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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Oct 03. 2023

패딩 없이 살기


패딩이 없다. 겨울 외투라고는 롱코트 한 벌이 있다. '얼죽코(얼어 죽어도 코트)'가 아니라 얼어 죽지 않으려면 코트라도 입어야 하는 단벌 인간. 코트 하나로 어떻게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선은 비교적 따뜻한 지역에서 살고 있어서라고 답하겠다.


코트 안에 옷을 여러 겹 껴입으면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문제는 '버틴다'는 것이다. 사실 추위를 버텼다기보다 패딩을 구입하지 않고 버틴 쪽에 가깝다. '이번 겨울엔 꼭 패딩을 사야지' 다짐했건만 마음에 드는 패딩을 만나지 못한 채 몇 번의 겨울을 보냈다. 그렇게까지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는 못한 모양이다. 돌이켜 보면 패딩 없이도 따뜻한 겨울을 났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처음부터 패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생 때 입었던 민트색의 롱패딩이 하나 있었고, 성인이 되어 구입한 베이지색 숏패딩이 하나 있었다. 작지만 몸이 들어가는 민트색 패딩은 집 안에서 입었고 베이지색 패딩은 외출 시에 입었다. 그러다 숏패딩도 집에서 가끔 입기 시작했는데 오염이 되고 주머니가 찢어지는 바람에 몇 해 전 오래된 어린이 패딩과 함께 버렸다. 저렴하게 구입한 패딩이라 깨끗하게 세탁하고 수선을 하기보다는 "그냥 새로 사지 뭐." 그땐 그런 생각이었다.


겨울 패딩을 물색하며 코트 안에 입을 수 있는 경량 패딩 하나, 엉덩이를 덮는 롱패딩 하나를 장만하려고 했다. 물론 고민할 동안 겨울이 다 지나가버렸지만 말이다. 코트 안에 경량 패딩 하나만 껴입어도 훨씬 따뜻할 듯싶지만, 그보다는 코트를 패딩으로 바꾸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그러니까 단벌 인간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고 '얼죽코'만 탈출하는 것이다. 드라이클리닝을 해야 하는 관리가 까다로운 코트 말고 물세탁도 되고 관리와 보관이 편리한 패딩이 여러모로 편해 보여서다.


그동안은 패딩이 간절한 날은 일 년에 고작 며칠이었다. 더군다나 코트를 좋아했기에 패딩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올겨울엔 사정이 다를 것 같다. 지난해 찾아온 한파는 생전 처음 겪는 겨울 추위였다.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씨가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었다. 이제는 패딩을 장만할 때가 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보인다.


얼마 전 중고거래 앱을 슬쩍 들어가 보았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벌써부터 옷장 정리를 했는지 꺼내 놓은 패딩이 제법 많았다. '어떤 패딩을 만날까?' 아직까지 한 번도 중고 옷을 사본 적이 없어서인지 조금 설렌다. 물세탁이 가능할 것, 이왕이면 동물 털을 사용하지 않은 것, 색상과 사이즈까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다. 패딩을 고르는 기준이 한층 더 까다로워졌다. 이래서 패딩을 못 산 걸까.


중고거래 앱에서 찾지 못하면 가족과 지인들에게 버리기 아까운 패딩을 요청해 볼 생각이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옷을 물려 입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제는 얻어 입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오히려 적극 환영하는 쪽이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버려지는 게 아까워서다. 내가 버린 패딩이 아까워서. 늦게나마 물건의 순환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던 태도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옷은 함부로 사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옷을 고르는 데 까다로워졌지만 그 기준 덕에 불필요한 낭비를 줄일 수 있을 테니까.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따뜻하고 편안한 겨울옷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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