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라는 말 뒤에는 미안함의 그림자가 있다
“고맙다 “
무뚝뚝한 아빠에게 처음 들었던 저 세 음절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넉넉하지 않은 어린 시절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모님에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조금 더 빨리 철이 드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 살 터울의 동생을 살뜰히 챙겼고, 집안일을 도왔다. 엄마와 아빠에게 뭐 갖고 싶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딸이었으며, 소위 손을 많이 타지 않는 알아서 척척하는 키우기 쉬운 딸이었다.
내가 다 자라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알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더 그들의 가슴을 후볐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지만.
너무 일찍 자라 버린 그 어린아이는 어쩌면 아직 내 마음속에 자라지 못한 채 남아있는 것 같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다른 부모와의 비교, 부러움이 그 아이를 집어삼키는 걸 보면.
때로는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아빠에 대한 서운함과 미움에 몸서리쳤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아빠와 내가 함께 나이를 먹어갈수록 , 그 마음도 쪼그라들어 미움은 연민으로 바뀌어 갔다. 무뚝뚝하고 거의 매일을 술의 힘을 빌어 살아도 건강했던 그가 이제는 지팡이의 도움 없인 제대로 걷지도 몸을 가누지도 정확히 듣지도 못하는 아빠가 되어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현실 앞에서 나는 스스로 충돌했다.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 없어, 아빠한테 받은 것에 비해 많은 걸 이미 해 줬잖아 ‘라는 악하고 비겁한 마음과 ’그래도 아빠잖아, 그렇다고 나한테 딱히 못해주고 폭력을 쓰는 막장 아빠도 아니었는데? 너무 불쌍해 ‘라는 양가감정이 나를 휩쓸고 갔다.
하지만 결국 외면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외면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나는 몇 개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아빠에게 보청기를 선물했다.
잘 들리지 않게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삶의 질을 끌어내린다고 한다.
인간의 기본 권리인 소통조차 원활하게 할 수 없다는 현실에 자존감도 바닥을 향해 간다.
단순히 들리고 안 들리고의 문제가 아닌, 사람다운 일상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한 선물에 처음으로 주름 가득한 얼굴 위 눈물 맺힌 그가 , 여러 숨을 삼키며 망설임 끝에 뱉어낸 세 음절은 우리의 관계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고맙다”
그 세 음절 안에는 고마운 마음보단 미안한 마음이 컸다는 것을 엄마를 통해 전해 들었다.
잘해준 것도 없는데 , 받아서 미안하다는 마음.
어쩌면 난 이미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어린 시절의 나를 돌보았던 것처럼, 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그들을 돌보는 데 써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더 이상 한 치의 못난 마음도 앞세우지 않고 기꺼이 사랑으로 그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오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