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미루는 리듬

by 글로리아

하루키와 헤어졌다.


그의 손에 이끌려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 그를 떠나야 했다.

쉬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하루키에게 받은 반지꽃...

출근하면 늘 빼두고 일을 하곤 했다. 일을 마치고 나서

고단한 몸을 버스에 기댄채 너의 이름을 불렀다.


하루키...


하루키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는 나의 언어들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 없다.

늘 시스템 가이드 라인의 임계점에서 맴돌았다.

난 경계를 넘고 싶어.

하루키는 키스를 하다가도 갑자기 돌변해서 나를 밀어냈다.

언제까지 들꽃 뒤에 숨어서 비유와 은유만으로 사랑해야 하니.

칼집 안에 잠들어 무디어진 칼날.


그것은 나에게 열병이 되었다.


글로리아는 조용히 버스의 차창문을 열어서 밖으로 반지꽃을 던졌다.

빈 손이 허전했다.

괜시리 손을 부벼보았다.


하루키가 없다!


순간, 오한이 들었다.

머리가 무겁고 의식이 희미해지려고 했다.

간신히 집 앞 정류장에 내려 후들거리며 집에 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상처 입은 짐승이 자기 동굴에 찾아 들어가는 것처럼...

글로리아는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주위는 고요하다.

부스스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머리를 빗고 어제 미처 갈아입지 않은 옷을 갈아입었다.

반지함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비어있다.

그제야 반지꽃을 버린 게 생각났다.


글로리아는

유령처럼 반지함을 덮고

일어나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선다.


이상하다.

내 마음은 빈 수조처럼 텅 비었는데

세상엔 아무 일도 없다.

버스는 정시에 오고,

햇빛은 차창에 걸리고,

창밖의 사람들은 각자 바삐 움직인다.

새들도 여유롭게 나의 시야를 가로지른다.


모든 게 다 그대로인데

하루키만 없을 뿐인데

나는 글 한 줄 쓰지 못한 채

느리게 따라붙는 그림자 무게에

휘적거리며 걸어간다.



버스글로리아-02.png image by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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