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레몬 파운드, 그리고 덧없음

비건 레몬파운드 레시피

by 쌀방언니
비건 레몬 파운드

막 구워낸 비건 레몬 파운드는 부드러운 황금빛을 머금은 채 조용히 식힘망 위에 놓여 있다.

겉면은 살짝 갈색으로 그을려 바삭함을 예고하고, 속살은 투명한 햇살을 머금은 듯 촉촉하다.

레몬슬라이스가 살짝 올려져 상큼함을 눈으로 느끼게 해준다.


조심스럽게 자른 단면에는 잔잔한 결이 살아 있다.

공기방울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숨을 쉬고 있고,

통밀 특유의 거칠고도 고운 질감이 투박하면서도 따뜻하다.

레몬필이 은은한 점처럼 박혀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상큼한 기운이 코끝까지 차오른다.


칼날이 레몬 파운드의 살결을 가르자, 순간 공기가 달라진다.

레몬의 청량함이 가장 먼저 후각을 자극한다.


코끝은 찡하고, 동시에 맑아진다.

그것은 여름이 오는 첫날의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의 공기와 닮았다.


통밀의 구수한 향이 뒤를 따른다.

어릴 적 마루에서 맞는 햇볕,

장독대 뒤에 숨어서 숨박꼭질하며 맡았던 장독의 향,

고무줄을 뛰며 꾸밈없이 머금고 있던 미소, 그런 오래된 장면들이 불쑥 떠오른다.


달콤함은 은은한 단내를 풍기며 비 오는 날 레몬차를 마시는 듯한 향을 겹겹이 쌓는다.


손끝으로 레몬 파운드를 살짝 눌러보니 스펀지처럼 부드럽지만, 그 안엔 미세한 저항감은 있다.

통밀의 결로 표면은 살짝 거칠어 보이지만 손바닥에 남는 감촉은 포슬포슬하다.


한 조각을 손으로 떼어내니 따뜻한 김이 올라오고, 속은 부드럽고 유연하게 찢어진다.

잼도 없고 크림도 없지만, 그 자체로 풍부한 결을 가지고 있다.

베어 물기 전, 얇은 껍질 부분을 살짝 누르니 바삭하게 으깨지는 소리가 난다.

고요한 방 안에서 그 소리는 사각사각 눈이 내리는 소리처럼 들리는 착각을 일으킨다.


한 입 베어 물면, 입안에서 섬세한 분열음이 들린다.

무언가가 천천히 풀리고, 사라지고, 다시 조용해지다 가끔 똑 소리를 내는.

그것은 마치 글자를 쓰다 멈추고, 다시 이어 쓰는 리듬처럼 단조롭지만 깊이있고 흥미롭다.


입안의 레몬 파운드의 첫 맛은 상큼함이다.

레몬맛이 혀 위에 번지며 가볍게 전율을 일으킨다.

그 뒤를 이어 통밀의 고소함이 단단하게 입안을 채우고, 마지막은 부드럽고 촉촉한 단맛이 감싼다.


그 단맛은 결코 자극적이지 않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다시 꺼내 읽을 때의 감정처럼, 사려 깊고 은은하다.


레몬필은 씹을수록 향긋한 쌉싸름함을 더해주고, 두유는 모든 맛의 경계를 부드럽게 감싼다.


혀끝에 남는 잔향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 그 여운은 '기억하는 맛'으로 각인된다.



덧없음


상큼하고 달콤한 한없이 사랑스러운 레몬파운드를 보며, 순간 나는 덧없음을 느낀다.

이렇게 행복함을 안겨주는 이것도 결국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지 않은가.


덧없음,

채도가 빠지고 빛바랜 오래된 사진처럼 선명했던 색깔들은 흐릿해지고,

윤곽선은 모호해져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인다.

모든 것에 관심과 에너지가 사라져 아름다움이나 생명력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비치다 곧 사라질 것만 같다.


왁자지껄했던 세상의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희미해지고 아예 들리지 않기도 한다.

기쁨과 활력, 사랑이 넘쳤던 목소리는 이제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깊은 공허한 침묵만이 있다.

음악 소리는 그저 소음일뿐이다.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공.

따뜻했던 손길은 사라지고, 그 온기를 느낄 수 없는 차가운 공기만이 손끝을 스친다.


만지는 모든 것에 아무런 의미나 실체감을 느끼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유령이라도 잡으려는 듯 부질없는 손짓을 하지만,

손 끝에 스며드는 건 날카롭은 존재의 부재뿐이다.

품안에서 느껴졌던 은은한 비누의 잔향,

분명 존재했는데 이제는 이마져도 곧 사라질 것 같은 위태로운 감각뿐이다.

체취와 같은 삶의 온기가 사라지고, 그 어떤 냄새에서도 위안이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달콤한 것도, 짠 것도, 매운 것도 그저 형식적인 맛일 뿐,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진정한 즐거움이나 의미를 주지 못한다.

잠시의 달콤함은 찰라의 순간뿐, 남는건 허무한 공허감이다.


삶의 모든 즐거움이 퇴색되고 무의미해졌다.

그렇게 내 심장의 일부가 뜯겨져 나갔다.

엄마의 심장이 멈춘 그 순간부터.


절대적인 존재의 상실 앞에서 ‘덧없음’ 이라는 단순한 단어는 어울리지 않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삶의 유한성, 존재의 무의미함, 모든 것이 결국 사라진다는 엄연한 진실을 직면하는 고통스러운 본질적인 깨달음.


세상만사가 부질없게 느껴지게 만드는 이 깊은 슬픔의 감각은 나를 세상에 무감각한 존재로 만든다.


많은 것을 성취하고 성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꿈꾸던 미래가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꽃이 피고 지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뜨고 지는 아름답운 것들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덧없음‘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영원한 관계는 없고 언젠가는 모두 헤어진다.

결국 시간 앞에서 모든 건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내 세상의 모든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엄마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고통과 깊은 슬픔만이 지금의 나를 에워싸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 극한의 고통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겠지.

그 의미가 내 삶을 다시 지탱해줄 것임을 알기에.


그 의미를 통해 고통을 초월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겠지.

그러다 나는 남아있는 관계와 현재의 순간이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깨닫는 날이 오겠지.


그 깨달음은 삶을 더 깊이 있고 충만하게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덧없는 내 세상에 그냥 몸을 맡기고 싶다.



당신이 언젠가 이 레몬 파운드를 만들게 된다면,

꼭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감을 열고 한 입 베어 물기를.

그 순간, 당신의 세계는 조금더 환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누군가의 기억, 누군가의 여름, 누군가의 사랑이 고요히 살아날 것입니다.


나에게도 이런 시간이 다시 오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땐 이 레몬 파운드가 더 의미있고 사랑스럽게 저의 세상을 비추리라는 걸 저는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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