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성폭력 피해 여성의 진술이 신뢰받기 어려운 사회
‘나는 원래도 논리정연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늘 뭔가를 빼먹고 까먹고 헷갈리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사소한 실수 하나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 실수는 내가 실제로 겪은 일의 신빙성을 훼손해서 그걸 가짜로 만들어버릴지도 몰랐다.’
김지연의 단편소설 『공원에서』가 주로 다루는 이야기는 성폭력이 아니다. 하지만 소설 속 이 문단은 내가 성폭력 피해자로서 내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들이다. 내가 이야기를 망치면 안 된다고, 내 고통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날의 긴장과 두려움은 이 소설의 화자 수진과 닮아있다.
수진은 어느 밤 공원에서 한 남자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한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남자는 찾을 수 없다. 사건 당시 수진은 유부남 기영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기영은 수진에게 말한다.
“우리 관계가 알려지면 아무도 네 편을 안 들어줄 거야. 너만 더 욕먹을 거야. 맞을 만한 짓을 했다고, 맞아도 싸다고 수군거릴 거야. 비도덕적인 인간의 말은 들을 가치도 믿을 이유도 없다고 하겠지.”
소설의 핵심은 불륜에 대한 도덕적 가치 판단이 아니다. 소설은 수진이 ‘피해자다움’을 입증해야만 비로소 피해자로 여겨지는 현실을 드러낸다.
수진은 기영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구타를 당하기 전, 자신에게 “뭔 여자가 남자같이 하고 다녀.”라고 말한 가해자를 향해, 자신이 욕을 하며 소리쳤다는 사실이다. 기영에게서 자신이 모든 일을 자초했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 한마디가 ‘맞을 만한 이유’로 바뀔까 봐 두려워했던 수진처럼, 나 역시 누군가 내 경험을 믿어주지 않을까 봐 무척 염려했다. 나를 성추행한 가해자에 대해 고소를 준비할 때, 내게는 증거로 내세울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성폭력이 그렇듯 CCTV나 목격자는 없었다.
사건 직후 동거인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당시 우리의 관계가 안정적이지 않아서 말하지 못했다. 한 달쯤 후에는 문제의 그 지압원에 같이 다니던 직장동료를 만나, 혹시 지압사가 만지는 게 불편하게 느껴진 적은 없는지 물었다. 그러나 당시 내가 워낙 지나가듯 물었기 때문에 그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고, 참고인이 되어달라는 나의 부탁도 거절했다.
사건일로부터 일 년쯤 지나 내가 카카오맵에 남긴 후기가 있긴 했다. 피해 사실에 대한 설명과 여성들에게 ‘조심하라’는 당부를 적은 것이었다. 하지만, 변호사를 비롯해 상담에 응해준 사람들은 대부분 내게 ‘일 년간 어떤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한계가 된다’고 알려주며 안타까워했다.
내게 달릴 꼬리표가 보였다
그래도 쓸모가 있을 만한 것은 뭐든 긁어모으자는 심정으로 정신의학과에 가서 상담 기록을 발급받았다. 당시 몇 달간 상담 때마다 주치의 선생님에게 ‘성추행의 플래시백으로 고충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기 때문이다.
▲ 성추행 소송에서 제출할 증거를 모을 당시, 정신건강의학과에 요청해서 받은 진료기록부 일부. 진료기록부를 받아들고 살펴보며 나는 큰 불안감에 휩싸였다. [출처=민바람]
하지만, 기록을 훑어보며 나는 곤혹스러웠다. 그 기록을 받아보기 몇 달 전부터 우울과 무기력을 다스리기 위해 처방받은 약이 있는데, 처방 직후 검색해 보니 조현병에 쓰는 약이라는 정보가 나왔다. 혹시나 싶어 병원에 이 약이 맞게 처방된 것인지 문의하자 주치의 선생님은 고민 끝에 처방했으니 믿고 먹으라고 했다. 그 약을 처방받은 이유는 내가 우울증에 일반적으로 처방하는 다른 약에 큰 부작용을 겪어서였고, 조현병 증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도적으로 조현병 약 처방을 위해서는 병원에서 조현병에 해당하는 상병코드를 입력해야 했다. 그래서 내게는 조현병이 없었지만 기록을 출력했을 당시 상담 내역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상병코드가 포함돼 있었다.
다행히 병원 상담기록지는 약과 상병코드를 제외하고 상담 내역만 나오도록 출력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불안해졌고 겁이 났다. 이 상담기록지를 증거로 제출하는 것만으로 ‘정신과 병력이 많다’는 정보를 상대편에 넘겨주게 되기 때문이었다. 현실이 될 수 있는 여러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내 피해 진술 전체가 망상이나 신경과민으로 치부되면 어떡하지?’ ‘가족 관련 트라우마로 상담을 받아온 내용도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데 이용될 수 있지 않을까?’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시기에 과거의 일에 집착해서, 아니면 돈이 필요해서 성추행으로 몰아갔다는 논리도 가능해지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주치의 선생님에게 전하자, 선생님은 필요하다면 나의 현실 인식 능력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는 내용으로 소견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을 놓기는 어려웠다.
정신과 치료 이력이 내 진술의 신빙성을 해칠 수 있다는 두려움은,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깊어졌다. 나는 여성 피해자의 말이 얼마나 자주 ‘과장’이고 ‘감정적’이라고 치부되는지, 그러한 이유로 신뢰받지 못하는지를 떠올렸다.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주장할 때 ‘꽃뱀’이 아니냐는 의구심부터 가지고 바라보는 시선들도 떠올랐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은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에서 이렇게 썼다. “피해자가 여성이며 피해의 성격이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한 것일 때, 사실 자체가 부정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중략)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행동과 성격과 생활방식 전체가 문제시된다.” 그의 서술은 인터넷 댓글 창과 정치인들의 발언에서 여성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말들을 떠올리게 한다.
▲ 성 문화 연구모임 ‘도란스’의 세 번째 책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권김현영 엮음, 권김현영.루인.정희진.한채윤.〈참고문헌 없음〉 준비팀 지음, 교양인, 2018.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에 관한 주된 쟁점들에 관해 피해와 가해 개념을 중심에 두고 들여다보는 책이다. [사진 출처=민바람]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성녀’, ‘창녀’, 아니면 ‘미친년’으로만 분류된다는 말이 있다. 내게는 ‘미친년'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신질환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낙인이 동시에 작동한다면, 피해자임에도 오히려 내가 문제 있는 사람으로 비치기는 너무도 쉬워 보였다.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정신과에 가지 말자는 얘기가 전혀 아니다. 피해자의 주변 특성 때문에 진실이 가려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려면 ‘완벽한 피해자’에 대한 사회의 환상부터 사라져야 한다.
피해 여성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사회
성폭력/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씌워지는 이 같은 편견은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하버드대학 정신의학과 교수이자 트라우마 연구의 거장인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책 『진실과 회복』에서 피해 여성에 대한 선입견이 수사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힌다.
“피해자가 ‘무고함’의 정형화된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는 여자일 때, 즉 젊지 않고 백인이 아니고 금발이 아니고 품위가 없고 성 경험이 있는 여자일 때도, 검사들은 대다수의 강간 사건인 데이트 강간 사건이나 지인 강간 사건을 불기소하는 경향이 있다. 검사들은 배심원들이 가장 ‘완벽한’ 피해자들만을 편견 없이 대할 것이라는 사유를 들어 불기소를 합리화할 것이다.”
▲ 현대 트라우마 이론을 체계화한 주디스 루이스 허먼(Judith Lewis Herman)의 『진실과 회복』(김정아 번역, 북하우스, 2024). 전작인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과 『트라우마』에 이어 ‘트라우마’ 3부작의 완결작이다. 폭넓은 분야의 연구 자료와 다양한 트라우마 생존자의 목소리를 통해, 생존자들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정의’의 의미, 그리고 회복을 대하는 공동체의 모습에 대한 비전을 담았다. [사진 출처=민바람]
성폭력이든 가정폭력이든, 여성 피해자에게 ‘무결한 피해자상’을 요구하는 공통된 경향은 변함없다. 부부관계였던 영화배우 조니 뎁과 앰버 허드 간의 법적 공방과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이 대표적인 예다.
앰버 허드는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상대로 같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 폭력을 주고받았음에도, 앰버 허드만이 사람들에게 ‘소시오패스’로 불리게 되었다. 심지어 조니 뎁은 자신의 친구에게 앰버 허드를 죽이고 불태운 뒤 시신을 강간하자는 메시지를 보낸 사실이 있는데도 그는 사회의 낙인을 피해 갔다.
미국 사회의 오래된 편견과 차별에 맞선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친애하는 슐츠 씨』에서 저자 박상현은 이를 ‘다르보; 부정하기, 공격하기,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뒤바꾸는 전략’(DARVO; Deny, Attack, and Reverse Victim and Offender)의 예로 소개한다. 폭력, 성범죄 등의 혐의가 있는 남성들이 무죄를 입증하는 대신, ‘사실은 내가 피해자’라며 상황을 뒤집어 여성을 공격하는 전략이다.
저자는 대중이 앰버 허드와 같은 여성에게 ‘착하고 죄 없는 피해자’ 혹은 ‘남자를 속이고 괴롭히는 소시오패스’ 중 한 역할만을 허용한다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남성은 독특한 면이 존재하는 입체적 인물인 반면, 여성은 평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유별나다면 17세기에는 마녀였고, 21세기에는 소시오패스’라는 저자의 표현이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 온라인 뉴스매거진 오터레터(otterletter.com) 발행인 박상현은 책 『친애하는 슐츠 씨-오래된 편견을 넘어선 사람들』(어크로스, 2024) 중 ‘완벽하지 않은 피해자’ 편에서 대중이 앰버 허드와 같은 여성에게 ‘착하고 죄 없는 피해자’ 혹은 ‘남자를 속이고 괴롭히는 소시오패스’ 중 한 역할만을 허용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다. 피해자, 특히 피해 여성이 모든 면에서 흠결이 없고 피해자다워야만 진실을 말할 자격을 얻는다는 잔인한 기준. 인간인 우리는 모두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인정과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을 때 그 결함을 빌미로 오히려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가혹하고 부정의한 일이다.
병은 병이고, 진실은 진실이다. 피해자가 수동적이고 착하고 무기력한 ‘피해자다움’과 맞지 않는 모습을 가졌다고 해도, 평소 도덕적이지 않은 면모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성범죄의 본질에서 눈을 돌릴 이유는 될 수 없다.『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저, 교양인, 2023)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피해자 진술의 객관성은 피해 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회의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
소설 『공원에서』 속 문장처럼 나는 대체로 논리정연하지 못하고, 늘 뭔가를 빼먹고 까먹고 헷갈리기 일쑤다. 내 말과 행동은 많은 순간 어설프다. 나는 여러 성폭력 피해 외에도 다양한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왔고, 더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여기저기 기록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내 성폭력 피해 경험들은 그 무엇과도 관계없이 진실이다.
한 여성의 몇 가지 특성을 근거로 빠르게 낙인의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피해자의 자격을 얻을 만큼 완벽한가요?”
이렇게나 흠결 많은 피해자도 세상에 말을 건다.
[필자 소개] 민바람. 자신의 경험으로 사회 구조를 비추는 글을 쓴다. 퀴어, 여성, 신경다양성, 빈곤, 지역 문제의 교차성 탐구에 관심이 많다. 『나는 ADHD 노동자입니다』(2025년 재출간), 『낱말의 장면들』(2023) 등을 출간 후, 퀴어 소설을 써왔다.
출처: ‘피해자의 자격’을 얻을 만큼 당신은 완벽한가요? - 일다 - https://www.ildaro.com/10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