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강 속 빨강 립스틱

엄마를 잃고, 나를 잃다

by 쌀방언니

6.25때 남편을 잃은 외할머니는, 하나뿐인 딸인 엄마를 데리고 재혼하셨다.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오신 외할아버지를 만나 둘 사이에는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 전부를 잃고 싶지 않았다. 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착이 딸이 되었다. 새아버지에게도 반항하지 않는 순종적인 딸이 되었다.


새아버지, 그러니깐 나의 외할아버지는 가정적이면서 아주 엄격한 분이셨다고 한다.

옆집 친구집에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옆집에서 친구와 놀다가 후다닥 집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어렵게 구해서 몰래 숨겨둔 빨강 립스틱은 어느날 아침에 보니, 요강 속에 퐁당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하고 싶은 것을 말해 본적도, 해 본적도 없이 자랐다.


그래서, 나에게 관대했다.

엄마가 해보지 못한 것을 마음껏 해보라고, 언제나 나를 자유분방하게 풀어주었다.

그게 엄마가 딸인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사랑 표현이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걸 무관심이라 여겼다.

나를 방치하는거라 여겼다. 그래서 더 삐뚤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세상에 무방비인 상태로 놓여진 것만 같았다.

엄마가 나를 다그치고 잡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엄마는 한결같이 나를 믿었고, 그 믿음으로 기다렸다.

그게 엄마의 사랑 방식인 줄 그때는 몰랐다.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날뛰는 나를 보며, 엄마는 숨죽여 다짐했을 것이다.

'내 딸의 빨강 립스틱을 요강에 내던지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노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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