 빼고는 이제 모든 분야의 예능이 ‘서바이벌’이다. 이제 하다 하다 재벌 3세들의 능력을 검증한다는 <금수저 전쟁>도 방영 예정이다. 이게 대한민국 방송 관계자들의 게으름인지, 창의력 부족인지, 그저 돈 되는 걸 따르는 것뿐인지 알 길은 없다.   



             





대놓고 ‘계급’ 장사를 해도 반감이 없는 사회

      

내가 <흑백요리사>와 <스테이지파이터>를 보며 놀란 건 그 뻔뻔함이었다. 두 프로그램의 서브 타이틀은 ‘요리 계급 전쟁’(<흑백요리사>)와 ‘남자 무용수들의 우아하고 잔혹한 계급 전쟁’(<스테이지파이터>)으로 두 프로그램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계급’이라는 단어는 프로그램의 시작과 끝이요, 모든 것이다.      



(좌) 요리 계급 전쟁 <흑백요리사> (우) 남자 무용수들의 잔혹한 계급 전쟁 <스테이지파이터>



나는 대한민국 예능 방송계, 아니 대한민국 사회가 이렇게 대놓고 ‘계급’이라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전면에 내세워도 대중으로부터의 그 어떤 거부감이나 반감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경지에 이른 현실에 조금 무서워졌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은 그 선명하고 뻔뻔한 ‘계급’ 시스템을 열광하며 지지한다. 두 명 이상의 집단에 들어가기 시작할 때부터 경쟁에 노출되어 계급 시스템에 완벽히 적응한 사람들은 이렇게 대놓고 ‘계급, 계급, 계급’을 외치는 프로그램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      


모든 구도와 판을 짜는 건 방송사와 대기업 투자사 및 광고주, 즉 소수의 권력자다. <흑백요리사>는 경력과 인지도를 기준으로 ‘흑수저’ ‘백수저’(여전히 이 기준은 모호하다)로 계급을 나눠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했지, <스테이지파이터>는 18년 경력의 국립무용단 주역 무용수와 신인 무용수를 한자리에서 평가하는, 출발선 자체가 다른 진흙탕 서바이벌이다. 


<흑백요리사>의 ‘백수저’는 ‘백수저’라는 이유로 첫 번째 미션을 면제받고, ‘흑수저’ 셰프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평가한다. <스테이지파이터>의 ‘언더’ 계급과 ‘퍼스트’ 계급은 대기실부터 다르다. 계급에 따라 달라지는 처우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프로그램 시작부터 “룰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도 좋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사회가 그렇다.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합의로 서바이벌 게임은, 그리고 이 사회는 계속 굴러간다.

      

‘흑수저’가 ‘백수저’를 이기고, ‘언더’가 ‘퍼스트’를 끌어내리는 장면을 중간중간 끼워 넣으며(<스테이지 파이터>) “자, 봐. 밑바닥 계급인 당신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끌어내지만, 결국 ‘누군가를 밟고 더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는 것 말고는 이 세상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다’라는 숨겨진 메시지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길들여진다.        



             



한국은 정말 그런 나라야?

     

가끔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을 비롯해 다양한 한국 문화를 경험한 친구들(특히 북유럽)이 “한국은 정말 그렇게 경쟁이 치열한 나라야?” 하고 물으면 나는 부인하지 못했다. 어쩌면 현실이 영화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그래도 한국은 ‘돈이 많으면’ 아주 살기 좋은 나라야”라는 낯부끄러운 설명을 덧붙인다. 

    

한국은 객관적으로 모든 지표를 놓고 봤을 때 심각하게 불행한 나라다.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고, 그중에서도 청소년, 노인, 여성의 우울감이 높은 수치를 보인다. 출생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고, 경제 성장으로 거둔 이익은 골고루 분배되지 못했으며, 노동자와 장애인, 소수자의 인권이 무시되고, 모든 사람이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른다. 그나마 한국 사회를 지탱해 오던 공동체와 ‘정’의 문화는 사라지고, 신자본주의, 계급주의, 각자도생이 미덕이 된 무한 경쟁 사회에서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있다. 

    

소수 기득권에 의해 설계된 시스템과 불합리한 경쟁 룰에 대한 문제의식은 깡그리 무시하고 도파민만 자극하는 일부 서바이벌 예능은 아쉽기만 하다. 프로그램의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인지하고 있다면, 적어도 시대정신을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순진하게 왜 이러냐고? 서바이벌 예능의 본능과 목적 자체가 원래 그렇게 노골적으로 도파민을 자극하는 거라며 불평을 거두라 한다면, 나는 목소리를 더 높이겠다. 아예 대놓고 ‘계급’을 내다 걸고 잔혹사를 미화시켜 팔면서, 세계에서 그걸 가장 잘한다는 미국을 능가할 정도의 실력을 쌓아서, 한국의 대중문화는 과연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대중문화의 힘을 아는 만큼 더 두려운 건

      

재미와 짜릿함으로 슈거 코팅된 도파민 중독보다 내가 정말 두려운 건 우리 사회가 경쟁에 중독되어 ‘계급 이동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알게 모르게 만연해지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된 이는 그저 ‘루저’로 치부되고 관심 밖으로 사라지며, 그에 대한 사회의 불평등과 모욕은 당연하다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이번 생은 글렀다’라는 초등학생의 한탄과 체념이 흘러넘치고 넘치다가 결국,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기 스스로를 계급화하고, 또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는 무시무시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 난민, 성소수자 등의 인권을 끔찍하게 짓밟고 사람들이 일하다가 옆에서 픽픽 쓰러져 죽어도 ‘계급이 낮아 어쩔 수 없다’라며 ‘억울하면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계급’ ‘계급’ ‘계급’을 불필요하게 많이 외쳐대는 <흑백요리사>를 보며 생각했다. 한 명의 최고의 셰프 말고 여러 명의 그냥 괜찮은 셰프가 있으면 안 되나?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대신 그냥 행복하면 안 되나?


<스테이지파이터>의 한국무용 팀 첫 번째 미션을 보고 생각했다. 과연 군무(群舞)의 서포트가 없는 주역(主演)의 춤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언더’는 정말 ‘퍼스트’의 배경에 불과한 존재일까? ‘언더’는 실력이 형편없는 자들만이 있는 곳일까? 모두 ‘퍼스트’가 되고 싶어 한다면 ‘언더’는 끝내 사라져야 마는 걸까?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성공한 삶인가?     


대한민국에서 대중문화는 물론, 더 다양한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발전할 수 없는 이유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하는 실력 있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굳이 대중적인 음악을 억지로 만들어 메이저가 되려 노력하지 않아도 충분한 팬층과 수입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장인 정신이 만들어지고,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더 다양해지고 탄탄해진다. 문화 정신은 곧 한 사회의 시대정신으로 이어진다. 결국 사회는 한쪽 꼭짓점만 점점 더 뾰족해지는 삼각형 모양에서 허리가 더 굵어지는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변해간다. 


나는 적어도 대한민국이 이런 시대정신을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아니 진즉에 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일찌감치 자신의 계급을 결정짓고 체념으로 고개를 떨구며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단순한 계급 구도에 열광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속한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문화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재미만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변화를 위한 도구로도 쓰일 수 있다. 


지금 이대로 가면, 우리 정말 다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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