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광암이 남자와 결혼했다.
엄마는 항상 내가 결혼하여 아이들(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 낳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엄마로 사는 삶을 원하셨다.
내가 일본으로 공부하러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도 하고 싶은 공부 하고 돌아와서 결혼하라고 말씀하셨다.
가끔 한국에 들어가면 선 자리를 잡아놓으셨고, 그럼 나는 마지못해 선을 보러 나갔다. 내 나이 서른을 넘기기 전에 나를 결혼을 시키는 것이 엄마의 사명 같았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 그러면 수녀님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엄마. 그래서 나는 일본에서 일하며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내가 하얀 롱패딩 속 그 남자의 품에서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 어이없음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 남자에게
“우리 결혼하자”라고 말했다.
그냥 함께 TV를 보다가 무심하게 던졌던 그 말에 그 남자는 “그래!”라고 대답했다.
프러포즈라고 하면 그게 다다. 정확한 결혼 계획은 없었다.
그 뒤 그 남자는 일본에서 방광암 수술을 했고, 그 남자가 퇴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결혼할 거야.”
“그래~ 엄마가 아는 사람이야?”
결혼이라는 단어에 엄마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듣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듣는 것에 대한 환호 같았다.
“엄마도 아는 사람이야. 그 사람 방광암 수술했어.”
나는 머뭇거림 없이 바로 이야기했다. 이 방법이 가장 빠르게 다음 단계의 대화로 넘어가는 방법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한참 후 엄마는 나에게 전화가 왔던 그 순간에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날 나는 엄마와 딸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소 결혼 상대는 건강이 최우선이라며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건강검진부터 받아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엄마는, 다른 말 없이 결혼할 사람이 생긴 걸 축하한다고만 하셨다.
그날 엄마와 나는 그렇게 통화를 마쳤다.
며칠이 지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고 엄마가 결혼을 승낙하는 조건은 딱 한 가지였다.
한국으로 바로 돌아오는 것.
안된다는 말이 아닌 한국에 돌아오라는 말은 어떤 말보다 고맙고 감사한 말이었다.
나는 일본에서의 삶을 빠르게 정리했고, 방광암에도 꿈쩍하지 않던 그 남자 역시 나와 결혼하기 위해 짐을 쌌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셨다.
다른 가족들은 내가 일본에서 돌아오기 전 나의 남편이 될 사람의 건강 상태를 엄마에게 전해 들었고, 아빠는 엄마가 설득했다.
가족 모두가 걱정은 했지만 중요한 건 나였다.
내가 선택한 남자였기에 모두 환영했고 반겼다. 한국에 도착하고 바로 상견례 날짜를 잡고 결혼식 날짜도 정해 속전속결로 결혼식을 올렸다.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나의 대해 많은 소문이 돌았지만, 이 모든 건 엄마가 철통 방패가 되어 막아주셨다. 나는 그렇게 행복하게 그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모든 걸 정리하고 일본으로 떠났던 남자에게 가진 것은 없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형편도 되지 못했다.
아르바이트하며 공부하다 돌아온 나 역시 가진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도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우리는 소박하게 신혼을 시작했다.
커다란 바퀴벌레가 하루에 한 마리씩 나타나는 집이었지만 하루하루가 재미나고 즐거웠다. 그는 다시 건강한 남자로 한국에서 일을 했다.
우리는 평범하게 결혼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또다시 비슷한 증상이 그에게서 나타났다.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고, 검사 결과 남편은 암이 재발했다.
의사 선생님은 수술 후 마지막으로 검사받은 게 언제냐고 물었다.
우리는 수술 후 검사를 따로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시간이 1년 가까이가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방광암은 수술은 간단하지만, 재발률이 50% 이상이라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하는 병이라고, 수술 후에 설명 못 들었냐고 다그치듯이 물었다.
수술 당시 나는 암이라는 말에 혼란스러웠고,
그것도 일본에서 그런 진단을 받아서 더 정신이 없었고,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나보다 더 정신이 없었고,
모든 결정은 우리가 하고 우리가 책임져야 했던 그 상황 속에서 수술 후 설명했을지도 모를 그 사실을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그 말을 놓쳤을 수도 있다. 그저 머릿속에 수술하면 괜찮아진다는 말만 기억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의사 선생님의 다그치는 물음에 고개를 숙이며 “검사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바로 수술 날짜를 잡고 수술했다.
며칠간의 입원 후 우리는 퇴원했다. 몸의 상태가 수술 전 같지는 않았지만,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은 없었다.
3개월 후에 정기 검사 일정을 잡았다. 3개월 후의 검사에서 이상이 없으면 다음 정기 검사는 6개월 뒤로 잡기로 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나 정기 검사를 받은 날 또다시 암세포를 방광에서 발견했다.
그렇게 남편은 3번째 수술을 했다.
'이 남자와 결혼 할 수 있었던 건 나에게 올 화살을 엄마가 모두 막아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라고,
얼마전 엄마랑 통화하기 전까지 생각했다.
나는 글을 쓰다 새삼 궁금해졌다.
방광암 수술을 한 남자와 딸이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어떻게 아무말 없이 허락해줬는지. 그래서 전화 통화를 하다 물었다.
“엄마, 그때 내가 방광암인 남자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허락했어?”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때는 몰랐지.
너가 결혼하고 나서 얘기했으니깐.
그때 말 안하고 결혼한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알았다면 결혼이 힘들었을텐데.
지금 얼마나 좋아, 착한 아들 한명 생겼고, 너도 행복하고.”
“뭐? 내가 숨기고 결혼했다고? 말했잖아.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말하고 결혼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닌데, 엄마는 결혼 후에 알았는데...”
누구의 기억이 맞는 것인지. 남편과 나는 분명 말을 하고 결혼을 했다고 기억하는데.
지금 와서 누구의 기억이 맞는지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나는 이 글의 마무리를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시작한 일인데도 마주하기가 힘든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피할 수도 없고 물러설 곳도 없는 상황이라면 맞서는 수밖에 없다.
그때 함께 싸워주지 못하더라도 옆에 있어 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든든한 힘이 되어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나는 축복받아 내가 싸우지 않고 나 대신 싸워준 엄마 덕분에 큰 상처 없이 그 일들을 헤쳐 나갈 수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이런 사람이 한 명쯤은 곁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밝게 보이고 그 밝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이렇게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기억이란 믿고 싶은대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그렇게 만들어낸 나의 기억 속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남편이 3번째 수술을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