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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Sep 16. 2023

드라마 없이 살기


나는 드라마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챙겨 보는 드라마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드라마를 아예 보지 않는다. 결제하고 있는 OTT 서비스도 없다. 어릴 때처럼 TV 앞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아도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만 결제해서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TV도 눈치 보지 않고 시청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음에도. 어느 순간 그토록 좋아하던 드라마에 대한 애정이 사그라들었다.


드라마를 볼 때면 전편을 한 번에 몰아서 보는 걸 선호했다. 드라마를 한 회씩 끊어서 보는 것은 취향에 맞지 않았다. 흐름이 끊기는 게 싫었다. 드라마 하나를 보려면 날을 잡고 봐야 했다. 최소 하루, 적어도 이틀 안에 다 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것도 하나의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선뜻 1화를 재생하지 못한 드라마가 많다.


그렇다면 비교적 긴 호흡의 드라마 대신 짧은 호흡의 영화를 즐겨 보느냐? 그럴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영화 없이 살기' 편에서 앞서 언급했듯이 최근엔 영화도 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극장에 간 지도 벌써 몇 해가 흘렀고 집에서도 영화를 보는 횟수가 차츰 줄어들었다. 확실히 영화와 드라마 모두에 흥미가 떨어진 게 사실이다.


한동안은 보고 싶은 드라마가 없어서 안 보고, 다음엔 드라마를 몰아서 보는 게 힘들어서 안 봤다면 이제는 드라마가 보고 싶다는 욕구가 들지 않는다. 내 인생에 드라마가 필요가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온 것이다. 한 때 드라마의 각본을 쓰거나 연출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을 만큼 드라마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가졌던 사람이 떠나가는 드라마에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더 이상 재밌는 드라마, 심금을 울리는 드라마가 없어도 괜찮은 건 아무래도 책이라는 좋은 친구를 만난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기 시작하며 영화와 드라마뿐만 아니라 유튜브까지 모든 영상 매체와 거리가 멀어졌다. 책이 주는 고요함이 좋았고 거기에 빠졌다. 단순히 지식을 얻어서가 아니라 글에서 묻어나는 작가의 삶의 지혜와 통찰력이 가슴에 진한 무언가를 남기고 가곤 했다.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은 내면적인 성장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렇게 책과 함께하게 되었다.


최근에 발견한 특이점이 하나 있다. 오랜만에 영상을 볼 때 느끼는 바에 대한 것이다. 외부 자극이 줄어든 환경에서 혼자 조용하게 지내온 탓인지 영상을 볼 때 쉽게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예전보다 몰입감이 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영상에 쉽게 빨려 들지 않고 거리감이 느껴진다. 특히 자막이 많은 영상이 그러하다. 그래서 유튜브를 볼 때도 소리를 끄고 보거나 화면은 끄고 소리만 듣곤 한다. 이 방식이 더 편안하다. 갈수록 영상매체와의 거리감이 더욱 벌어지는 걸 체감하고 있다.


요즈음 새로운 변화도 생겼다. 바로 웹툰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 웹툰을 보는 것도 책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만화는 시각적으로 화려하지만 소음이 없다는 점이 매력이다. 웹툰을 보다 보면 혼자 각본을 쓰고 그림까지 그리는 웹툰 작가들에 감탄하곤 한다. 움직이지 않는 한 페이지에 함축된 묘사와 연출이 때로는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보다 더 놀라움을 자아낸다.


하지만 웹툰도 연재 형식이라는 점에서 드라마와 별반 다르지 않다. 웹툰은 따로 알람을 켜두지 않고 관심 있는 웹툰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보고 싶을 때만 앱을 열어서 보고 있다. 가끔은 완결된 웹툰을 하나 골라 전편을 결제해서 보기도 한다.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내 안에 있던 시각적인 갈증을 해소하는 정도로만 즐기고 있다.


이전처럼 드라마 속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와 고군분투에 몰입하지는 못하지만 아쉽지 않은,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소소한 즐거움을 밖이 아닌 안에서 찾기 시작했다. '내 인생의 드라마'라는 진부한 말을 갖다 대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나는 내 스토리에 몰입하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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