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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Jan 19. 2024

매일 먹는 집밥이 맛있어서 곤란해

푸드 미니멀라이프


겨울이 되면 시금치를 꼭 먹어야지. 제철 맞은 세발나물도. 올겨울엔 무를 듬성듬성 잘라서 햇볕에 말려 무말랭이밥도 해 먹고... 무와 배추도 절여서 내 입맛에 맞는 김치도 만들어 보고... 가을에서 겨울로 진입하며 올겨울 식량에 대해 구상한 것들이다.


그런데 1월 중순이 넘도록 여태 시금치 맛을 못 봤다. 이럴 수가. 세발나물도 무말랭이도 무소식이다. 매일 먹는 음식이 맛있어서다. 그렇다. 매일 먹는 집밥이 맛있어서 곤란하다.


가을부터 밥반찬으로 단감무침만 주야장천 먹었다. 고구마, 무, 배추, 당근, 호박... 그때그때 집에 굴러들어 온 채소를 넣어 지은 냄비 밥도 즐겨 먹었다. 부모님이 이모 네에 가셔서 같이 담근 김장김치 하나에 밥만 2주 넘도록 먹었다. 한 달 동안 조미료는 소금 하나만 먹었던 기록은 두 달이 넘게 이어져 신기록을 세웠다. 내가 요즘 먹는 집밥은 채소밥이나 채소국에 소금 간을 해서 먹는 게 전부다.


매일 먹는 음식이 매일 똑같이 맛있을 가능성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그것도 일주일, 2주, 한 달 가까이. 보통 기간이 길어질수록 낮아지지 않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려야 정상 아닌가. 나는 왜 100%에 가까운 것 같지. 어제 먹었던 밥을 입에 넣으며 마치 오늘 처음 먹은 것처럼 감탄하며 음미한다. 이렇게 맛있어도 되나. ‘아는 맛’이 콧김이 나올 정도로,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맛있다. 도대체 매일 먹는 밥이 왜, 어떻게 맛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먹는다. 누구보다 맛있게.


특별한 요리법도 없고 특별한 재료도 없는데 신기한 일이다. 내 손으로 장을 보지 않은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었다. 가족들의 외식에 밀려나 상해 가는 채소를 사수하며 부지런히 먹기도 바빴으니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매일 고만고만한 집밥을 먹는다.



요즘 먹는 고구마무밥. 다시마, 소금을 함께 넣어 밥을 지었다.



식비를 절약할 목적도, 건강을 위해 음식을 가려 먹으려 노력한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차린 밥 한 그릇, 국 한 그릇에 만족했을 뿐. 최근 몇 개월은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었다. 그렇지만 식욕은 항상 넘치고 소화도 잘 되는 몸. 힘든 육체노동을 하지도 않는데 밥이 꿀떡꿀떡 넘어가서 민망할 정도다. 그 나물에 그 밥이 이토록 맛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자발적으로 음식을 비워내니 가능한 일이었다. 자연식물식을 시작한 뒤로 단순한 식생활에 적응했고 최근 일 년 사이 집밥은 더욱 간소화되었다. 지금 내가 먹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것저것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어서 괴로울 일은 앞으로도 없을 듯하다. 봄에는 봄나물 하나, 겨울에는 무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만큼 맛에 관대해졌다. 외식 한 번 안 해도 되고, 고기반찬이 없다고 투정 부릴 일도 없으며, 밥에 김치만 있어도 잘만 먹는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채식을 기본으로 고수하지만 김치에 젓갈이 들어갔다고 사양하지도 않는다. 대신 엄마와 이모의 사랑이 들어가 있는 음식이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다. 밥에 생김만 싸 먹어도 맛나게 먹고, 반찬이 없으면 밥만 떠먹어도 맛있다고 먹을 테다. 이번 계절에 맛보지 못한 제철 음식도 다음 계절로 기꺼이 양보한다. 꼭 먹어야 할 음식이란 것도 없어졌다. 그런 입맛이 되었다. 이것도 복이지 않을까.


내가 원하는 맛은 집 안에 있고 가까운 시장에 있다. 먼 곳에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여유롭고 자유로울 수 있다. 매일 먹는 똑같은 음식이 맛있어서 사실 행복하다. 이것만 먹고도 살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충만함. ‘오늘 뭐 먹지?’ 지옥에서 벗어난 것. 매일 똑같은 음식을 즐기는 것. 비상시가 아닌 일상에서 발휘되는 이 특별하지 않은 사소한 능력이 조금은 얼떨떨하기도 하다. 최소한 먹고 살 걱정은 없겠구나. 그 무엇보다 귀한 능력을 얻은 것만 같다.


이 또한 자유라는 걸 안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자유.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유, 먹기 싫은 음식을 안 먹을 수 있는 이 자유에 감사하다. 소박한 음식을 먹을수록 음식을 가려 먹는다는 게 얼마나 사치인지 마음 깊이 새기게 된다. 때문에 적어도 먹는 것으로 사치 부리지는 않으리라. 단순하고 소박한 밥상의 기쁨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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