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 갇힌 감정들

빈 집 - 기형도

by 하루살이

어제는 종일 집에서 보냈습니다. 전일 나눴던 친구부부와의 대화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별로 슬퍼보이지 않는다”던 친구의 말을 되뇌어보다가, 입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다 하루가 지나버렸습니다.


음미할수록 쓰고 텁텁하던 그 맛은 기형도가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서 곱씹던 상실과 고독의 맛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 집>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그는 공포와 망설임을 이겨내던 열망들을 잃고 촛불의 온기와 빛도 잃은 후, 밤은 길어지고 눈은 멀어버린 채로 문을 걸어 잠근 방 안에 홀로 자리합니다.


세상과의 교류를 스스로 막고 길고 어둔 밤, 찬 방바닥을 향하는 자폐적 선택을 할 정도로 상실에 무너졌네요.


열망도, 촛불도 잃어버리고 빈집이 되어버린 그의 마음은 절제된 시어와 말투에서처럼 무심(無心)해 보입니다.


눈물도 잃어버려서 슬퍼보이지 않을지도요.


하지만, 왜 마음이 없겠습니까? 시의 말미에 언급하듯, 가엾은 사랑은 그와 함께 빈집에 갇혔을 뿐입니다.



추풍유고음 - 가을 바람에 외롭게 읊조리니,

세로소지음 - 세상살이 내 맘 알아줄 이 적고

창외삼경우 - 창 밖으로 밤비가 내리는데,

등전만리심 - 등불 앞 내 마음, 만 리 밖을 내닫네

<추야우중> - 최치원



헤아려지지 못한 마음들이 으레 그렇듯, 깊은 밤, 홀로 시조를 읊으며 속으론 만 리 밖을 방황하던 최치원의 마음처럼,


제 슬픔도 기억 어딘가를 헤매입니다.


내비친 마음이 오해를 빚어 당신을 슬프게 했던 장면일까요? 앞서간 마음에 데여 떠난 인연에 아파한 장면일까요?


누군가의 비웃음을 살 바엔, 그림에 담긴 마음을 모두가 볼 수 없게 하겠다는 생각이 결국엔 여기까지 와버린 걸지도요.

항상 그래왔듯이, 균형을 잡기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굳은 슬픔이 풀어질 날이 올까요?



얼어붙은 마음에 누가 입맞춰 줄까요?

<입춘> - 한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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