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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롱사이다 Dec 23. 2021

#22. 나를 알고 너를 알아야

드디어 우리가 된다.

미국에 와서 좋은 점은 모든 것과의 ' 단절' 이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어떤 지점에서는 참으로 편리하다. 여기에 계속 살것도 아니니까

무거운 걱정을 할 이유가 없고, 한국에서는 몸과 마음, 소속 모두 떠나있으니

'그 무엇도 아닌'의 상태로 있을 수 있다.


여러번 썼지만, 나는 아이의 자폐 판정이후, 참으로 힘들었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그냥 내 삶이 전반적으로 다 힘들었다. 어쩌면 정말 30대까지 순탄하게 살아온거구나 싶었다.

모범생의 삶.

하지만 여러 문제들이 쓰나미처럼 덮치면서 나는 정신을 못차리겠더라.

어디서 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참으로 막막하고, 그냥 주저 앉고만 싶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이자 노동자이고, 누군가의 부인이자, 누군가의 딸이고, 친구이고

그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왔다. 힘들때마다 늘 내게는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덕에 넘어지지 않고 직립보행하며 걸어갔다.

소위 인복이란게 있다. 포기하고 싶을때 새로운 문이 확실히 열렸고,

그 문은 내가 두드리지 못할때 남들이대신 두드려 주기도했다. (늘 고맙습니다)

그리고 자폐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공포, 냉정하게 비장애 첫째를 키울때도 마찬가지인데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하고 답답한, 시커먼 연기같은 기분들이 들곤 한다.

늘 인터뷰 할때 빠지지 않는, 이제는 식상 (?) 하기 까지 한

"아이보다 하루 늦게 죽고 싶어요...."

그 지점까지 도달하다 보면 반사적으로 눈물이 나고, 사고가 정지된다.

어쩌지..어쩌지..어쩌면 좋지... 모든게 먼지처럼 흩어지는 쪼글한 기분.


갑자기 잘해오던것도 제로 베이스로 가는것같은 두려움.

거기에다 아이가 치료실에서 하던것들을 잘하지 못하고, 텐트럼이라도 한시간 부리고 나면

이런마음은 빵빵해진 풍선처럼 커져서 터지기 일보직전이 된다.

그리고 한없이 마음은 가라앉고, 슬퍼진다.


재미있는건,  미국와서는 이 모든 것들이 다 ' 스톱'이 되었다.

일단 모든 치료실을 다니지 않고 있다.

어차피 단기로 있을 예정이라, 여기서 테라피를 찾기도 힘들고,

지금 한국어도 잘 못하는데 영어로는 더 힘들것 같아서 치료는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여기서 누릴수 있는 자연.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들을 최대한 누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곳 학교에서 IEP를 수립하는동안, 레귤러클래스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경험.


아이는 참으로 즐거워한다. 지금 있는 반이 ELD 클래스인데, 그래서 다들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다.

킨더와 1학년이 섞여있어서 더더욱 적응하기 좋았던거 같다.

아이가 표현은 못하지만, 늘 자기가 다른 애들보다 느리고 못하고 그랬는데 다 같이 ' 못하고 안통하는'모습을

보면서 '자신감'을 얻은듯 보였다. (순전히 나의 해석이지만)

그래서 초반 3개월 정도에는 스폰지처럼 흡수하는게 눈에 보이더라.

웃기게 한국어로 숫자를 20까지 겨우 셀수 있었는데 100까지도 영어로 해보려 하고,

수업시간에 배운 노래들을 영어로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그토록 '쓰기'를 싫어해서, 겨우겨우 한자씩 썼는데

알파벳쓰기에 재미를붙여서 계속 쓰고 싶어한다.

심지어 그림그리기는 극혐 했는데, 처음으로 사람 얼굴을 제대로 그렸다.

무엇보다, 미국사람들 특유의 '과한 칭찬'도 한몫하는 것 같아 보인다.

뭘해도 '해피 보이 ' 뭘해도 ' 너무 잘한다'로 하니까

아이도 크게 자신감을 가지고, 즐거워한다.

그리고 미국 학교들의 행사들, 할로윈과 추수감사절 등등

즐겁게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노는 문화들이  아이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할로윈에 자기가 좋아하는 복장을 하고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의 몰랐던 부분들을 알기도 했다.

사실, 새로운것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새 옷을 주었을때 까슬거리거나,

감각을 자극하는것들은 엄청 거부가 심했다.

그래서 그런 코스튬들을 다 싫어할것이라고 '짐작'해서 '판단'했는데...

형의 코스튬을 사러간 자리에서,

자기는 평소 좋아하던 '토이스토리'의 '버즈'를 하겠다며

바로 옷을 고르는 것이었다. 너무 기뻐서!! 정말 가격도 안보고 그냥 샀다 (이게 플렉스 아닌가)

그리고 집에와서 다른 말 할까봐 잽싸게 입어보자 하고!!(혹시나 안입으면 반품 하려고^^;;)

등 쪽에 찍찍이가 과하게 많았는데(고난도다 고난도다)

엄청 싫어하는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혼자서 아아..흥흥..하면서)

하. 지. 만.

뒤에 날개도 붙이고 옷입은 자신을 보면서 너무너무

뿌듯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 보이는것이다!!

'나는 버즈에요!!"하면서

막돌아다니고  '날수 있어 '하면서 침대 위로 점프도 하고 말이다.

예전같으면 상상할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절대 입지 않고 등에 닿는 싸구려 나일론 질감을 견디지 못했을거다.

그래서나는 당연히 코스튬은 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너무 좋아했고,(애써 견뎠고)

1학년이라, 학교 퍼레이드도 엄청 뻐기는 얼굴로 잘 해냈고

다른곳에 사탕 받으러 다니는 곳에서도

먼저 ' 하이 ' 하이' 하며 인사하고

누구보다도 할로윈을 제대로 즐겼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 보면서

내 스스로 '마음의 한계'를 많이 그어두었구나 싶었다 .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아 우리애는 못해요. 안해요'라는 말을

많이 하고있더라.

냉정하게, 그건 엄마인 '자기 방어'일지도 모른다.

자폐아이를 키우며 수많은 '상처'들을 받으며 이제 방어적으로

수동적인 자세가 되어버린것이 많았다.

더이상 상처받지 않겠다고 온몸을 웅크린 공벌레처럼 행동하고 있었더라.


많은 반성을 했다.

이놈의 자기반성은 왜 끝도 없는걸까.

아니면 늘 반성하는나는 ..아직도 발전하고 있는것이겠지...

ㅋㅋㅋㅋㅋ( 자기 반성과 피처링으로 자기 위안도 ㅋㅋㅋ합리화 인가요?!)

최소한 이제부터는

'이건 못해요. " 라는 말은 안하기로 했다.

"한번 해볼까?"라는 다른말을 자주 써보기로 한다.

정말 '나'를 알아야 '너'를 제대로 알게 되는구나. 

이렇게 서로를 알때 비로소 '우리'가 되어가는구나....



물론 , 우리는

 3개월이 지난 지금, IEP 관찰기관과 회의가 끝난후, 그 과정이 굉장히 괴롭긴 했다.

여기에 구구절절 쓸까말까 생각만 했지만 결론만 말하면  결국 스페셜 클래스에 가기로 했고

이틀 가고 지금 겨울방학 중이다.

교장선생님께서 엄청 신경을 많이 써주시는 좋은 분이라서, 큰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또 반전,

방학 전날, 교장선생님께서 전화와서 다시 더 소수의 레귤러 클래스에 가겠냐는 제안을 받은 상태다)

재미있게도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날도 다가 온다.

사실, 미국오기전 , 자주자주 여기다 글을 써야지 생각했는데

잘 안되더라. ^^;;;

변명해보면 그냥 정말 미국에서는 '무'의상태로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무도 아닌 나'


그 해. 우리는. 

나를 알고 너를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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