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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Sep 14. 2023

여행 없이 살기


여행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어릴 적 내 꿈은 세계 일주였다. 세계 명소 관광보다는 배낭 하나 메고 발길 가는 대로 세상을 누비는 도보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빛바랜 그 꿈이 설령 이루어지지 못하여도 그리 아쉽지만은 않은 건 아마도 이미 나의 일상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지칠 때면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여행을 통해 일과 휴식의 균형을 이어갈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대개 여행은 현실의 도피처일 때가 많다. 그렇게 떠난 여행지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후유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시금 여행을 꿈꾸게 된다. 여행을 꿈꿀수록 우리에게 현실은 자꾸만 멀어져만 간다.


나는 더 이상 현실 도피를 위한 여행을 꿈꾸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로 채워지니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잦아들게 되었다. 일상에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을 하나둘 발견해 나가기 시작하며, 낯선 곳에서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욕심도 자연스레 흩어졌다. 나를 위한 시간을 특별한 며칠이 아닌 오늘로 가져오자 나의 하루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졌다.


새로움이란 반드시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에도 있다. 집 앞 공원에서 발아래로만 시선을 돌려도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나의 시선만 조금 돌리면, 내가 세상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어제와는 다른 그림이 바로 지금 여기에 그려진다.


먼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돈과 시간을 내어 좋은 곳에 가지 않아도 내 발길 닿는 그곳이 여행길이다. 읽고 싶은 책을 빌리러 가는 도서관 산책, 오늘 먹을거리를 사러 시장에 장을 보러 가는 길, 부른 배를 소화시킬 겸 한가로이 걷는 저녁 산책길. 내 마음이 평화로우면 오늘 걷는 이 길에서 피어나는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어딘가로만 떠나야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란 내 것이 아님을 이제는 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의 여행자다. 그것을 아는 자는 애써 밖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세상 모든 곳을 돌아본다 한들 더 많은 깨달음을 얻고 삶을 더 배울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고향 땅을 벗어나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라. 흙에서 태어나 한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나무들을 보라. 내가 어디에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나로 머물고 있느냐이다.


내가 언젠가 여행을 떠난다면 새로운 삶의 터전을 탐색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내 삶의 새로운 지각 변동일 것이다. 그 또한 내 삶의 여행길.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의 여행자로 살아가기로 했다. 그곳이 어디든. 나는 여행하듯 이 땅에 잠시 머물다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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