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벌판-응웬옥뜨

베트남 문학

by 글로리아

책을 덮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눈물이 났다는 사실은 조금 뒤에야 알았다.
소리 내어 울지도 않았고, 가슴이 무너지는 격정도 아니었다.


다만 어딘가 속이 비워진 듯 고요했다.
마치 북동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난 뒤의 벌판처럼.


이 소설에는 구원이 없다.
오리들은 땅에 묻히고, 어른은 아이를 지켜내지 못하며, 가난은 사람을 끝없이 떠돌게 만든다.


누구 하나 영웅처럼 뛰어들어 상황을 뒤집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서서, 혹은 앉아서, 혹은 돌아서며 각자의 방식으로 버틴다.


나는 특히 아버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딸이 폭력 속에 내던져질 때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
그리고 뒤늦게 돌아와 진창 속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


그는 강하지도, 지혜롭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다만 가난했고, 상처 입었고, 사랑을 지켜내지 못한 한 인간일 뿐이다.


이 소설이 잔인한 이유는 폭력이 아니라
‘막아주지 못함’에 있다.


폭력배들이 떠나고, 피투성이가 된 두 몸뚱이만 남는다.
하늘에는 제비 떼가 가로지른다.

잠시 고개를 돌렸던 태양이 햇살을 뿌린다.

성긴 풀잎새들만 벌판에서 이리저리 일렁인다.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 간다.


아버지는 기어서 딸의 몸을 가릴 무언가를 찾는다.


무서움에 떨었던 그날의 기억이 소녀의 몸을 덮는다.

그날, 옷감을 파는 사내한테 몸을 허락한 엄마의 표정이 스친다.


그것은 쾌락을 쫓은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금니마저 깨물 수 없는 쓰라림,

살기 위해 수치마저 삼켜야 했던 상처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이야기할걸.

엄마에게 미소 지어줄걸.

서로 안부를 물어보는 날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걸.


이 책은 분노를 부추기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가.
그리고 무엇을 감수하며 여기까지 왔는가.


“—제가 아이를 밴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버지.”


그 질문은 비극의 문장이 아니다.
미래를 향한 문장이다.


아이의 이름을 짓고,
학교를 보내고,
용서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겠다는 다짐.


그 순간 소녀는 피해자가 아니라
삶을 선택하는 주체가 된다.


세상은 망가졌고, 구원은 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스스로 구원을 만들려 한다.


그리고 아버지.
그는 늦었고, 힘이 없었고, 강요당했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소설은 그의 눈물조차 논물인지, 피고름인지, 눈물인지 모호하게 남겨둔다.


그 모호함이 인간이다.


내가 붙들고 있던 결핍과 상처가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낀다.

상처는 진짜였지만, 어리광이었다. 나는 그것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다.


몸이 간질거린다.

부끄러움인지 후회인지,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언어가 되지 못한 채

신호를 보낸다.




한국 독자님들께

빈농의 딸로 논밭에 하염없이 코를 박고 지내던 시절, 저는 제 삶의 변화를 꿈꾸며 글을 긁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문학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여러모로 미숙한 작품을 세상에 처음 선보이고, 그로부터 얼마 후 독자들의 반응이 날아들었을 때 그 신비로운 느낌이란 어지러울 만큼 벅찬 신열이었습니다. 비록 사는 곳은 멀리 떨어져 있을지언정, 독자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어 제 어깨를 따듯하게 감싸주었습니다. 그래서 진실로 믿게 되었습니다. 문학이 때론 불이 되어 철의 장막을 녹이고, 때론 넉넉한 울타리가 되어 오아시스의 꿈을 가꾸어주고, 때론 물이 되어 부드럽지만 도도하게 역사와 문화와 언어의 완고한 방죽을 허물어뜨린다는 것을.

[끝없는 벌판]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넘어서 보고자, 우리가 지닌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보고자 해서 쓴 글입니다.

작가의 말 中 p159



다른 종류의 울음이었다.

천선란의 [이끼숲]을 읽을 때는 감정이 위로 솟구쳤다. 격정, 파열, 쏟아짐.

그것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눈물이었다.


그런데 응웬옥뜨는 다르다.

이 울음은 바닥으로 스며드는 울음이다.


소리도 없이

눈물이 뚝 떨어지고 나서야

어? 내가 울었네? 하고 알아차리는.


차분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응웬옥뜨의 소설은 판단하지도, 설교하지도, 울어라, 분노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

독자가 스스로 무너질 시간을 준다.

상처가 터지는 울음이 아닌, 무언가 이해해 버린 울음이 남는다.


아버지를 이해했고, 엄마를 이해했다.

가난을 이해했고, 소녀의 결단을 이해했다.


이해는 마음속 소음을 줄인다.


자기 연민이 사라진 자리에, 나는 조용히 발을 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