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얼마간은 계속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생 때는 세상 모든 직장인이 멋지고 성숙한 어른인 줄 알았는데 회사에서 나는 ‘쭈그리’가 따로 없었다.
그때 나는 일이 손에 잘 익지 않아서 매일 같은 업무를 하면서도 항상 허둥댔고, 자료를 요청하는 짧은 이메일을 쓰는 데도 30분씩 걸렸다. '이제는 일이 좀 할 만하니?'라는 선배들의 질문을 받으면 여태껏 어려움을 겪는 나 자신이 느리고 답답한 사람인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도 모두가 나의 미숙함에 혀를 차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스스로를 갉아먹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직장에서의 미운 나는 싹 지우고, 아는 사람 없는 낯선 곳으로 가 당당하고 멋진 모습으로 다시 사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현실 도피를 꿈꾸는 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은 그저 무턱대고 견디며 그 시절을 지나왔다.
시간을 되돌려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시와의 노래 <새 이름을 갖고 싶어>를 들려주고 싶다.
갖고 싶어 새로운 이름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시작하는 듯 새로운 인생
지어줄래 새로운 이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이제부터 만나는 사람은 새 이름으로 부르게 될 거야
시와는 서정적인 듯 성숙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다른 삶을 꿈꾼다고 노래한다. 마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어른이 너 하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가만히 듣다 보면 못난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던 연약한 마음도 ‘그래,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초년생 시기를 지나 직장인 n년차에 접어든 지금도 나는 가끔 실수를 하고, 처음 맡은 일에서는 실패하기도 한다. 정말 못해먹겠다 싶어서 다 내려놓고 멀리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요즘은 아무런 자책 없이 새 이름, 새 인생을 상상한다. 일을 하다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것임을 인정하고,직장에서의 나와 직장 밖에서의 나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요즘 공상하는 '새로운 인생'은 바다가 잘 보이는 마을에서 느릿느릿 사는 삶이다. 이왕이면 서핑도 할 수 있는 마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과에 대한 긴장과 일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매일 해가 뜨고 질 때까지 바다와 하늘을 보는 인생은 어떨까? 몸과 마음에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물 위에 누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평온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번 생에는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미 규칙적인 월급의 맛을 알고, 그것을 포기할 용기는 없다. 그렇지만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고 울적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삶을 꿈꾸면서 나의 일상은 더 재미있어졌다.삶 전체를 완전히 다시 시작할 수는 없지만, 현실을 살면서도 틈틈이 새로운 사람이 될 수는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바닷가 마을로 이사를 갈 수는 없어도 조금 긴 휴가를 내고 바다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며 '한 달간 바닷가 사람'이 되어볼 순 있을 것이다. 주말을 조금 더 부지런하게 보낸다면 '일주일에 한 번 서퍼'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끔씩 틈틈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선은 눈앞에 있는 직장인으로서의 현실을 잘 마주하기로 한다. '가끔씩 틈틈이 새로운 사람'이라는 꿈이 일상을 더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