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선배가 알려준 서울 속 케렌시아
일터에서 만난 좋은 사람,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이전에 다녔던 회사는 광화문 쪽에 있었다. 요즘도 근처를 지날 때면 그 시절 기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는 모 선배가 있다.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이었고, 선배는 나름 회사에서 자기 몫을 해내는 든든한 일꾼이었다. 그때 우리는 둘 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팀장이라는 공통의 스트레스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팀장은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무례했다. 직원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너', '너네'라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썼고, 일부 직원에게는 "너는 무식하다", "배운 게 없다"라며 인격모독을 했다. 팀장은 모든 말과 행동에 호통과 신경질이 있었다. 좀 진정하시라고 하면 도리어 "난 전혀 화를 내고 있지 않은데 무슨 소리냐"라고 화를 냈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상대를 윽박지르는 방식을 '대화'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무례함과 공격성에 질려버린 상대가 비로소 '뜻대로 하세요' 하고 포기하면 아주 좋은 대화였다고 만족해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선배는 자주 울적하고 피폐해 보였다. 선배는 종종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고 혼자 어딘가에 가 있었고, 돌아오면 눈가가 조금 빨개져 있었다. 그래도 선배는 나에게 친절했다. 업무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질문을 해도 싫은 기색 없이 알려주었고, 이쪽 커리어로 잘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공부하면 좋을지도 자신의 경험에 빗대 알려주었다. 속은 아수라장인데 애써 꾹꾹 참고 후배에게 다정하고자 노력했을 그 마음을, 그 당시에 나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내 마음도 만만치 않게 아수라장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선배와 둘이 점심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복귀하던 중이었다. 문득 선배가 조금만 걸으면 경희궁이 있으니 가보자고 했다. 그때까지 난 회사 근처에 경희궁이 있는지조차 몰랐었다.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선배가 이야기했다.
"나는 너무 힘들면 잠깐 경희궁에 가 있어요. 사람도 많이 안 오고, 새소리만 들려서 있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지거든요. 그러니까 앞으로 하루씨도 일하다가 너무 힘들면 잠깐 쉬다 들어가요."
그때 선배의 그 마음 상태가 어땠을지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경희궁 앞마당을 서성이다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는 회사를 그만뒀다. 선배의 퇴사로 나는 업무에 관해 물어보고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 잃었다. 선배가 떠난 이후에도 나는 팀장이 만드는 고압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어찌어찌 회사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몸도, 마음도, 점점 더 병들어 갔다. 결국 나는 탈진했고 입사 10개월 만에 퇴사했다. 이후로 나는 다른 회사에 들어갔고, 선배와는 연락하지 않은 채로 지금까지 지내고 있다.
그러다 몇 년 전 케렌시아(Querencia)라는 스페인어를 알게 됐다. 케렌시아는 피난처 혹은 안식처라는 의미로, 마지막 결투를 앞둔 투우장의 소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휴식 장소를 뜻한다. 지금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조용히 혼자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수 있는 곳, 그러니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자기만의 쉼터'의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그때 선배는 나에게 자신의 케렌시아를 알려준 것이었다. 지치고 힘겨울 때 찾아가는 자기만의 쉼터, 방해받고 싶지 않은 안전한 공간. 그곳을 같은 직장 사람인 나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었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문득 고마웠다. 그래서 한동안 경희궁 쪽을 지날 때마다 선배 생각이 많이 났고, 마음으로나마 선배가 지금은 좋은 곳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잘 지내고 있길 바랐다.
얼마 전에는 그때를 떠올리면서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때 선배는 내가 많이 힘들었단 걸 알았던 거겠지? 그러니까 나한테도 경희궁을 알려준 거 아닐까? 지금 생각해보니까 나를 생각해줬던 선배의 그 마음이 참 고맙더라."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예상과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어차피 자기는 곧 회사 그만둘 거니까 너한테 알려줘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한 거 아냐?"
그런 식으로는 생각 안 해봤는데! 친구의 말을 듣고는 '아 내가 선배 의도와는 다르게 너무 과대한 해석을 했을 수도 있겠네'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과대해도 상관없다. 내 기억에 대한 해석은 내가 하는 것이니까. 어찌 됐든 선배는 지금 나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