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하늘HaruHaneul Jun 19. 2024

수요일의 이야기-중년일까? 장년일까?

중년일까? 장년일까?

아파트 정원 전지하는 소리가 며칠간 지속됐다. 동글동글 예쁘게 이발을 한 사철나무들이 저마다 깔끔한 모습으로 단장 중이다. 옆을 스쳐가는 중에 생토마토 싱그러운 냄새가 났다. 나무에서 토마토 냄새라니 진짜인지 둘러보게 된다. 나만의 오해일 수도 있다.


눈과 추위를 겨울을 이겨내고 여름에도 왕성한 발육을 보이는 사철나무.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전구와 한 몸이 되고 여름에는 다시 돋아난 다른 나무들과 한 몸이 된다. 늘 그렇게 푸르다. 그래서 좋은 거냐고 물어본다. 대답이 없다. 그럴 수밖에... 나무는 말을 하지 못한다.


늘 푸른 나무를 보다가 세월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나를 돌아본다. 아주 오래된 나무다. 수명이 정해져 있고 갈 길이 분명한 나무다. 100세 수명이라 쳐도 이미 살아온 날이 더 많다. 살아갈 날이 더 짧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뭐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다. 덤이라 생각하는 매일이니 부담이 없어 좋다.


마흔이 넘던 그때 솟아나던 흰머리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익숙하지 않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노화라는 걸 알게 됐다. 사춘기만큼 낯선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의연해지고 노화에 놀라던 40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이였는지 깨닫고 있다. 청춘의 끝자락 같았던 시간. 성숙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나이. 누군가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을 50대라고도 하고 60대라고도 한다. 아직 그 시간보다 그리운 시간이 40대인걸 보면 아프기 전에 뭐든 할 수 있는 시간쯤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마흔이 되면 무엇을 다시 하고 싶는 걸까?

사실은 그 시간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다. 당황했고 어쩔 줄 몰라하며 보낸 40대가 조금 아깝고 아쉽다. 조금만 철이 일찍 들었더라면 자신을 조금만 더 깊이 돌볼 줄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에너지와 노력이 내가 아닌 사람들에게 집중되던 시기이고 병이 나고서야 비로소 나에게로 돌아왔다. 아파야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다.


후회는 아니지만 아쉬움이 남았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나를 돌보는 시간대로 접어들었다. 고장 난 스스로가 불편하지만 그런대로 익숙해지고 있다. 적응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음은 물리적 나이나 시간과 함께 늙지 않으니 어른인 척하려면 애써야 한다. 들리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고 귀가 순해지며 너그러워지지는 않았지만 예전 기준으로는 잔치를 할 만큼 제법 나이가 든 게다.


어른이 되려고 애쓰는 중이다. 주책을 덜어내고 깊어지려다 보니 홀로의 시간을 즐기게 된다. 소음이 잦아들어야 내면에 집중하게 된다. 산만하고 부산함이 어린아이의 그것보다 더하다. 그러하다 보니 조용함을 누리지 않으면 자신을 돌아볼 수가 없다.


엉망이 된 근육에 익숙하려 느리게 행동하고 실수를 줄이려 천천히를 되뇐다. 새로운 언어인 디지털 문맹을 벗어나려 하니 배워야 할 것들이 지천이다. 나이가 드니 배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다. 알던 것들이 지극히 한정되고 협소했음을 세상 밖으로 나와보니 알게 됐다. 전문가였노라 스스로 위로하며 궁극의 독립을 위해 부지런히 나를 단련한다.


신중년이니 장년이니 하는 분류에서 홀로 낄 곳을 물색한다. 마음은 장년인데 몸은 중년을 지나 그 이상이다. 물리적으로는 노년으로 분류되기 직전이다. 그럼에도 염치없이 조금 더 젊은 쪽으로 셈을 한다. 내 마음이니 어떠랴... 그렇게라도 자신을 독려하며 마주한 나의 현재에 힘을 보태준다.




https://youtu.be/qJMPNlKVR-E?si=4QAvXfclbcs9G26d






작가의 이전글 변화에 대한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