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넣어 이동 중에 읽을 책이 필요했다. 예쁘고 얇은 이 책 그렇게 나와 인연이 되었다. 책에 관한 이야기라는 단순한 접근으로 집어 들었던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자투리 시간이 아니라 이 책을 위한 시간과 공간과 마음이 필요했다. 작은 책 안에 너무 많은 세계가 들어있어 조금 무거웠다.
작가 보후밀 흐라발(1914~1997)은 체코 브르노에서 태어난 작가다. 프라하 카렐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학교가 폐쇄되고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하며 생존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주인공 한탸의 직업인 폐지 압축공도 그가 거쳐간 직업 중 하나다.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으나 단연 폐지 꾸리는 일을 하면서 느끼고 보았던 것들이 이 글의 모티브가 된 것 같다.
이 책은 한탸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짧은 소설이지만 난해한 장문의 시 같기도 하고 읽고 또 읽어도 계속 읽을거리가 나오는 묘한 책이다.
지하실 위로 천장에 난 한 곳의 통로를 통해 쏟아지는 책과 한 줄기 빛이 전부인 곳에서 35년째 폐지를 압축해서 꾸러미로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버려야 할 종이로 된 쓰레기지만 한탸에겐 그냥 보낼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좋은 책이 들어올 때마다 추려내고 읽고를 반복하다 보니 생산성이 떨어진다. 일을 시키는 소장 눈에 그는 그저 무능하고 꾸물대는 주정뱅이다. 수집해 온 책들을 읽는 동안 한탸는 한 꾸러미의 압축된 백과사전 더미를 보며 자신을 투영한다.
쓸모없게 되어버린 지식의 덩어리.
한탸는 공산주의 체재 아래에서 살아내야 했던 자신의 삶 35년을 8장의 이야기로 풀어가며 러브스토리라고 표현한다. 이 책에는 그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순차적으로 나온다. 그는 매번 그 사랑의 대상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그 끝은 언제나 힘들었다. 책에서 배운 대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그런 일련의 상황들이 어이없게도 그를 허무주의자로 몰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2차 세계대전 독일의 침공으로 체코의 모든 지식인들은 검열과 통제하에 놓이게 되고 일부는 망명을 한다. 생존을 위해 선택했던 깊은 곳, 최악의 환경에서 쏟아지는 책을 분류하며 문학과 철학, 종교, 예술을 배운다. 그리고 위안을 느끼고 행복을 찾아간다. 무의식 중에 일어나는 즐거운 상태, 몰입에 이른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책을 통해, 책에서 배워 안다.'
하늘이 계획한 자연의 법칙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의 간극을 느낄 때마다 한탸는 괴로워한다. 모순과 역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의 순간들, 책의 가치를 알뿐만 아니라 책이 전부인 한탸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을 쓰레기로 만드는 일은 매 순간 즐거움이며 동시에 고통이다. 스스로 책을 압축해서 파괴하는 행위와 그 사이 존재하는 생물들의 죽음을 목도하며 익숙해짐을 괴로워하는 한편 지하에서 우글거리며 떼 지어 싸우는 쥐들을 보며 조국의 현실을 상기하고 때로는 책 더미와 함께 사라져 가는 그것들에 어느 순간 해방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다. 죄를 지으면 언젠가는 벌을 받게 된다는 갈등을 느끼며 글을 읽고 사유할 수 있음에도 소리 내어 저항할 수 없는 현실에 하늘을 원망하기도 한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고 사람도 그렇다고.
'폐지를 압축하는 사람 역시 하늘보다 인간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건 일종의 암살이며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이 도시의 모든 하수도에서 절망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하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 변함없이 창궐해 있었다.'
희귀본이나 양서가 들어올 때마다 수집해 집으로 날라다 놓은 책들은 집안 구석구석을 채우고 책과 책 사이에서 잠을 자느라 키가 줄어든 자신을 발견하는 대목은 사뭇 충격적이다. 타인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한탸조차도 그가 원했던 단 하나, 책의 무한 소유와 욕망으로부터 그를 구원해 내지 못하고 짓눌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 욕망이 무엇으로 치환되는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다만 욕망을 짊어진 무게만큼은 모두 똑같을 터. 심지어는 스스로 초인이 되어가고 있던 한탸마저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는 책 앞에서는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대목이다. 인간적이다.
한탸는 폐지의 저자들을 한 번도 가담한 적이 없는 전투에서 패배한 교양인들이라며 그들의 역할은 글을 통해 세상을 설명하고 진실에 가깝게 표현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한탸가 글로 배운 세상은 젊음과 늙음, 전진과 후퇴, 발전과 퇴보를 반복하는 곳이며 상반된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라 생각한다.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의 파괴로부터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고 뜻하지 않게 쌓게 된 교양으로 스스로를 관조하고 지켜나가는 역설과 균형의 삶. 절망 속에서도 몰입을 통한 실존적 삶에 대한 해법으로 행복 찾기. 그런데 책을 제외한 그 어느 것으로부터의 욕심도 열망도 없이 모든 것을 순순히 내려놓던 그가 맞은 결말은 사실 너무도 뜻밖이다. 이 책의 반전이기도 하다.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대장간 풀무가 그렇고,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 만사는 절룩 꺼리면서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나는 삼십오 년째 폐지를 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대학 교육을 받았거나 적어도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을 받았어야 하리라. 최적의 조건은 신학 학위가 아닐까 싶지만. 내 직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는 나선과 원이 상응하고,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regressus ad futurum;미래로의 후퇴)와 레그레수스 아드 오르기넴(progressus ad originem;근원으로의 전진)이 뒤섞인다. 그 모두를 나는 강렬하게 체험한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사람인데,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progressus ad originem;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regressus ad futurum;미래로의 후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이제야 깨닫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하며 <프라하 석간신문>을 읽듯이, 이제 나는 그런 생각들을 소일거리로 삼는다. '
삶이 부조리함을 책을 통해서 배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자신은 그 시끄러운 소음(압축기가 있는 공간의 물리적 소음과 글을 많이 읽어 생각이 뒤엉키는 내면의 소음) 속에서도 스스로 각 분야의 철학자들과 종교인과 위인들을 통해서 지혜를 배워가는 중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은퇴를 하면 오래된 압축기를 사서 폐지를 압축해 쌓아 놓는 (설치미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것을 상상하며 꿈을 꾸던 사람이 절망하는 시점은 공감이 된다. 자신이 보물처럼 여기던 책들에 대한 타인의 태도, 다른 사람들에게 폐지는 그냥 재활용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이 자동화가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그리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의식도 아니며 경건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 일. 산 같은 폐지 더미에서 보물을 찾듯 몰두하며 좋은 책을 간추려 내고 남은 것들을 깔끔하게 포장하는 일. 그것은 그에게 종교의식과도 같은 행위였으며 그 사이 기생하는 쥐며 벌레들에게 드는 미안함은 동시에 전능함을 주는 절대적인 일이었다. 위기의 조국에서 버티며 살아온 자신에 대한 존재의 의미였고 견뎌낸 스스로를 뿌듯해하던 한탸였다. 그러던 그에게 자동화시스템과 자신의 쓸모없음은 저항과 거부를 야기하는 기폭제가 된다.
기계화와 생산성, 우유와 코카콜라의 등장과 새 시대가 요구하는 새 인간.
'나는 새로운 삶에 절대로 적응할 수 없을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가 더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밝혀내자 대거 자살을 감행한 그 모든 수도사들처럼 그때까지 삶을 지탱해 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그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거다. 소장은 나더러 마당에 나가 비질을 하라고 했다. 일손이 필요한 곳에 가서 거들든지,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아무 일 안 해도 좋다고. 다음 주면 나도 그곳을 떠나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도록 되어 있다고,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삼십오 년을 잉크와 얼룩 속에서 일해온 내가, 더럽고 냄새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선물과도 같은 멋진 책 한 권을 찾아낼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매 순간을 살아온 내가, 이제 비인간적인 백색 꾸러미들을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다니! 이런 통고를 받자 나는 평정심을 잃고 벌렁 나자빠졌다. 흐느적대는 꼭두각시처럼 계단 맨 아랫단에 주저앉았다. 소장의 통고에 마음이 몹시 갑갑해졌고, 입가에는 실성한 미소가 떠올라 사라질 줄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낼 때도 행간에 느껴지던 물아일체의 느낌. 체코 작가에게서 가당키나 한 상상인가 싶지만 한탸는 동서양을 넘나들며 선인을 만나고 지혜를 구했다. 나만의 생각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전쟁 속에 그가 세상을 등지고 돌아가던 방식이 그렇다.
책을 너무도 좋아했던 한 사람의 삶. 비록 소설이지만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자전적인 내용이 많이 투영되어서인지 몰입감이 대단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을 넘어선 열반이라 해야 하나....
'태어나는 건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고 노자가 말한 이유는 뭘까? 밤의 흔들리는 빛과, 신학교 교육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 작업. 이 두 가지를 떠올리면 어김없이 머릿속에 새로운 감탄이 차오른다. 생각하면 전율이 인다.....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
'난 세네카요, 소크라테스다. 내 승천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그 무엇도 나를 내 지하실에서 몰아낼 수 없을 것이다.'
바깥으로부터 오는, 자신을 넘어서는 초인적인 무언가를 찾고 싶어 했던 그가,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던 그가 열망하던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일이 이런 식의 결말이었을까.... 묻고 싶다. 사랑한 모든 것들과 그의 바람이 어긋날 때마다 책 속의 현인들을 만나며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타인에게도 너그러웠던 사람이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 애쓰고 자신을 일으키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그 사이 세상은 바뀌고 변화된 세상 앞에 자신을 더 이상 구해내지 못한다. 책을 읽는 내내 상상하지 못했던 결말이다. 더불어 여운도 길어지고 혹시 중간에 흐름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가기도 했다. 신진문물과 기계화가 그의 절망의 전부라면 여전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세상의 모든 지혜를 들여다보고 성찰했지만 마지막에 대한 준비는 뜻대로 되지 않았던 한탸… 만나본적 없이 잊지 못할 사람이다.
이번 회차부터는 블로그에 이미 올려진 글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책을 골라 수정한 내용이므로 공개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