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사람보다 그냥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기 이해에서 시작된 자기 수용

by 하루의 생각


올해 초, 내 삶을 너무 애정하는 탓에 무작정 ’정말 멋있는 사람이 될 거야 ‘라며 스스로 다짐하고 눈을 번쩍이고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친구들과의 단톡방에도 무작정 멋있는 사람이 될 테니 말리지 말라며(?) 내 마음가짐을 통보하기도 했을 정도로 의욕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 마음가짐은 오래가지 못했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인정해 주는 멋진 사람이 목표가 아닌 그저 ’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어느새 바뀌었다.


인정 욕구는 그동안 나를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기 때문에, 그 인정욕구에 의한 목표만을 따라간다면 내가 원하는 형태의 행복은 누리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11월 중순을 향해가고 있는 지금, 나는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인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당당하게 답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다시 취업을 하게 될지 어떤 큰 변화가 나에게 닥칠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그렇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런 상태를 만들고, 지속할 수 있게 해 주었을까?


자기 진실성, 자기 수용성: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자기 검열 정도가 심하거나 도덕적 자아가 큰 사람의 경우 자기 안에 있는 무의식을 통제하려 들기 쉽다. 나 또한 그런 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올해 들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정말 있는 그대로, 아무도 없을 때 나와의 대화를 깊게 가져보라’는 조언을 받기도 했고, 그런 것을 직접 해볼 수 있던 회고 활동도, 그리고 나를 통제하고 있던 생각을 부숴버리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나에 대한 의심에서 생겨난 어떤 신념이 나의 선택들을 가로막고 있을 때, 갑자기 “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라는 질문을 받았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일까, 그 이유에는 사회에서의 비슷한 연령대 일반적인 사람들의 태도, 기준,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도 억지로 적용시키려고 하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평균이 모든 사람에게는 맞지 않듯 나에게도 어긋난 부분이 있었고, 저런 의문을 던지며 그것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결국 바뀔 수 있을지 자신 없었던 나의 일부분이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되는, 나의 정체성의 일부로 느껴지게 되었다. 그것이 항상 장점으로 보일 수는 없겠지만, 그걸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냐 부정하냐의 차이는 크다. 자기를 잘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은 나를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간다. 나 또한 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여럿 부분들이 생각보다 나를 구성하는 커다란 부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다.


자기 자신에게 날 것 그대로 솔직해져 본 적이 있나? 사실, 지금도 100% 솔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순간순간의 감정을 포착하고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태도는 연습으로 길러지고 있다.



엄격한 잣대를 버리기

자기 이해와 자기 수용 정도가 높아진다면, 자신에게 들이밀던 엄격한 잣대 또한 부러지게 된다. (물론 지금도 완벽하게 부러뜨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동안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과 함께 높은 자기 기준을 갖고 살면서 일상의 여유마저도 쉽게 갖기 어렵기도 했으며 때로는 일상의 사소한 선택도 쉬이 하기 어려울 지겨에 이르기도 했다.


그런 엄격함에서는 흔히 작은 성취보다 실수에 집중하게 되고,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한동안 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크기도 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어떤 것도 실행으로 옮기는 것에 큰 부담을 지어준다.


자기 수용은 자기 긍정의 태도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앞으로 더 나아가고, 지금의 상태에서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주는 용기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가 선택했던 많은 것들이 있지만 결국 그 행위의 밑바닥에는 자기 수용과 자기 긍정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