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은 칼을 이기고, 빛은 어둠을 이기며 연약함은 곧 강함을 이긴다.
생성형 AI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등장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2024년,
시대 기류의 가장 정반대 편에 선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을
원서로 읽을 수 있는 나라의 국민이 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내가
스스로 ‘우리나라’를 부정하고 싶었던 처음은
멀쩡한 민주주의 시대에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직접 목격한 국가 폭력,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였다.
그리고 <오징어게임>의 전 세계적인 흥행으로
황동혁 감독이 에미상 무대에 오른 2022년 9월,
그로부터 한 달 후 내 남은 생의 모든 핼러윈 파티를 없애버린
또 하나의 국가 폭력,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다.
또다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한강의 수상 소식에
당연히 예상했던 소음이 들려왔다.
광주와 제주를 비롯한 대한민국 역사의 수많은 고통의 기억이
이제 우리 역사를 넘어 세계 역사에 선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애처로운 발악 같은 것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 보수 단체들이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한강의 노벨문학상을 철회하라는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다.
피는 잔칫집에서 흘리라고 했다.
누구도 김규나에게 축배를 함께 들자고 말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어느 잔칫집에 피를 뿌리는지 정도는 제대로 인지했다면
더 분발해야 했다.
한강의 문장과 싸우려 했다면
좀 더 날카롭고 논리적인 문장을 가져왔어야 했다.
적어도 김규나가 진정 스스로 ‘소설가’라 규정한다면,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왜 한강의 작품이 ‘역사 왜곡’인지
문학인답게 깊고 넓은 통찰로 사유하며 비판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한림원이 순전히 정치적이거나 물질적으로 수상자를 선정한 거라면,
정부가 문화 예산을 다 깎아버리고 노벨문학상이 뭐 하는지도 잘 모르는
무능한 한국의 손을 왜 들어줬는지,
한림원이 중국 작가 대신
한국 작가를 선정해 얻게 되는
정치적, 물질적 이득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해야 했다.
한강이 여성이라 <채식주의자> 같은 작품이 나온 건데
“여성이라 수상한 게 아니냐?”라고 묻는
이 여성 작가의 어리석음은 그 깊이가 어디까지일까, 가차 없이 궁금해진다.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와 갈등은 ‘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제의 만행부터
이승만과 제주 4.3 사건,
전두환과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박근혜와 세월호 참사,
윤석열과 이태원 참사,
이 모든 갈등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에서 기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자리에 앉아 ‘갑질 피해자’ 하니와 함께
국감장에서 밝게 웃으며 셀카를 찍은 정인섭 한화오션 거제사업장 사장은
올해에만 5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사업장의 ‘갑 중의 갑’이었다.
그는 “전쟁이 치열해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느냐.
스웨덴 한림원에서 상을 준 것은 즐기라는 게 아니라 더 냉철해지라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여전히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약자의 편에 섰다.
그가 온 세상에 보여준 작가로서의,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진중함이 가득 담긴 문장이다.
한강의 글은 앞으로 더 선명해질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라나는 아이들이
교과서에서 그의 글을 읽게 될 것이고,
광주와 제주의 아픔은
대한민국을 ‘바로 보지 않음’과 ‘인정하지 않음’,
즉 ‘왜곡’과 ‘부정’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회로 이끄는 머릿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한국의 소녀들은 또다시 노벨문학상을 꿈꾸며 날개짓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쓰다’의 가치와 ‘쓰는 사람’에 대한
가치와 존중의 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
상상해 보라.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헌법이 모조리 현실이 되고
모두 저마다의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정부의 간섭과 검열로부터 자유롭되
풍족한 지원을 받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인들이 앞으로 세계 무대를 얼마나 더 훨훨 날게 될까.
그러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의대와 법대에 가는 대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노래하며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될까.
그런 사회는, 그런 국가는,
그런 세상은 과연 얼마나 아름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