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도 썼었나. Life is mono.. 오랜만에 듣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온 카톡이었다. 누구지? 나를 아는 사람인가?
순간 머릿속은 20년도 더 지난 과거로의 급행열차가 출발했다.
스물여섯.. 낯선 서울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그 어디에도 마음 붙이지 못했다. 부레옥잠처럼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물 위에 떠서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흘러 다녔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선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동호회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출사와 번개로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사진을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놓았던 청춘들은 아침이 되어야 헤어졌다. 연애도 했고, 이별도 했다. 그때 만났던 남자 중의 한 명일까? 아닌데... 사진 에세이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작은 지자체 공모전에 냈던 건데.. 그들 중 한 명 일리 없었다. 아, 한 명.. 생각났다.
체리향기.
아이디가 체리향기? 여자인가? 귀여운 아이디에 어울리지 않는 담담하고 초탈한 문체였다. 구도자 같았다. 그분의 사진에서 감성이라곤 없었다. 칼각의 구도. 완벽한 황금비율에서 오는 편안함 정도? 온라인에서 소통하다가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났을 때 남자분이어서 놀랐다. 남녀가 쓰는 아이디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닉네임에서 풍기는 이미지라는 것은 있잖아. 하긴 뭐, 나도 여성적인 느낌의 아이디는 아니었지.
그는 그림자처럼 어떤 모임을 가든 항상 있었다. 야근이 있는 날은 늦게라도 왔다. 그리고 뒤풀이를 마치는 끝까지 함께 있었다. 스물여섯 살 여자가 삶을 알면 얼마나 알 것이며 인생을 논한다 한들 정답이 아니었음에도 경청하고 반응하고, 기다려주었다. 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였고 거칠었다. 그는 그런 나를 봐주고 있었다. 그는 나를 논리로, 철학으로 얼마든지 궁지에 몰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십 년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락이 왔다.
나는 나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원고는 썼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제목이 없다고...
"Life is mono 어때? 동명의 소설이 있기는 하지만, 너의 글과 사진에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래서 나의 사진에세이 제목은 Life is mono가 되었다.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책으로도 나왔다. 비록 지방 도서관 한 귀퉁이의 지박령이 되었지만.
그리고 나는 그 원고를 잊고 살았다. 필름을 살 수 있는 곳도, 사진 현상소도 사라졌다. Canon Ft-b와 Contax Rx, 그리고 Eos 30은 조용히 창고에 들어갔다. 20대의 나 자신도 함께 봉인되었다. 다시 카메라를 꺼내드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 질문까지 멱살이 잡혀 처박혔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 나의 세계는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가끔 그가 생각났다. 그는 유일하게 나의 언어를 읽어내고 응답했던 사람이었다. 삶이 각박할수록, 상처받을수록 그 시절의 추억은 소중해졌다. 그날 만약 남자와 여자로 한번 안았으면 어땠을까?
"누구세요?"
나는 물었다.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확신했지만 답을 기다렸다.
"기억 안 나면 pass 해요. 너무 옛날이라 닉네임도 가물가물하네. 체리향기였었나..."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어디로 숨어들 든 결국 나를 찾아냈던 사람이잖아.
이십 대의 우리는 같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 현관을 열면 싱크대가 있다. 거기서 세수를 했다. 방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커다란 창이 있었다. 그 창문 불투명 유리의 난해한 무늬도 기억이 난다. 심장이 뛰는 소리, 숨소리가 느껴졌다. 눈을 감은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나도 눈을 감았다. 차갑고 청명했다. 숨을 두세 번 더 쉬었다. 그는 거기서 더 다가오지 않았고 나도 다가서지 않았다. 아, 이 사람은 안전하다. 나는 보호받고 있어. 안심하고 곧바로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담배가 피고 싶었다. 그는 싱크대에서 담배를 찾아왔다.
"오빠는 담배 안 피우잖아요..."
"사회생활의 접대라고 생각해라. 가끔 필요할 것 같아서."
그는 내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그와 아침을 같이 먹었는지... 어떻게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의 장면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았다. 나를 좋아했구나.. 별거 아닌 나를 존중하고 기다려주고 아껴주었구나... 그 감정은 20년이 지나도록 남았다.
"오랜만이에요, 체리향기님."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을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사는 곳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우리는 가까이 살고 있었다. 지하철역 두개의 정거장은 20년이 걸리는 거리였다.
어느새 스타벅스에서 두시간이나 지났다.
지하철 역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 일어났을 때 내가 물었다.
"오빠, 팔짱 껴도 돼요?
호칭은 어느새 체리향기에서 오빠가 되었다. 팔짱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진 모임 뒤풀이가 끝나고 잔뜩 취해서 자리를 파할 즈음 슬쩍 기대었다. 그는 나를 떨어내지 않았다. 아무리 초라한 텃밭이어도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들어설 수 있는 법. 그는 자신의 영역에 나를 들이는 것은 허락했지만 입맞춤에서 멈추었다. 그가 넘지 않은 선은 항상 내게 물음표였다.
나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지구인들 틈에서 그들과 비슷해지려고 고군분투한 외계 생명체의 하소연. 예전처럼 그는 자주 웃었다. 바람은 차갑고 마음은 따뜻했다. 나는 신이 났다.
이제야 진짜를 만났어.
두개의 노선이 겹쳐진 미로같은 지하철 역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헤매도 좋을 것 같았지만 그는 길을 너무 잘 찾아냈고 순조롭게 이끌었다. 금방 내가 내릴 곳이었다. 그의 지하철이 떠나고 나는 곧바로 길을 헤맸다. 자주 가던 곳이었지만 또 길을 잃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인 그런 단순한 곳에서도 두리번거렸다.
길치였구나. 나는.
신은 나에게 여러가지 재능을 주었지만 방향감각만큼은 빼놓은게 분명하다. 그래서 인생길에서도 그리 헤맸던 것일까.
그를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의 설움을 위로받는 시간이 될까. 아니면 좋았던 추억마저 망치게 될까. 영혼이 먼저 닿은 후의 몸은 어떤 언어로 반응할까. 나는 늘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서둘렀기에 적당한 호감이 생기면 섹스를 했다. 덕분에 탐색의 문은 늘 일찍 닫혔다.
체리향기.
낯설고 깊은 감정.
두렵다.
수평적 방황 아닌 수직적 익사의 공포.
인간대 인간으로의 만남이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 되는 순간, 더 깊이 공명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 짧다. 체리향기를 잃을 수 없다.
그날의 공기는 아직도 내 안에 머물러 있다.
창문 무늬와 담배 연기, 그리고 그의 팔 베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헤매었고, 그는 없었다.
그러다 결국 다시 만났다.
팔짱을 끼는 순간, 나는 알았다.
놓쳤던 게 아니라
사실 내가 도망쳤음을,
삶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죄를 물어
그를 유배시켰다는 걸.
나에게 잊혀지지 않기 위해
애써 누르고 눌렀던 물음표는
앞으로 몇 정거장 뒤에 만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