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묘보살과 민바람 Oct 06. 2022

[번외편] 노동의 장면들 (1)

 


1. 대학에 들어가 1년간은 큰 편의점에서 일했다. 본사 직영이라 하루 12시간씩 서 있었지만, 고작 예닐곱 살 연상의 청년이던 점장님들의 진지한 인생론을 듣는 게 꽤 재미졌다. 힘들었던 건 딱 하나다. 정산을 할 때마다 뭔가에 씌인 기분이 드는 것. 분명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거스름돈을 내줬는데 늘 돈이 비었다. 많을 때는 1만5천 원씩 차이가 났다. 그때 최저시급은 2500원이었고, 내 시급은 평일 1800원, 주말 2200원이었다. 종일 비장하게 번 돈의 반 이상이 손바닥에 안겨보지도 못하고 떠나갈 때마다 허탈했다. 신기하게도 다른 알바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고, 그보다 더 신기한 건 돈이 남는 일은 없다는 것. 아니, 사람이 이 이상 어떻게 더 정신 차리고 계산할 수 있는 건데? 왜 나만? 왜?? 이건 음모다, 트루먼쇼다, 세상이 나를 속이고 있다. 이 생각이 멈추는 지점은 늘 같았다. ‘일이 재밌잖아. 나는 경험으로 버는 거지.’ 내 정신승리 기술은 그때 한 번 도약을 이뤘다.  



2. 정리하는 일을 좋아했다. 집에서 하는 정리 말고, 돈 받는 정리. 문구점에서 일할 때는 물건을 나만의 규칙대로 정리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다행히 사장님께서 빨리 끝내는 것을 중시하지 않으셔서 큰 스트레스 없이 일할 수 있었다. “보살이는 일을 참 재미있게 하는 것 같아.”라며 칭찬까지 받았다. 다만 너무 재미있었던 나머지 과몰입한 일에서 다른 것으로 주의를 잘 돌리지 못했고, 손님이 질문할 때는 "(흘긋) 저쪽에 있습니다. (다시 정리)" 같은 식으로 성의 없는 대응을 하다가 지적을 받곤 했다. 이 질문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로부터도 오랜 경험이 필요했다. ‘뭣이 중헌디?’    



3. 31가지 아이스크림집에서 일하던 때, 가장 단단한 아이스크림은 녹차였다. 그리고 제일 인기가 많은 것도 녹차였다. 겨우 일주일에 이틀, 두 달간 일했을 뿐인데 팔에 생긴 ‘녹차 근육’은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건재하다. 하지만 일보다 힘들었던 건 짝사랑하던 아이가 왜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고문이었다(사실은 오라고 한 적도 없었다). 형광분홍색 앞치마와 캡을 장착한 채, 아이스크림처럼 다디단 꿈과 생각대로 안 되는 딱딱한 현실 사이에서 두 팔로 삽질을 했다. 새벽 퇴근길에는 부은 손을 바라보며 자기연민에 빠지곤 했다.     



4. 어머니가 구멍가게를 하시던 시절, 우리 가게 앞에 비디오·책 대여점이 있었다. 일은 단순하고 재미있었다. 특히 사장님 안 계실 때 성인 만화를 몰래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아마도 CCTV로 다 보고 계셨을 것 같은데, 그땐 미처 생각지 못 했다).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 사장님은 어머니께 “참 일 잘하게 생겼네요.”라고 나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셨고, 몇 달 후에는 이러셨다. “보살이가 똑똑하지는 않더라구요.” 결정적으로는 아마 사장님이 전화기 밑에 일부러 깔아두던 비닐봉지를 굳이 꼭꼭 접어서 치웠기 때문인 것 같다. 한… 서른 번쯤?     



5. 일본에서 한국어 과외를 할 때 대상은 50-70대의 품격 있는 어르신들이었다. 어느 날 나는 충동적으로 한국 음식을 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기숙사에 초대는 했는데, 나는 요리를 할 줄 몰랐다. 뭘 만들지? 미역국과 떡볶이, 채소전 등 쉬워 보이는 것을 하기로 했다. 먹어본 짬이 있는데 대충 아는 대로 하면 맛이 나겠거니. 요리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약속날 새벽까지 이런저런 일정에 치였다.


 까무룩 잠들었다 깨 보니 모임 시간 30분 전. 나는 패닉에 빠져 내 방의 작은 주방에 대충 널어둔 재료 틈바구니를 탁구공처럼 오갔다. 울어버릴 것 같은 때 옆방에 묵던 동기가 찾아와 나를 진정시키고 거들었다. “언니, 이럴 때일수록 천천히 해야 해.”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나는 어르신 여덟 분을 40분 가까이 기다리게 한 뒤 아래층 교실로 음식을 내갔다. 식사 시간은 내내 고요했다. 빈말도 우아하고 빈틈없게 하시던 학생분들 사이로 느껴보지 못한 냉기만이 오갔다. 당시에 가장 대가리가 꽃밭이던 나는 이유를 몰랐다. 그 음식들이 얼마나 끔찍한 맛이었을지 생각하면 민망함의 폭풍이 몰려온다. 손님들을 전송하고 내 방으로 돌아온 뒤, 무심코 거울을 보았다. 피로로 상기된 내 양볼에는 아침에 펴 바르려다 까먹은 BB로션 덩어리가 연지처럼 툭툭 얹혀 있었다.   



6. 그 시절과 함께 떠오르는 떡집 사장님. 70대 노인이셨지만 자신에게 ‘(이름) + 쨩’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그만큼 천진난만하셨고, 그만큼 속이 시커매서 1년 내내 나와 내 친구들의 브래지어끈을 슬쩍슬쩍 더듬었다. 어렸던 우리는 “한국 돌아가면 안 볼 거잖아.”라며 서로 다독이고 참았다.


 그의 진면목을 모르던 초기, 쉬는 날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셔터 내린 가게에 들어간 적이 있다. 늘 같이 차도 마시고 일도 하던 방인데 그날따라 공기가 거북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깨 마사지를 해 주겠다며 다가드는 손놀림이 끈적했다. 놀라서 아무렇게나 둘러대고 빠져나왔다. 다음날 사장은 인생의 지혜를 전수하듯 말했다. “쉬는 날 혼자 차 마시러 온다는 건 ‘그렇게 하는 데’ 동의한다는 뜻이야.” 불현 듯 ‘그렇게’가 어디까지를 의미하는지 깨닫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실과, 뼛속까지 스며든 유교 문화가 이렇게 사람을 잡는다는 것 망치로 얻어맞듯 깨우친 순간이었다.



7. 열정페이로 인상적이었던 곳 중 하나. 2008년경 일한 아동서적 전문점이다. 초등생 전집 세트에 대한 미끼 상품으로 토요일마다 독서토론 강의를 했는데, 실제 근무는 주 4-5일이었다. 사장님이 교재 개발까지 같이 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교재개발비는 없었다. 한 달에 15만 원 남짓한 돈을 받으면서 토요일에는 5초 단위로 아이들 시선을 끌다가 탈진했고 평일에는 바닥난 창의력을 바닥이 뚫리도록 긁고 있었다.


  다행인지 혼자는 아니었다. 같이 일하던 S. 그에게는 열정페이라는 단어가 경의를 표할 만큼의 프로 정신이 있었다. 우리는 한 팀이었고, 꼴랑 그 돈을 받으면서 파워포인트 디자인을 밀리미터 단위로 정렬하던 그 프로 정신 때문에 속이 터졌지만, 그 이상으로 시원하게 속을 터놓을 수도 있었다. 게이다가 발달한 나는 그를 한 번에 알아보고 신이 나서 내 정체를 밝혔다. 그에겐 답 없는 연애 문제가 있었고, 심상찮은 집안 분위기에서 달아나지 못한 채 이런저런 알바로 석사과정을 버티고 있었다. 우리는 내가 해외로 잠적하기 전까지 몇 년간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이로 지냈다. 삶이 비슷하게 어수선했기 때문에 가능한 방식의 우정이었다.



8. 석사 과정 중 과정생들은 요일마다 스터디를 하고 다른 알바를 겸하며 매주 150장 정도의 논술 첨삭을 했다. 첨삭은 수업에 맞춰 강사 선생님들께 원고를 돌려드려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기한을 지켜야 했다. 이런 일정은 우리를 달인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어느 날 나는 120장을 하룻밤에 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기염을 몇 차례 더 토하자 ‘첨삭’이란 말만 해도 토할 것 같아 대신 ‘CS’라고 불렀다. 나는 지도교수님 연구실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때때로 아침 6시까지 CS를 초치기하고 대범하게 수업용 원탁에 올라가 잠을 잤다. 그리고 교수님이 문고리 잡는 소리를 듣는 순간 눈을 떠서 문이 열리기 전에 내 자리로 원위치하는 묘기를 부렸다. 모든 일이 따분하게 흘러갈 것 같은 대학가에도 이렇게 스릴 넘치는 순간들이 있는 것이다.    



9. 타이베이에 여행을 갔다가 대만에 꽂혀서 망설임 없이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았다. 여행 때 묵은 호스텔에 문의해 객실 청소와 아침 식사 제공을 돕기로 했다. 직원 중 외국인은 나뿐이었다. 배째라식으로 물 건너 왔으니 대만 말을 몰랐고, 어학원에 다닐 예산도 없어 점심시간엔 한국에서 들고 간 단어집을 공부했다. 하지만 말을 몰라도 동료 아주머니가 일거수일투족을 평가하며 투덜댄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오해를 받으면 항변할 능력이 없는 나를 대신해 다른 동료들이 편을 들어준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호스텔 매니저들은 내게 사무실과 통해 있는 창고 방을 내주었다. 환경이 좋지 않아 동료들은 걱정했지만 나만의 공간이라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어느 날 방에 돌아왔을 때, 변기 속에서 정체 모를 천 뭉치를 발견했다. 가지고 있던 물건이 아니었다. 동료 한 명에게 알리자 매니저들과 동료들이 내 방에 모였다. 창문을 다시 점검해 봤지만 사람이 넘어서 들어오기는 어려운 구조였다(애초에 누가 화장실을 쓰기 위해 4층 바깥에서 침입할까).


  처음부터 보안이나 직원들 처우에 관심이 없던 매니저들은 주작으로 몰며 상황을 덮었고, 동료 I는 같은 나라 사람이면서도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헌 란!” I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내뱉듯이 읊조렸다. 옆에서 다른 동료가 뜻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진짜 대충하네’, ‘막장이네’ 같은 뜻이라고 했다. 겉으로 멀끔해 보이던 그 호스텔의 운영 방식은 실로 그랬다. (손님이 쓰고 난 이불을 빨지 않고 다음 손님이 그대로 쓰게 하는 게 한 예였다) 나는 낯선 이가 언제든 들어올 수 있는 방에서 계속 머물 수 없어서 다른 호스텔로 이사해 출퇴근했다.


  새벽 6시 출근길마다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내가 몇 분 후 맞이할 혼란만은 훤히 보였다. 적당한 때 토스트기에서 식빵을 꺼내는 것조차 못하고, 들어오는 주문 숫자도 헷갈려하며 우왕좌왕하는 내가 한심했다. 그렇게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은 훨씬 컸다. 하지만 이때를 떠올리면 푸르스름한 우울의 기억 속에 동료들의 얼굴이 겹쳐진다. 민폐 덩어리에다 안 지도 얼마 안 된 외국인 노동자의 편을 들어주던 그네들. “헌 란!” 그 말을 내뱉던 I의 굳은 표정을 잊지 못한다.





2편

https://brunch.co.kr/@harukauranusian/156


매거진의 이전글 성인 ADHD 에세이 출간 뒷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