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기억해 보자면, 소심하고 움츠러든 모습 밖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섭게 하는 대상이 없었는데도, 흡사 나뭇잎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도롱이 벌레처럼 나는 나를 가리고 숨기 바빴다.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엄마에게 이끌려 돌아설 때도 많았고. 그러다가 눈을 잡아끄는 장난감의 유혹에 넘어가면, 내부에서 극렬한 소심함과 그동안 돌아선 날들의 불만이 서로 대립하면서 결국 폭발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울며불며 떼를 썼는데 막상 성공한 적은 거의 없었다.
살아오면서 나를 힘들게 했던 일 중에 하나는 누군가의 앞에 나서는 일이었다.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까 봐, 나와서 문제를 풀어보라고 할까 봐, 차례가 다가올수록 극도의 긴장감으로 배가 아프기도 했다. 가끔은 닭살이 돋거나 몸이 경직될 정도로 긴장하기도 했는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커지면 그저 수업 끝을 알리는 종이 빨리 치기를 바라는 방법밖엔 없었다. 보통은 그마저도 원하는 대로 되진 않아 결국엔 어쨌는지도 모르게 발표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가면 그제야 온몸에 힘이 모두 빠져나가며 피로감을 느끼곤 했다.
새끼 때부터 지시에 잘 따르던 강아지는 다 커서도 앉으라는 명령에 따르듯이, 어려서부터 자의로 학습된 소심함은 그 형질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어 나는 여전히 소심한 인간이다. 다만 어린 시절과 다른 게 있다면 그것을 감추는 방법이 조금 더 익숙해졌다는 것. 오랜 시간을 서툴게 살면서 소심함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썼고, 완벽하진 않지만 차츰차츰 소심한 모습을 가면으로 덮어냈다. 가면 속의 모습이 어쨌든지 간에 이젠 웬만해선 불안한 모습을 들키지 않을 정도는 된 것도 같다. 물론, 가면을 쓰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다. 다만, 나의 가면은 그 대부분이 소심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존재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인 셈이라 변명하며 살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