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미스 선샤인', 노란색 동화 같은 보라색 우화

by harutada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여러 색상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색들은 빛이 나뉜 결과이기도 하면서, 각각이 애초에 그 빛을 이루고 있는 일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스펙트럼을 다시 프리즘에 통과시켜 원래의 빛으로 돌릴 수도 있다.


모두가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인물들 각각은 갖자기 색의 스펙트럼을 떠올리게 한다. 프랭크와 드웨인이 쫓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업적, 할아버지가 살았던 세대와 그가 추구하는 가치, 올리브의 부모들이 믿고 따르며 살아가는 미국의 삶, 그들 각각은 그렇게 형형색색이다.


그들은 같은 미니버스에 타서 다른 것을 보거나 다른 주제에 집중하며 시선과 의견이 갈린다. 노란색 버스에 탔다는 것 외에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그들이 탄 차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하다는 것, 그들이 꿈꾸는 삶에 비해 겉으로 보기에나 내면적으로나 한참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올리브는 어떨까. 왜 주인공이 다른 아이들보다 나은가 혹은 낫다고 느껴지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게 명백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지점도 있다. 뻔뻔하게 할아버지가 알려준 스트립댄스를 추는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뭐가 다르거나 달라 보이는 걸까.


경연대회의 아이들이 뭔가에 빙의된 아이들처럼 기이해 보인다면, 그게 아이들의 진심이 아니고 부모 세대의 투영인 것 같아서가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 부모들은 누구 또는 어떤 가치들의 투영일까. 도대체 그 모든 게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아버지인 리처드가 위화감을 느꼈던 건 그런 생각에 닿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을 한다.


올리브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사실 뭘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 아이는 스스로의 동력과 이유로 빛을 내려고 한다. 다른 아이들처럼 일말의 의심도 없이 맹목적일 수도 있고, 가족들이 걱정한 것처럼 결과를 뻔히 아니까 무대에 서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올리브는 망신당할 줄 알면서도 그래도 괜찮을 구석, 무대에 설 이유 하나를 가지고 꿋꿋이 나선다.


같은 이유로 올리브는 천국을 믿지도 않는 외삼촌이 천국에 갈 거라고 천연덕스럽게 얘기 해줄 수 있었고, 초인을 꿈꾼 오빠의 꿈이 송두리째 꺾였을 때 대회를 재촉하기보다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어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얘기하던 패배자가 자신이 아닐까 두려워하고, 다른 아이들과 본인의 외형이 너무나 다른 것을 깨닫고 위축되면서도 올리브는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데는 곁을 지켜준 사람들, 어른처럼 보이는 이들의 몫이 적지 않다. 비꼬는 것은 약자의 일이라고 얘기하던 리처드를 포함해, 엉망이나마 같이 춤을 춰준 가족들이 있다. 자신의 시간 5분을 더 내어 참가를 도와주거나, 클러치를 고치는 것 말고 수고스럽지만 차를 움직일 방법이 있단 걸 알려주거나, 우스꽝스러운 춤에 그저 슬며시 웃어주거나, 무대가 끝난 정적 속에서 환호를 보내는 것으로 각자의 응원을 한다. 그들의 숫자가 많지는 않고 힘이 없어 보여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보라색 황혼을 배경으로 모두가 집으로 향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노쇠했지만 따스했던 석양 같은 할아버지를, 가족들은 전날 밤에 잃었다. 힘든 일들이 닥칠 밤은 매일 찾아온다. 그리고 밤은 언제나 각자가 맞이해야 해서 두렵다. 사람마다 밤의 깊이와 길이는 다르다. 조명이나 수면제로 마치 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이룩하려고 하는 것, 중요하지만 슬프고 힘든 것들을 외면하는 그런 반쪽짜리 삶에서 이룩하려고 하는 것들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프랭크는 그런 가치를 높게 치는 경연대회의 세계라면, 적어도 캘리포니아 안에서는 속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영화는 빛도 들지 않는 어둠을 한참 쳐다보게 해서, 희미하게 윤곽을 눈치채게 하는 방식으로 현실의 세계와 문제에 대해 다룬다. 영화는 주류의 인물이 아니나마 빛이 비치는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 바깥의 현실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고 다만 그걸 함부로 다루지 않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죽은 할아버지의 얼굴, 자살을 기도한 외삼촌의 상처, 병원청구서의 비용, 경연대회의 결과, 각자의 과거나 내일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것들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이 이미 비슷한 종류의 상처를 겪었고 그게 어떤 상실이나 고통일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 플로리다프로젝트도 생각나고, 인사이드아웃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굳이 비교하고 싶은 생각은 그래서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어떤 것들을 놓고 생각할 때 줄을 세워 놓고 저울질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렇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최 측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경연대회는 어린이만 참가가 가능한데, 가족 모두가 참가해서 실력을 뽐냈으니 실격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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