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골로 간 사나이

나는 방광암인 남자와 결혼했다.

by 쌀방언니

3번의 방광암 수술 이후 우리에게는 2명의 아들이 생겼다.

1월 3일 예정일이었던 큰 아들은 12월 24일 정기검진에서,

의사선생님의 ‘올해는 절대 태어나지 않으니 마음 편하게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날 저녁 양수가 터져 16시간 진통에도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해 제왕절개로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태어났고.

둘째는 이번에는 꼭 자연분만에 성공해 보리라 다짐하며 만삭까지 힘을 모아봤것만 아이가 커서 제왕절개를 해야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8월 15일 광복절에 태어났다.

성탄절과 광복절에 태어난 두 아들을 우리는 가끔 이름을 잘못 지은 것 같다며 기억하기 좋게 성탄이와 광복이로 지었어야 하는거 아니냐며 웃으며 이야기했다.


둘째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남편이 뜬금없이

“시골 내려가서 농사짓고 살고 싶은데….”

“...... 어디?”

“몰라, 아직 그것까지는 생각 안 해봤는데, 농사지으며 살아도 될까?”

“그래.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냥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생뚱맞은 타이밍에 흘리듯 던지 그 말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밤새 남편의 그 말이 신경이 쓰였다. 평소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던 남편이라 가볍게 건넨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남편에게 어떤 농사를 짓고 싶은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다시 물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냥 농사지으며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진 않았다고 했다.

나는 농사를 지을 방법이 있다면 당장 시작할 마음이 있냐고 물었고, 남편은 내가 괜찮다면 자신은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랐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젊은 나이에 도시로 나와 생활하셨던 분이라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으신 분은 없으셨다.

한마디로 주위에 아무도 농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농사일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만 했다.

이리저리 주위에 알아보던 어느 날 블루베리 농사를 지으시는 시고모님의 지인분이 원한다면 블루베리 농사를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에게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전했다. 엄마도 나와 함께 이곳저곳에 알아보고 계셨던 터라 하루빨리 알리고 싶었다.

“블루베리도 좋지. 잘됐다. 그런데 사는 집은 어떻게 할 거야?”

“그건 아직…. 차차 생각해봐야지.”

“엄마 시골집은 어때? 지금 집이 비었는데….

집이 있으니깐 집 걱정은 안 해도 되고, 거긴 수박이 유명하니깐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엄마가 주위에 한 번 물어볼게.”


나는 중학생 때 잠시 시골에 살았던 적이 있다. 엄마가 시골에 작은 터를 하나 장만하셨고, 어려운 살림에 작은 집 한 채를 지으셨다. 힘든 도시 생활을 벗어나 시골 생활을 꼭 하고 싶으셨던 엄마는 동생들과 나만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셨다. 아빠는 그대로 도시에 남으셨다.

엄마는 아빠가 계신 부산과 시골을 왔다 갔다 하시며 살림하셨고, 그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2년 만에 우리는 다시 아빠가 계신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 집은 집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 주기도 하고, 가끔 엄마가 내려가 쉬기도 하셨다.

우리가 크고 나서는 시골에 살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팔라고 권했는데도 본인이 직접 지은 집인 데다 5명의 자식 중 1명은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게 소원이셨던 엄마는 끝까지 그 집을 지키셨다.


그 집에 가게 될 사람이 우리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지만, 집이 있으니 농사만 배울 수 있다면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엄마는 엄마의 꿈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 이야기를 하신 이후부터는 더 적극적으로 시골에 내려갈 방법에 대해 알아봐 주셨고, 나는 나대로 알아봤다.

엄마 집이 있는 시골은 수박이 유명한 동네다.

벼 수확이 끝나면 그 땅에 하우스를 지어서 겨울 동안 수박 농사를 지었다. 봄이 되면 수박을 모두 수확하고 하우스를 걷어 그 자리에 다시 벼농사를 지었다.

수박 농사가 중심 작물이고, 벼농사는 토질 관리를 위해 부수적으로 하는 농사였다.

엄마는 마을 이장님에게 우리의 상황을 말씀드렸고 이장님으로부터 수박 농사를 가르쳐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그리고 주위에 더 이상 수박 농사를 짓지 않아 하우스 철재를 중고로 내놓으신 분이 계신다며 소개해주신다고 하셨다.

살 집과 농사를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니 시골로 내려가는 계획은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남편은 자신이 꺼낸 말 한마디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싫어하지 않았다.

그때가 9월이었다.

10월에는 수박 하우스를 짓기 시작해야지 올해부터 수박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퇴사하고 시골로 바로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두고 좀 더 계획을 세운 후 내년에 내려갈 것인가? 우리는 결정의 순간을 맞았다.

우리는 어차피 시골로 갈 거면 한해라도 빨리 내려가 일을 배우는 게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다른 건 그다음 문제였다.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시골에서 든든하게 우리를 받쳐줄 부모님도 배경도 없었다.

농사의 ‘농’ 자도 모르는 무식한 도시 촌놈이 겁도 없었다.

단순함이 때론 기대 이상의 용기를 준다.

남편은 회사에 양해를 구해 최대한 빠르게 일을 마무리하고 10월에 시골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아들 둘과 도시에 남았다. 조금 모아둔 돈으로는 하우스 철재를 샀다.

나는 남편이 농사를 짓고 싶다는 말을 한 순간,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건 방광암을 앓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의 반대로 하고 싶은 걸 포기하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반대한다면 나는 몹시 우울한 삶을 살게 분명하다.

나는 남편에게 그런 삶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남편과 함께 시골로 내려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보장된 미래는 아무것도 없었다.

맞벌이 부부였던 우리는 남편이 시골로 내려가면 당장 수입부터 줄어든다. 누군가는 돈을 벌어야 했다.

우리는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모아둔 돈도 거의 없었다. 나는 집을 정리하여 도시에 계시는 엄마 집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갔고, 남편은 간단한 짐만 챙겨 시골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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