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묘보살과 민바람 Oct 06. 2022

[번외편] 노동의 장면들 (2)

10. 캄보디아에서 교사로 일하던 시기, 나를 잘 따르던 학생이 있었다. 그애는 딱 한 학기만 내 수업을 듣고 한국 대학으로 입학했는데, 캄보디아에 들어올 때마다 내게 연락했다. 그애를 좋아했지만 부담스러운 마음도 있었다. 주요우울장애의 시기였다. 선생님의 탈을 쓴 내가 어린애 같은 본모습을 드러낼까 무서웠다. 어느 날 밤, 잠깐만 집 앞으로 나와달라는 연락이 왔다. 골목에 나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애가 걸어왔다. 웃고 있었지만 눈 속이 깊었다. “선생님, 죽고 싶어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그냥 안아주었다. 그애도 심한 우울을 겪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편안해질 만한 위안을 주고 싶은데 방법을 몰랐다. 이렇게 나에게 의지하는 사람에게 나는 진심으로 마음을 내주고 있는 걸까. 나는 밤마다 달력에 X표를 추가하며 엎드려 우는 27살일 뿐이었다. 그 후로 한국에서도 그애와 종종 시간을 보냈지만 깊은 이야기로 내려가지는 못했다. 그때 용기 내서 마음을 물어봐 주었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한다.    



11. 교무실에서 학생을 지도하는데, 내가 가르치는 교재에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내 판단이 옳은지 확인해서 대답해 주려고 다른 선생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선생님, 그거 선생님 전공이잖아요!!!” 그 후로 많은 말이 쏟아졌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앉아있는 학생에게 창피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코디네이터이자 선배 교사였지만 우리는 협력 관계였고, 학생들 앞에서는 똑같은 교사였다. “알겠습니다.” 내가 무거운 한마디를 뱉고서야 목소리가 멈췄다. 퇴근 후 그는 전화를 걸어 내게 사과했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했고 학생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 했다. 업무가 과중하던 차에 남 몫의 일까지 짐 지우는 것으로 느꼈으리라 짐작했으나, 평소 그와 가치관이 다르고 열등감도 컸던 나는 마음이 돌려지지 않았다.


   결국 영혼 없는 관계로 남았지만, 그에게서 받은 게 상처만은 아니다. 그는 사실상 내 사수나 다름없었다. 무조건 빨리 해치우고 싶은 마음에 같은 서류에 두세 번씩 실수를 하고 돌려받을 때, “제대로 확인하고 전달하는 게 더 빨리 해결돼요.”라고 알려주었고, 물품을 제한 없이 신청할 수 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많은 양을 신청할 때는 자기 일이 아닌데도 일러주었다. “일 관계에서도 사람 마음을 생각해야 돼요.” 그때는 감사하게 듣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고마운 조언들이다. 2년간 함께 일하면서 나는 ‘구멍이 많은 사람’에서 ‘꼼꼼하고 구멍이 많은 사람’이 됐다. 그런 모순된 특성이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관계에도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여러 면모가 있다. 그를 떠올릴 때 드는 생각이다.     



12. 어학당 강사료로 월세 내기가 빠듯하던 때, 공항 보안 인터뷰 일을 구했다. 최저 시급을 받는 비정규직 알바였지만 제복을 입고 무려 공항에서, 출국하는 승객들에게 외국어로 이것저것 질문한다는 게 몹시 있어 보였다(“어디 가세요?”, “가방에는 뭐가 들었어요?” 같은 기초 수준 문장이었으나 나는 있는 힘껏 혀를 꼬아댔다). 그러나 쉬운 일은 없는 법. 서 있느라 허리가 아픈 것보다 힘든 것은 업무 유연성이 높아 눈치껏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대기시간마다 열 살 어린 스튜어디스 지망생들과 어떤 잡담을 해야 할지 몰라 태엽 장난감처럼 뚝딱거렸다. 팀 배정이 그날그날 달라지니 매일이 가시방석이었다. 입사 시기에 따라 은근히 선후배 개념도 있어서, 멍때리는 사이 큰 짐들을 선배가 날라 버리면 미묘하게 싸해진 분위기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영웅이 한 명 있었다. 나와 동갑이지만 십 년은 연상인 듯 쿨내를 풍기던 걸크러시 선배. 때때로 내 옆을 스쳐 가며 넌지시 일렀다. ‘이따 저거 해 둬요. 뒷말 좋아하는 사람들 있으니까.’ 그러고 다 알지 않느냐는 듯 씩 웃어 보일 때, 이 생각을 말로 뱉을 뻔했다. “뭐야, 존나 멋있어.” 그릇을 갖춘 사람이 털털하기까지하면 빛과 소금이 됨을 실감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털털했고 안 깨뜨리면 다행인 게 내 그릇이었으므로 함부로 따라하진 않기로 했다.


  일을 그만두고 지하철에서 우연히 그를 봤다. 너무 반가워서 서둘러 다가갔다가 과하게 친한 척하기 애매한 사이임을 깨닫고 멈칫했다. “일할 때, 진짜 고마웠어요.” “에이, 뭘요.” 최대한 촉촉한 눈빛을 보내는데 ‘고마웠다’는 표현이 작게만 느껴졌고, 또다시 바람에 쿨내가 실려왔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배려는 그렇게 한 인생에 고요히 새겨지는 것이다.     



13. 대학에서 한국문화 과목 강사를 선발한다고 했다. 경쟁이 치열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좋아하는 분야라 다시 급발진했다. 시범강의 20분 동안 내 진면목을 보여주겠어! 사물놀이를 이용해서 수업을 하고 싶었는데 내 장구가 없었다. 좋은 경험 하는데 뭐 이까짓 거. 17만 원 주고 장구를 샀다. 잔뜩 떨면서 시범강의를 했다. 이게 웬일. 장구채를 휘두르며 용을 쓴 게 먹혔는지 내가 뽑혔다. 세상은 가끔 쓸데없이 공평해서,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반을 맡고 공황발작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한 주에 2시간 수업을 위해 일주일 내내 고민하고 사비를 쏟았지만 반 분위기는 점점 싸늘해졌고, 예의 그 ‘앞담화’에 얼음 상태가 되는 일도 잦아졌다. 버스에서의 결정적인 앞담화로 인내심에 마침표를 찍어준 것도 그 과목이었다. 그날 이후 죽을 것만 같은 기분에 두 번 다시 그 수업에 나가지 못했다. 그간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고 일이 힘들었어도 내가 맡은 강의를 중도 포기하는 일은 없었거늘. 어쨌거나 끝은 끝이었다. 다음 달 통장에 찍힌 한 달 반의 강의료는 17만 원. 어쩐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숫자였다. 가끔 나는 의미 없는 대목에서 운명론자가 된다.     



14. ‘궁극의 일터’ 편의점에는 자전거로 다녔다. 여름에는 모자를 쓰고 겨울에는 담요를 두르고 탔다. 비가 오면 판초우의를 입었다. 편의점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퇴근길이 좋아서였다. 교대를 마치고 밤 10시. 짐을 바리바리 부려 싣고 페달을 구르면 곧바로 강변길이 시작됐다. 고층건물 불빛이 쏟아져 결이 반짝이는 검은 강물을 보면서 강바람을 가르는 기분이 좋았다. 특히 부산 마린시티의 야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리 위를 건널 때면 마치 내가 한 마리 드론이 된 듯했다.


  일을 그만둔 뒤 밤에 다시 달려보니 그 맛이 안 났다. 일곱 시간 동안 한 공간에서 일한 뒤의 홀가분함과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 자전거의 적당한 속도감과 어둠의 포근함이 모두 어우러졌을 때 나오는 퇴근길의 맛. 대충 냉장한 맥주와 냉동실에 잠시 넣어둔 맥주 맛의 차이 같은 것이 있었다. 그 편의점은 출퇴근길마저 행복한, 궁극 오브 궁극의 일터였던 것이다.


  너무 반짝이는 기억들은 마음이 아픈 법. 이럴 땐 고마움으로 마음을 돌린다. 그 시간이 내게 올 수 있게 해준 모든 요소들에, 사람들에게. 잃은 것이 아니라 얻은 것임을 떠올린다. 내가 한 모든 경험과 선택이 상실보다 선물이 되길 바란다.     



15. 사실 꿈꾸는 노동이 따로 있다.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일이다. 매우 고된 일일 테고 비리비리한 나에겐 시켜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외 모든 조건이 내 까다롭기 그지없는 조건을 충족하는 듯하다. 고도는 높을수록 행복하고, 내 현란한 눈치 없음도 청소 열심히 하는 것으로 용서되고 남는다는 평을 들은 바 있다. 유리창 청소업체 사장님들, 연락 부탁드립니다.     




편의점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전에 일하던 점포는 아니고, 더 가까운 동네 편의점이에요. 이전 편의점보다 훨씬 손님이 많아서 바쁘지만 이번에도 정말 좋은 사장님 부부를 만나서 기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인복 하나는 정말 많은 것 같아요 :)  




매거진의 이전글 [번외편] 노동의 장면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