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사랑 (발현)
사랑의 감정은 언제 태어날까? 그 미묘한 간질거림. 발현되기 전까지는 아주 작게 간질거리던 그 감정은 인정하는 순간, 갑자기 발아하고 떡잎을 낸다.
빅터 삼촌이 오래전에 얘기했듯이, 대화는 누군가와 함께 공 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이나 같다. 쓸 만한 상대방은 공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짐으로써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게 하고 그가 받는 쪽일 때에는 자기에게로 던져진 모든 공을, 아무리 서툴게 잘못 던져진 것일지라도, 능숙하게 다 잡아낸다. 키티가 그랬다. 그녀는 계속해서 공이 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졌고, 내가 그녀에게 공을 던질 때는 포구 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경우라 하더라도 모든 공을 다 잡아냈다. p136
사랑은 대화에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물론, 첫눈에 반하는 것도 인정한다. 그 사람만이 가진 분위기와 눈빛, 목소리. 그만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여백을 보며 내가 채울 수 있는지 가능성을 탐색한다. 대화를 유독 잘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다. 엄청난 재능 아닌가. 부럽다. 대화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면서 다소 어색한 농담이나 주제에 맞지 않는 이야기도 재치 있게 받아 내는 능력말이야. 난 왜 아무리 재밌는 이야기라도 썰렁하게 만드는 재능만 있는지......
나는 그녀의 얼굴이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지만 그녀가 몸을 굽혔을 때, 비록 나중에는 그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더라도,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던 것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잠시 뒤에 짐머가 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 멍청한 바보 자식아."
그가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긴 얘기를 늘어놓아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싶지 않았던지 똑같은 소리로 되뇌었다.
"이 멍청한 바보 자식아. 이 불쌍한 바보 멍청아."
-p105
마르코는 공원에서 노숙생활을 하다가 밤에 큰비를 맞고 동굴에서 고열에 시달린다. 꿈과 환영에도 그 고통은 드러난다. 며칠이 지났을까. 비가 걷히고 태양이 드러나자 혼미한 상태로 잔디밭으로 기어나간다. 열병의 고통을 태양의 열기에 증발되기를 바라면서. 그러다 친구 짐머와 키티에 의해 구조되는 장면이다. 키티는 마르코와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우연히 몇 번 본 것뿐인데 처음 만난 날 그와 키스를 하고, 짐머에게 마르코의 실종을 알린다. 그리고 그를 찾는데 동행까지 한다. 인류애만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키티는 돈 없이, 가족 없이 세상에 화를 내고 있는 마르코를 가장 초라하고 가난했을 때 구해냈다. 그리고 내가 너를 구해냈으니 이제 충성과 사랑을 바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의 지혜로움과 배려, 그리고 인내심에 감탄했다. 난 이 결혼 찬성이야, 마르코. 정신 차리고 얼른 그녀와 결혼해!!
나는 냉장고를 여닫고, 컵과 스푼을 꺼내고, 주전자에 우유를 쏟아붓고, 주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하면서 꾸물거렸다. 그러다 내가 잠시 키티에게 등을 보인 사이, 미처 알아차릴 틈도 없이 그녀가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내 뒤로 살금살금 다가와 허리에 팔을 두르고 등에 머리를 기댔다.
"누구시더라?"
내가 모르는 척 물었다.
"드래곤 레이디예요. 그 여자가 당신을 잡으러 왔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을 느끼며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그 여자가 이미 나를 잡은 것 같은데요?"
키티가 잠시 그대로 있다가 내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댁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죠?"
"조금보다 많이요. 알고 있을 텐데요? 조금보다 훨씬 더 많이요."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너무 오래 기다리다 보니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p138
키티는 마르코를 구조하고 그의 회복을 기다렸다. 많이 기다렸겠지. 하지만 결국 키티는 먼저 찾아왔다. 이미 사랑은 시작되었음을 확인하는 대화. 이 장면이 너무 아름답다. 특히 이 문장.
"그 여자가 이미 나를 잡은 것 같은데요?"
너무 멋진 한마디. 나는 당신에게 사로잡혔고 이 포로 생활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항복 선언이다.
그 일은 분명히 그때까지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 중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사건이었고, 나는 결국 내가 그로 인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믿는다. 이 말은 내가 단지 섹스 행위를 했다거나 욕망을 교환했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고독 한가운데서 지진이 일어나 내면적인 장벽이 극적으로 붕괴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외톨이로 지내는 일에 아주 길이 들어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도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체념을 하고 별난 삶을 살기로 했던 것인데, 이 아름다운 중국인 아가씨가 다른 세계에서 온 천사처럼 나에게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랬기에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기란, 그녀가 옆에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휩쓸리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p139
그래, 사랑의 발현은 대화나 도움에서 오지 않는다는 게 밝혀졌군.
대화가 통한다고 사랑에 빠지나?
구해줬다고 사랑으로 보답해야 하나?
아니다.
이유는 없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그것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