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종이책《우아한 또라이로 살겠습니다》가 나오고 열흘 정도가 지났습니다. 서점에 전체적으로 책이 깔린 지는 4-5일 정도 되었네요.
출간 전에 생각한 출간 목표는 두 가지였습니다. 한 가지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책을 만드는 것. 다른 하나는 ADHD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찾아낼 수 있는 책을 만드는 것. 두 번째는 제목과 검색어만 잘 설정하면 되는 일이지만 첫 번째는 제 상태와 능력과 시간적 여건이 맞아떨어져야 되기 때문에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긴장이 됐습니다.
다행히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제가 낼 수 있었던 최상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용면에서 신경 쓰이던 부분들을 (매우 다급했던) 3차례의 수정에서 많이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표지와 제목이 글의 느낌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말씀해 주셔서 만듦새에도 만족하고 있어요. 모든 게 아슬아슬했는데 모든 게 잘 지나가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 숨은 이야기를 적어볼까 합니다. 본격 TMI입니다.
- 제목에 얽힌 이야기 -
연재했던 글 중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를 이야기했던 '나를 또라이로 지정한 강의평가, 속시원했다' 편은 가장 좋은 반응을 얻은 글 중 하나였는데, 그 글에서 '우아한 또라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쉽게 애면글면하며 우악스럽게 행동하는 제 모습에 오랫동안 컴플렉스를 갖고 살았기 때문에 침착하고 여유로운 우아함을 동경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겉모습이 아니라 제 문제 안에만 갇혀 있는 모습이 더 부끄러워졌고, 남을 위해 자기 마음 한쪽을 비워두는 여유를 가진 '내면의 우아함'을 갖는 것이 목표가 됐어요. 한편 자유로운 내 모습 그대로를 마구 발산하며 살고 싶다는 욕망도 동시에 강했지요. 그래서 '우아한 또라이로 살고 싶다'는 생각은 늘 제 지상 과제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목을 고민하면서 제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 그런 것이란 걸 뚜렷이 인지하게 됐고, 그래서 제목으로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감수를 맡아주신 신재호 원장님께서 원고를 읽어보시고 연재명보다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제목을 지으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주셨는데, 알고 보니 출판사 대표님께서도 이미 후보 중에 지금의 제목을 마음에 두고 계셨더라고요. (제가 만든 제목 후보 중에는 <우아한 또라이로 살겠습니다> 외에도 <이왕이면 우아하게 이상할래요>, <엉뚱하고 민감하고 산만하게 (잘 살기)>, <병 자랑 좀 하겠습니다> 등이 있었습니다) 브런치 매거진 제목을 지금 제목으로 해두었을 때 칭찬을 해주신 이웃작가님들 덕분에 제목을 고르기가 훨씬 쉬웠습니다.
이미 ADHD에 대한 에세이가 꽤 나와있는 상황에서 제 책의 특징은 청년층에서 벗어났다는 점, '일상'을 구체적으로 많이 담고 있다는 점 등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을 부제에 함께 담았습니다. 20대에 병을 알기 위해 헤매고 있을 때 간절했던 바람은 저 같은 증상을 겪으면서 먼저 살아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마흔 살, 성인 ADHD 노동자가 일상을 사는 법'이 부제로 채택되었습니다.
- 표지에 얽힌 이야기 -
쓰고 싶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연재할 때 이미지 사이트에서 유료결제로 받아뒀던 그림 두 개가 마음에 들었어요. 한 그림은 바닷가 위에 뿔이 나 있는 고래와 그걸 홀로 바라보고 선 사람이 있었고, 또 하나는 지금의 표지에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특히 지금의 그림은 내용과 제목, 글 분위기에 정말 잘 맞아보였습니다. 깎아놓은 조각상처럼 자기 모습을 세상의 틀에 맞추고는 있지만 영혼 없이 텅 빈 눈, 벌어진 입으로 멍을 때리며 머릿속에서는 온갖 공상이 난무하는(용법이 다르긴 하지만 소위 대가리 꽃밭이라고 하죠) 조용한 ADHD인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 같았거든요. 물론 원작자분의 의도와 관계 없는 끼워맞추기식 해석입니다.
디자이너님께 두 그림을 보내드리면서 사용을 부탁드렸더니 시안을 정말 멋지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제목 글자와 책 내부디자인에 청회색이 감도는 밝은 남색이 쓰였는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라서 마음을 읽힌 기분도 들었습니다(지극히 개인적인 만족감).
책이 나오고 보니 표지의 역할이 생각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의 분위기를 좌우하면서 본문의 인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저자와 디자이너는 직접 소통을 하지 않고 편집자를 통하기 때문에 저자가 책에서 표현하고 싶은 것과 디자이너가 창의성을 발휘해 표현하고 싶은 바가 잘 맞아떨어지느냐는 어느 정도 운의 영역인 것 같고(하지만 원하는 그림이 있어서 먼저 제안을 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영역을 침해하는 일이 될 수 있어서 역시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표지가 만들어져 나온 건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 감수에 얽힌 이야기 -
연재를 시작할 때 제가 ADHD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덜컥 연재를 맡고 ADHD 관련 정보를 닥치는 대로 흡수했지만 분명 구멍이 있을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연재가 끝나면 꼭 감수를 받아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연재 후반부쯤에 브런치에서 '마인드립' 작가님을 알게 됐습니다. 마인드립 작가님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시라는 점, ADHD 가족력이 있고 직접 ADHD 치료제를 복용 중인 치료자로서 ADHD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오셨다는 점을 작가님 글을 통해 알았고, '이분께 부탁을 드릴 수 있으면 정말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ADHD에 대해서는 비슷비슷한 정보가 대부분인데, 제가 오랫동안 ADHD 확진에서 비껴난 이유는 그 정보의 편향성 때문이었습니다. 저는아직 많이 안 알려진 정보들에 관심이 많았고, 마인드립 작가님은 남들이 잘 다루지 않는 틈새 정보와 최신 정보를 깨알 같이, 게다가 굉장히 재미있게 올려주고 계셔서 제가열정적으로 댓글을 달았습니다(평온하게 적고 있지만 저에게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특히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던 '고기능 ADHD'에 대해 자세히 올려주셨을 때는 마우스를 든 채 만세를 부르고 싶더라고요. 그 덕분에 고기능 관련 기술에 도움 받을 수 있었고, 출판사에 허락받은 뒤 정식으로 감수를 요청드렸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는데 흔쾌히 응해주셨습니다. 그들만의 잔치 같을까 싶어 자세히 적지는 않겠지만, 무척빠듯한 업무 일정 중에도 굉장히 정성스럽게 원고를 검토해 주셔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의학적인 내용뿐 아니라 표현면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을 짚어주셨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자신감을 많이 심어주셨습니다. 급히 부탁드린 추천의 글도 멋지게 써 주셨고요. 감수는 검사와 수정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책 작업과 출간 이후까지 '동행'해 주는 분을 만나서 지금 출간 후폭풍을 잘 피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편집에 얽힌 이야기 -
'완성형 저자'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저는 아직 치료와 치유가 필요한 과정에서 치료와 치유를 말하는 글을 써나간, 준비되지 않은 저자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치유할 수 있기도 했습니다. 중후반부 연재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심해져서 한 주 한 주 완성하기가 많이 힘들었는데 수정 과정에서 푹 꺾였다 올라왔다 하면서 점점 상태가 좋아졌어요.
그런데 처음 글과 나중상황(제가 처한 상황과 글을 쓰는 방식 모두)이 많이 달라진 만큼 고쳐야 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고,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잘 가려내지 못하고 원하는 걸 포기도 잘 못하는 ADHD의 특성 때문인지 이미 분량 초과인데도 하룻밤만 자고 나면 새롭게 이것저것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자라났습니다.
다른 저자분들은 어떻게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세 차례의 수정에서 제가 작업 파일에 추가한 수정 메모 개수를 세어보니 1200개가 넘었습니다(바람직한 방식은 아닐 겁니다..). 그걸 단 며칠 안에 일일이 검토하고 반영해야 하는 편집자님의 수고를 생각하면 최대한 줄여보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더라고요. 단 한 번도 난감한 기색 없이 긍정적으로 받아주시는 인자하신 편집자님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덕분에 뒤늦게 깨달은 것들도 책에 반영할 수 있었고, 걸리는 것 없이 개운한 마음으로 책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책 끝에 적은 것처럼 'ADHD인들이 읽기 힘든 ADHD 책'이 되어버린 것 같긴 하지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