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

by 하루살이

처음 사랑한다는 말을 상대에게 전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사랑한단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저 사랑한다는 말이 부끄러운 시대였다. 그뿐이었다.

상대의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한 시간 넘게 가로수를 쳐다봤다. 그러다 운동화 앞코로 모래를 차기도 하고, 젖은 흙이 나올 때까지 파헤치기도 하고. 개미들이 어린 애가 흘렸을 법한 과자 조각을 잘게 분해해서 나눠 들고 가는 모습도 바라보았다. 개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 사라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때도 나는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인가를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도,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애꿎은 모래를 괴롭히고, 개미들을 염탐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떤 말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그렇다고 떠나는 것도 아니었으며,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종용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은 마치 놀이터에 원래부터 속해있던 풍경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에게서 무슨 말을 기다렸을까. 사랑한다는 말을 기다린 게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부끄러운 시대였으니까. 나에게는.


그 사람과 만난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간신히 건넸다. 그럼에도 서로가 알고 있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열렬히 사랑하지도 않았고, 서로에게 최선을 다 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 했다. 다만, 서로에게 잘 해주는 정도로 고마웠을 뿐이다. 그래. 그 시절의 사랑이란 그저 고마움의 다른 말이었다. 몰랐으니까. 서로가 같은 마음이었으니 미안할 이유도 없었던 사랑, 아닌 연애.


그 계절을 열댓 번이 넘게 지나쳤다. 그러는 동안 나의 사랑은 막연히 연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나는 아직도 사랑이 뭔지 알지 못 하면서, 아파하고, 상처받고, 낫길 반복한다. 이것이 나의 사랑일까. 답 없는 질문만 입 안에 공허하게 맴돈다.


시대가 변했는지, 나만 몰랐는지. 세상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점점 번진다. 그 가벼움에 진실성을 의심 하다가도, 사랑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의 무게에 나는 곧 겸손해진다. 사랑한다는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


이전 07화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