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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보살과 민바람 Jan 31. 2023

대화가 숙제 같은 순간

‘너울가지’는 없어도 ‘말갈망’은 할 수 있으니까

강사로 일하던 때, 한동안 겸업으로 공항에서 보안 인터뷰를 했었다. 출국 전에 줄을 선 승객들에게 “어디 가세요?” “가방에는 뭐가 들었어요?” 같은 질문을 하고 수상한 점이 없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기초 회화 수준의 외국어 실력이었지만 여러 나라말로 이것저것 질문하는 게 은근히 뿌듯했다.


그러나 쉽기만 한 일은 없는 법이다. 가장 어려운 건 팀으로 일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어떤 잡담을 해야 할지 몰라 고장난 태엽 장난감처럼 뚝딱거렸다. 다들 나와는 너무 다른 사람 같았다. 승객들에게 하듯 할 말이 정해져 있으면 좋으련만. 삼삼오오 모이는 쉬는 시간이면 사람들 틈에 머슬머슬하게(탐탁스럽게 잘 어울리지 못하여 어색하게) 앉아 있다 슬쩍 빠져나가 혼자 시간을 보냈다. 팀 배정이 날마다 달라지니 더 가시방석이었다. 


결국 서너 달 만에 일을 그만두고 대학 후배에게 넋두리를 했다. 

사람들하고 있을 때 무슨 얘기를 해야 될지 모르겠어. 

날씨 얘기를 해봐! 


날씨 얘기라. 갑자기 세계 명작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대화만큼 멀게 느껴졌다. 같은 날씨 아래서 만나고 있는 사람한테 굳이 날씨 얘기를 해야 하나? 한편 다들 뻔한 얘기를 하면서 뻔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왜 유독 그런 것들을 뻔하게 여길까 싶기도 했다.

 

사실 예전에는 나름대로 #너울가지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었다. 


#너울가지: 남과 잘 사귀는 솜씨. 붙임성이나 포용성 따위를 이른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유들유들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웬만해선 적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은 달랐다. 그 순간을 넘기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며 분위기를 맞추는 일이 피곤했고 만남조차 의미 없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남들이 하는 대로 대화하면서 속으로는 그게 수박의 겉만 핥는 일이라고 여겼다. 진실된 것, 삶의 의미,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본질 같은 것들을 얘기하고 또 듣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대화는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픈 마음을 나도 똑같이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일상적인 얘기 속에서 즐거움과 소속감을 느끼는 경험이 남보다 부족할 뿐이었다. 어릴 적 집 안에서는 부정적인 말들이 주로 오갔고, 학교와 사회에서는 남들과 다른 세계관과 욕구를 숨기는 게 공허해서 혼자가 편했다. 잠자리에 누워 언어 없이 영혼의 빛으로 소통하는 세상을 꿈꿨다. 오해와 상처가 없는 완벽한 세상.

 

이런 내가 10년 넘게 강사로 살았으니 고장이 난 것도 이상하지 않다. 내 경우 많은 사람 앞에서 쉼 없이 말을 거는 일은 쉼 없이 오해받는 일이었다. 경험이 쌓이면 마음이 단단해질 줄 알았는데 다른 의미로 마음이 돌처럼 굳어갔다. 점차 내가 사람 속에 섞일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됐다. 


일을 그만둔 후로도 몇 년간 대화가 두려웠다. 두 명 이상이 내게 집중하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말을 망쳤다. 매번 실수를 한 건 아닌지, 성공적인 대화였는지 아닌지 판단하다 보니 순간순간의 가치를 느끼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씩 치유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대화를 통해서였다. 글을 쓰면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났다. 내가 속에만 담아둔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는 사람들이었다. 종종 용기를 내서 대면 만남을 시도했다. 여전히 아슬아슬한 느낌은 있었지만 마음이 통하는 만남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잘 맞는 상담사 선생님을 만나면서 그간 억누른 생각과 느낌을 인정받는 경험도 쌓아갔다. 사람들과 연락하지 않고 있을 때도 내게 힘이 된 대화를 떠올리면 마음 한구석이 든든했다. 연결감이란 게 이런 거구나. 처음으로 생각했다.

 

삶을 지탱하는 건 사소한 것들이었다. 말하지 못한 것까지 읽어내려 애쓰는 눈빛, 방금 들은 말을 곱씹어볼 때의 편안한 침묵, 실없는 농담으로 같이 웃어젖힐 때 갑자기 포근해지는 공기, 어딘가 이상했던 표현에도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여주는 관대함. 하루하루가 버거울 때는 그런 것들이 순간을 붙들어주었다. 바깥에 찬 바람이 몰아치지만 너는 안전하다고. 안전하지 않은 곳을 건너갈 힘이 너에게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마음을 채워주는 대화를 경험하면서 소통하는 일에 믿음이 생기니 그제야 와닿았다. 날씨 얘기로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이유. 감정을 나누는 방식은 직접적이지 않아도 좋았다. 깊이 터놓고 얘기하지 않아도 사소한 주제로 맞장구치며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게 사람들의 귀여운 면이니까. 


상처가 많으면 상처받기 쉽고, 자신을 인정하기 어려우면 오해에 민감해진다. 하지만 사람과 이어지는 일은 상처와 오해를 동반하면서도 삶을 어느 쪽으로든 나아가게 하고, 그래서 결국은 다친 곳을 낫게 하는 길도 보여준다. 전하려던 의미가 미끄러지면 아프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던 부분을 알게 되기도 한다. 


대화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함께 보내는 시간에 감각을 활짝 열어두는 것. 대화를 잘한다는 건 그런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적이 아닌 이웃으로 여기고 모든 순간을 경험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소한 이야기에도 생기가 실린다.

 

지금은 ‘진짜 하고 싶은 말’에 대한 집착을 놓았다. 그리고 어눌하면 어눌한 대로, 힘이 없으면 없는 대로, 웃음이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 둔다. 달변이 아니어도 좋고 너울가지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렇게라도 참여하는 일이 상대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의사소통은 오해와 같은 말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고, 타인이 전하려는 의미와 내가 받아들이는 의미가 완벽히 같을 수 없다. 내가 아닌 존재의 말은 모두 외국어인 셈이다. 다르게 이루어진 두 사람이 만나 불완전한 언어로 애써 나누고 싶은 게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소통은 가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용기를 실어주는 기술도 하나 익혔다. 바로 #말갈망. 내가 한 말이 마음에 걸리면 뒤늦게라도 다시 설명하거나 사과한다. 누군가의 말에 마음을 다쳤을 때도 솔직하게 터놓아서 말갈망할 기회를 만들어준다. 


#말갈망: 자기가 한 말의 뒷수습.


 ‘갈망’은 ‘어떤 일을 감당하여 수습하고 처리함’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단어로 ‘갈무리’가 있다.  좀 뜬금없지만 아까 제 표현이 무례했던 것 같아요. 혹시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때 네가 한 말 말이야. 사실은 그 말 듣고 마음이 아팠어.


말도 주워 담을 수 있다. 적어도 주워 담으려는 노력을 보여줄 수는 있다. 솔직하게 말을 꺼내서 마음을 다치는 경우도 있지만 관계가 단단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상대방과의 인연을 진중하게 대하는 마음이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불완전한 나의 말들을 나는 이렇게 응원한다. 오해와 상처 없는 세상을 갈망(渴望)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말갈망하기. 완벽한 대화를 하려 하기보다 이 순간을 느끼기. 다치고 다치게 하고 쓰다듬고 새살을 채우며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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