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Term Memory', Casiopea

잊은 적 없는데 잊힌 기억

by harutada

https://youtu.be/731qNkD-HyQ?si=GAtdrY9eT7FpESSy


어릴 적에, 중학생 정도까지도 그보다 어릴 적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을 곱씹는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어서, 특히 술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주 오래 전의 것이 아니나마 점점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후회 같은 것들을 자주 곱씹곤 했다.


과거에 내게 있던 어떤 일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내 안에 남긴 감정이나 경험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남는다. 위문편지에 엉망으로 쓰였던 성의 없지만 의미 있는 글자들, 뻔뻔한 이별을 고하던 순간 사랑의 얼굴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바라보았던 석양, 선물에 설레면서 깬 성탄절 아침에 들려오던 떡장수의 목소리, 터울이 큰 막내동생이 갓 태어나 아기였을 적에 부드럽고 통통했던 손가락의 촉감, 어머니가 입원한 이후로는 먹을 수 없게 된 잔치국수의 기름지고 구수한 냄새, 아무 이유 없이 한여름에 내리 이삼백 미터를 내리뛰고 운동장에 대자로 누워 하늘을 볼 때 가슴이 터질 것 같던 심장의 박동, 그런 것들은 당연하게도 다양하고도 다채롭다.


그렇게 기억이나 추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하고, 그런 것들이 일상에 녹아들게 되면 이전과는 같을 수 없게 된다. 지금 현재가, 멀거나 가까운 미래에는 과거의 기억이 된다는 걸 인식하게 된다는점에서 그렇다. 아마 그렇게 살다가,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 나이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과거에 기대 살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그런데 시간이 경험을 따라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건 자연스러울뿐더러 나쁜 일은 아닌 것도 같다. 반대로 시간이 기억이나 원인을 따라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현재의 내 행동이 미래의 나에게 볼모가 될 것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다 보니 이상하게 더욱 과거의 것이거나, 불분명하게만 남은 기억들이 나를 붙잡게 되었다. 중요한 기억임이 분명한데 구체적으로 잡히지는 않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저 어떤 기억은 감정이나 느낌만으로 남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런 틔미한 것들이 근원적인 것, 나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임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버스에 타서 멀뚱히 서있을 때라거나 여름날 방바닥에 가만히 누워있을 때처럼 한가하기 짝이 없을 때 그 감정과 기억을 떠올려보고는 했다. 그러면 간혹 몇몇은 그 정체를 드러내고는 했다. 마치 옷장에 오래 묵힌 옷에서 나는 먼지냄새처럼, 계속 꺼내놓으면 언젠가는 묵은내가 가시고 희미하게나마 원래 옷에 베인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았다. 기억하려고 한다고, 당시로서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생각한들 그게 실제 기억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걸 그럴 때마다 새롭게 깨달았다.


Casiopea와 그들의 노래를 잘 알지 못하지만, 1983년에 발매한 'Photographs' 앨범은 즐겁고 낙관적이며 편안한 느낌이 좋아서 앨범단위로 처음부터 끝까지 재생해 듣고는 한다. 다양한 느낌의 여러 수록곡들이 실린 이 앨범은, 그 자체로 미래의 그들에게 보내는 다채로운 기억이자 원인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들은 이미 내가 깨달았던 사실들을 충분히 알만큼 횔동했다는 점에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침 이 앨범에서 제일 좋아하는 곡의 제목이 'Long Term Memory'여서도 그렇다.


아무 기억이나 오랜 뒤까지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부끄러운 기억은 부끄럽다는 자체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밤에 이불을 걷어찬 횟수만큼 기억을 반복해서 살아남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형태가 시각적인 것이든 아니든 대부분의 기억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즐거움 같은, 이름을 가진 대표적인 감정들은 그런 감정을 대변할 기억들로 더욱 뚜렷해진다. 그리고 그런 개별적인 기억들의 존재로 인해 개인의 개성과 영혼은 더욱 구별되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기억은 반복재생되지 않음에도 마음에 자리 잡는다. 무지개의 색이 일곱 가지가 아닌 것처럼, 감정의 종류는 무궁한데 그걸 표현할 단어가 없을 뿐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데 기쁨과 슬픔 같은 단어로 표현되지 않을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 최초의 기억은, 기억 자체가 그 감정의 이름이 된다. 그렇게 어떤 기억은 내 안에서 특정한 감정의 표상, 간판이 되어 살아남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감정을 느낄 때는 기억과 생리적인 몸의 반응의 중간쯤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 것 같다.


'Long Term Memory'는 그 자체로 그러한 종류의 기억에 관한 노래이거나, 적어도 내게는 그러한 감정에 관한 노래이다. 1983년에 발매된 노래의 정서나 배경을 내가 알리도 없으면서 내 안에 희미한 어떤 심상을 새겨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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