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번, 100만 번은 어떻게 사는 거지’라는 질문을 품고 <100만 번 산 고양이>를 펼쳤다. 사노 요코(1938~2010)는 일본 아동 문학가이자 수필가이다. 그는 그림책을 통해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의 질문을 던진다. 그의 대표작 중 <아저씨 우산>은 우산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에서는 나이 핑계 대지 말고 원하는 삶을 살라고 한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서는 용기 있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처럼 삶에 대한 본질의 질문을 던지는 또 한 권의 책이 <100만 번 산 고양이>이다.
사노 요코는 <100만 번 산 고양이>에서 불교의 윤회설을 가져다 이야기를 시작한다. 윤회설에 따르면 이 생에서 공덕을 쌓거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거듭해야 한다. 곧 윤회한다는 것은 괴로움인 것이다. 하지만 이 생에서 삶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구원하는 경지에 이르면(부처가 되는 것) 윤회를 끝마칠 수도 있다. 그러니 100만 번이나 산다는 것은 고양이가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고양이는 백만 번 죽고 태어나면서 임금님, 뱃사공, 서커스단, 도둑, 홀로 사는 할머니, 어린 여자아이의 고양이로 다양한 삶을 살게 된다. 백만 명의 사람들이 고양이를 사랑했고, 고양이가 죽을 때마다 슬퍼한다. 하지만 고양이는 자신의 죽음에 무덤덤하다. 전혀 슬프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늘 주인에게 사랑받지만 고양이는 어느 누구도 사랑할 줄 모른다. 누군가의 소유물로 살아가는 고양이는 죽는 것쯤 겁나지 않고, 무엇이든 싫고, 무관심하고, 의욕이 없다. 임금님, 뱃사공, 마술사, 도둑 등 그들의 삶이 고양이의 삶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주인들의 신분이나 풍요로운 환경이 고양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백한 번째로 태어난 고양이는 처음으로 그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자기만의 고양이로 살아간다. 그제야 고양이는 자신을 좋아하게 된다. 자신의 삶을 살게 된 고양이는 “난 백 만 번이나 죽어봤다고. 새삼스럽게 이런 게 다 뭐야”(p.18)라며 당당하기까지 한다. 남이 아닌 자신의 색깔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삶을 당당하게 만든다. 이때 얼룩 고양이는 가장 고양이다웠고 자신의 사랑에 용기가 생긴다. 어떤 사랑도 사랑은 삶을 생기있게 하나보다. 하얀 고양이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얼룩 고양이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푸르렀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수레바퀴는 유한하다. 세월이 흘러 하얀 고양이가 죽고, 얼룩 고양이는 백만 년 동안 처음으로 운다. 자신을 사랑했다던 주인들의 울음보다 더 슬프게. 그림은 정지해 있지만 독자들은 얼룩 고양이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함께 운다. 목젖이 보이도록.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노 요코 글 그림, 비룡소, 2002) 본문에서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울었습니다. 아침이 되고 또 밤이 되고, 어느 날 낮에 고양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 본문에서
그동안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왔던 얼룩 고양이, 자기만의 진정한 삶이 아니었기에 백만 번이나 죽고 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하얀 고양이의 죽음 앞에서 백만 번 울고 그 곁에서 조용히 눈을 감은 얼룩 고양이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살고서야 윤회의 바퀴를 벗어 날 수 있었던 얼룩 고양이. 여기서 나는, 당신은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나는 오늘 백만 번이나 태어나지는 않는지. 현재 나는 유한한 삶의 수레바퀴에 올라타 있는지.
<100만 번 산 고양이>는 타자와의 관계, 사랑, 죽음, 윤회 등의 주제로 진정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몇몇 독자들은 어린이에게는 다소 어렵고 적합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청소년이나 어른들이 더 깊이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림책은 0세에서 100세까지 보는 책이다. 그만큼 연령층의 대상이 넓다. 아이들은 그들의 눈높이로 그림책을 본다. 어른들이 놓치는 부분을 아이들이 볼 수도 있다. 그림책이기에 가능하다. 그럼에도 어떤 독자들은 어린 자녀에게 이 그림책을 선뜻 읽어주지 못한다. 바다에 빠져 푹 젖은 걸레 같은 고양이를 뱃사공이 그물로 건져 올리는 장면이라든가 마술사가 실수로 고양이를 반으로 쓱싹쓱싹 자르고 말았다는 등의 표현은 잔인하다 못해 공포스럽고 괴기스럽기까지 할 수 있다. 또 얼룩 고양이가 백만 번 죽고 사는 태도는 냉소적이기도 하고 염세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100만 번 산 고양이>이에서 보여주는 냉소와 순정, 염세와 열정이 뒤섞인 감성은 위악도 허세도 아닐 수 있다. 어쩜 그것은 사노 요코의 삶 자체, 우리의 삶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는 어린 나이에 남동생과 오빠의 죽음을 겪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불화했으며 지독한 가난을 겪기도 했다. 일본과 독일의 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했으며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치매를 두려워하는 독거 할머니가 되었을 때는 암에 걸렸다. 병이 찾아왔을 때도 그녀는 <사는게 뭐라고> <죽는게 뭐라고> 두 권의 에세이를 썼다. 남동생의 죽음을 생각할 때는 매번 눈물을 보였지만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시크했던 사노 요코. <100만 번 산 고양이>의 “난 백만 번이나 죽어봤다고!”라는 얼룩 고양이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림책은 100만 번을 죽고 태어난다고 해도 자기가 없고 진정한 사랑이 없는 삶은 진짜가 아니라고 한다. 몇 억 겹을 살아도 그것은 산 것 이 아니라고 한다. 누구의 고양이가 아닌 온전한 나의 삶, 나는 오늘 백만 번이나 죽고 살아나고 있지는 않은지, 누구의 삶이 아닌 나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림책에서 질문을 얻는다. 내 삶의 질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