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우리 집 셰프
집을 좁혔더니 확실히 소비욕구가 줄었다. 특히 원 플러스 원. 소비요정을 불러내기 위한 마트의 총력전에도 눈과 귀가 닫힌다. 살지 말지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이사 온 집에는 물건을 쌓아둘 공간도 없고, 나는 더 이상 집에 순간의 욕망을 쌓아둘 생각이 없다.
관자놀이까지 조여오던 통증이 산 하나를 겨우 넘으며 조금 느슨해지자 남편은 입맛이 돌아왔다.
"도대체 내가 언제 요리하고 안 한 거야? 이 팬을 잡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네."
사실 그동안 문제에 치여 사느라 아이들 밥을 어떻게 해줬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애들에게 잘 주지 않던 컵라면도 선심 쓰듯 내주고, 간편식 햄버거나 한솥의 도움도 받았다. 하루의 스트레스를 맛있는 음식으로 해결하던 아빠가 정신이 없으니 소홀해진 집밥에 아이들도 서운했을 테다.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남편에게 톡을 보냈다.
"조금 있으면 내리는데 내가 목살 사갈까?"
오늘 저녁메뉴 카레에 필요한 목살을 챙겨본다.
"목살 샀어."
'오~오늘 시간여유가 있었나 보네. 오래간만에 장을 다 보고. 그렇다면 지금쯤 카레를 요리하고 있겠지?'
혼자 기대감이 상승한 나는 요리하는 남편을 상상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런데 집으로 향하는 복도에는 어디서 맡아본 듯한 이국적이고도 묘한 향신료 냄새가 풍겼다. 순간 내 눈앞엔 오래된 중국의 어느 골목 로컬 식당이 스쳐갈 정도였다.
'우리 집은 아니겠지."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아뿔싸, 우리 집이다! 이 정체 모를 냄새가 일순간 코끝을 마비시켰다.
"이게 무슨 냄새야?"
몇 걸음에 도착한 주방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덩어리가 펄펄 끓는 물 안에서 삶아지고 있었다.
'뜨악.'
"이건 미니족이잖아!"
족발은 딱 한번 요리했었는데 대실패를 했다. 해동의 문제였는지 잡내가 심했고, 족을 삶는 동안 온 집에 풍기는 역한 돼지냄새 때문에 괴로웠던 몇 개 없는 "다시는 해 먹지 않는 메뉴" 중 하나다.
"여보, 이게 뭐야. 오늘 카레해 먹는 거 아니었어?"
"카레도 하면 되지."
저 사람은 뭐든지 저렇게 쉽다.
"미니족 이거 8천 원에 샀어."
남편은 싸게 잘 샀다는 칭찬이 듣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삶기고 있는 미니족 옆 소스냄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정체 모를 냄새는 바로 시커먼 소스 안에 넘칠 듯 들어있는 약재였다. 족이 삼기는 냄새 위로 팔각 특유의 향이 덧입혀지고 있었다.
"족발은 사 먹는 거야"라던 남편이 목살 사러 갔다 미니족까지 들고 오다니. 요리하고픈 재료가 눈에 뜨였다는 건 정신적 긴장상태가 완화됐음을 의미했다.
해결할 문제가 지천에 널려있던 남편은 몇 개월간 저녁밥도 술로 대신한 날들이 많았다. 가족들에게 맛있는 한 끼를 해 먹이는 게 진짜 기쁨이라던 사람이 요리할 생각조차 잊은 것이다.
얼마나 급박했을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멈출 수밖에 없을 만큼 삶이 치열했고, 고단했으며, 숨 쉴 틈조차 없었다.
"요리할 정신이 어디 있냐?"
아마 그는 이 말을 내던지며 속으로 티 내지 못하는 불안과 힘겹게 싸웠을 게다.
"얘들아, 족발 먹어보자."
"와~ 아빠. 정말 파는 맛인데? 이번엔 대성공이야."
아들들은 마치 저녁을 굶기라도 한 듯 열한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촉촉한 족발을 무지막지하게 뜯어주신다.
남편이 자신의 요리에 감탄해 주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오랜만에 그에게서 보는 밝고 편안한 표정이다.
맛있는 냄새로 부엌이 가득 차고, 가족들이 하나둘 식탁에 모이고, 함께 웃고 이야기하는 시간.
그가 요리를 좋아하는 건 어쩌면 따뜻한 이 분위기 때문은 아닐까?
"여보, 덕분에 잘 먹었어."
"아빠~이건 진짜 팔아야 해."
"아니, 학교 급식 정말 맛없는데 아빠가 학교에 와주면 좋겠어."
가족들의 인정하는 말들이 그의 사랑나무에 물을 붓는다. 그리고 남편은 또 팬을 잡겠지.
혹여 잘못됐을 때를 떠올리며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써봤을 남편은 이제 족발을 성공시키며 말을 건넨다.
"나 돌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